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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 숲과 한국 문화

소나무 숲이 어떻게 농경사회를 지탱했는가? 우선 조선 시대를 살펴보면 우리는 다른 답을 얻을 수 없을 만큼 소나무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사회였습니다. 1910년도 한일병합이 되기 전에 조선통감부는 3월부터 7월까지 조선 전역의 산림에 대해서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수종 구성은 어떤가 예를 들면 구체적인 건 못 밝히더라도 활엽수인가, 소나무인가, 소나무 외의 침엽수인가를 밝혀냈습니다. 조선 시대 누가 어떤 산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1910년 숲은 단숨에 자라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저 기록을 통해 조선 말기 산림 상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아주 큰 용량의 디지털 자료를 뽑아서 낸 겁니다. 우리나라 국립산림과학원은 이 자료를 가지고 아주 재미난 데이터를 도출했어요. 가운데 것은 소나무 숲의 분포 지역을 나타내는 거고, 저것은 언어 지도로 앞에 보여 드렸던 지도를 가지고 조선 시대 때 어떤 숲이 있었는가를 보여 주고, 맨 오른쪽에 있는 것은 활엽수들은 산악지방과 북한지방에 북쪽지방에 많았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남부 지방, 해안가, 북부 지방의 해안가 지방, 개마고원 일대가 전부 초록색 소나무 숲이 차지한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소나무 숲은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한반도 저지대의 대부분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죠.

2002년에 정치영 선생이 조선 후기의 인구를 지역별로 분류해 인구 밀도까지 나타낸 지도를 보면, 해안가 주변 지역들의 인구가 밀집하고 또 남부지방의 곳곳이 인구가 밀집함을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경작지 면적도 해안가 주변과 남부지방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놀랍게도 그와 유사하게 소나무 숲들도 인구가 밀집한 지역 경작지 주변 남부지방 해안가 곳곳에 다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조선 시대 소나무 숲이 어디에 있었고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인구 비율은 1678년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6%가 살았고 1726년의 경우에는 약 25% 정도가 살았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구의 4분의 3은 소나무와 밀접한 지역에서 살아 왔다고도 거칠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사회의 농경사회를 지탱한 임산자원은 대부분 소나무 숲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나무도 썼죠. 그렇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농경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작지가 있어야 됩니다. 조선은 건국 시기 인구가 570여만 명에서 차츰 늘어나서 1700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늘어나는 입의 수만큼 경작지가 늘어야 되고, 그 경작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토양 비옥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임상 유기물, 이른바 낙엽, 낙지(떨어진 가지), 잎을 끌어 모아서 퇴비로 만들어야 합니다. 불을 뗀 재와 사람의 똥, 가축의 똥오줌을 가지고 퇴비를 만들어서 지력을 유지해야 되죠. 그래서 인가나 마을 주변의 숲들은 점차 계속해서 임상 유기물을 끌어다 쓰게 되고, 결국 산림토양의 질이 나빠졌습니다. 나빠진 산림토양에서는 일반 활엽수들은 자랄 수 없고,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활엽수 숲은 점차 도태되고 점차 주변의 숲은 소나무 숲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게 소나무 단순림 구조가 되었다고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죠.

조선은 건국하자마자 소나무 관련 강력한 정책을 시행합니다. 왜? 재정을 뒷받침하는 세곡 운반선은 소나무로 만든 좋은 배였습니다. 오늘날엔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세금도 내고 다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기차도 없었습니다. 국가 재정을 충당할 길은 오직 각 지역마다 농민이 낸 쌀이라는 세금을 강이나 바다를 통해서 배로 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운선, 세곡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재를 확보하는 것이 나라의 건강한 재정을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세곡 운반선은 다른 나무로는 못 만들었어요. 오직 소나무로만 만들었어요.

두 번째 외침을 맞는 전남은 거북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선과 판옥선도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재정, 국가의 안정, 이걸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 소나무였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세 번째로 조선에 와서는 건축재도 마땅한 게 없었습니다. 고려 때만 해도 느티나무나 다른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를 썼지만, 인가 주변의 굵은 활엽수들은 이미 다 베어졌고, 남은 것은 소나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궁궐 건축재는 무엇으로 가지고 썼다? 소나무로 건축재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소나무가 없으면 궁궐조차도 옳게 지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조선은 강력하게 소나무 보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통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가능하면 주자 가례를 백성들한테 주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이 유교식 매장 문화 장려였습니다. 이른바 죽음을 관과 곽에 넣어서 땅에 매장하는 것을 국가에서 강력한 정책으로 시행했는데, 그 관제는 오직 소나무만 쓰게 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천 가지 나무들이 조선반도에서 자랐지만, 오직 소나무만 중요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세종은 ‘송목양성병선수호조건(松木養盛兵船守護條件)’이라 해서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아주 강력한 규정을 만들었고, 1808년까지 산림과 관련 법령들은 대부분 소나무와 관련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산림 정책은 오직 소나무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입니다. 공조산림조의 조선의 산림은 오직 소나무 한 가지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듯, 조선 초기부터 소나무는 함부로 벨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금송 또는 송금은 베지 말아야 할 소나무를 지키자는 말입니다. 소나무 행정인 송정, 모두 의송지지라든지, 연해금산이라든지, 의송산이라든지, 송전이라든지, 봉산을 지정한 이 모든 일들에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왜? 배를 만들고 궁궐을 만들고 관자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금요특강

전영우 | 숲과 한국문화

소나무 숲이 어떻게 농경사회를 지탱했는가? 우선 조선 시대를 살펴보면 우리는 다른 답을 얻을 수 없을 만큼 소나무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사회였습니다. 1910년도 한일병합이 되기 전에 조선통감부는 3월부터 7월까지 조선 전역의 산림에 대해서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수종 구성은 어떤가 예를 들면 구체적인 건 못 밝히더라도 활엽수인가, 소나무인가, 소나무 외의 침엽수인가를 밝혀냈습니다. 조선 시대 누가 어떤 산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1910년 숲은 단숨에 자라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저 기록을 통해 조선 말기 산림 상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아주 큰 용량의 디지털 자료를 뽑아서 낸 겁니다. 우리나라 국립산림과학원은 이 자료를 가지고 아주 재미난 데이터를 도출했어요. 가운데 것은 소나무 숲의 분포 지역을 나타내는 거고, 저것은 언어 지도로 앞에 보여 드렸던 지도를 가지고 조선 시대 때 어떤 숲이 있었는가를 보여 주고, 맨 오른쪽에 있는 것은 활엽수들은 산악지방과 북한지방에 북쪽지방에 많았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남부 지방, 해안가, 북부 지방의 해안가 지방, 개마고원 일대가 전부 초록색 소나무 숲이 차지한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소나무 숲은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한반도 저지대의 대부분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죠.

2002년에 정치영 선생이 조선 후기의 인구를 지역별로 분류해 인구 밀도까지 나타낸 지도를 보면, 해안가 주변 지역들의 인구가 밀집하고 또 남부지방의 곳곳이 인구가 밀집함을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경작지 면적도 해안가 주변과 남부지방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놀랍게도 그와 유사하게 소나무 숲들도 인구가 밀집한 지역 경작지 주변 남부지방 해안가 곳곳에 다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조선 시대 소나무 숲이 어디에 있었고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인구 비율은 1678년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6%가 살았고 1726년의 경우에는 약 25% 정도가 살았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구의 4분의 3은 소나무와 밀접한 지역에서 살아 왔다고도 거칠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사회의 농경사회를 지탱한 임산자원은 대부분 소나무 숲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나무도 썼죠. 그렇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농경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작지가 있어야 됩니다. 조선은 건국 시기 인구가 570여만 명에서 차츰 늘어나서 1700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늘어나는 입의 수만큼 경작지가 늘어야 되고, 그 경작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토양 비옥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임상 유기물, 이른바 낙엽, 낙지(떨어진 가지), 잎을 끌어 모아서 퇴비로 만들어야 합니다. 불을 뗀 재와 사람의 똥, 가축의 똥오줌을 가지고 퇴비를 만들어서 지력을 유지해야 되죠. 그래서 인가나 마을 주변의 숲들은 점차 계속해서 임상 유기물을 끌어다 쓰게 되고, 결국 산림토양의 질이 나빠졌습니다. 나빠진 산림토양에서는 일반 활엽수들은 자랄 수 없고,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활엽수 숲은 점차 도태되고 점차 주변의 숲은 소나무 숲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게 소나무 단순림 구조가 되었다고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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