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프랑스 파리 '시민기후협약', 기후시민 공론장
- Dhandhan Kim
- 6월 4일
- 3분 분량
2025-06-04 김복연 기자
프랑스 시민기후협약은 시민의 숙의를 통해 기후 정책 제안을 도출한 실험적 민주주의 모델로, 생활 밀착형 기후 대응 방안을 제안했다. 정부의 미흡한 이행으로 제안의 절반 이상이 채택되지 않았으며, 시민들의 정치적 신뢰와 실행력 확보에 한계가 드러났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으로 AI 기반 공론장이 제시되며, 시민 참여의 확대와 정책 이행 추적을 가능케 하는 도구로서 AI의 가능성이 주목된다.
2019년 가을, 프랑스는 기후위기 대응의 실험을 시작했다. '시민기후협약(Convention Citoyenne pour le Climat)'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 공론장은, 정부가 무작위로 선발한 150명의 시민이 9개월간 숙의하며 온실가스 40% 감축 방안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었다. 이 시도는 단순한 시민 토론회를 넘어, 대표성과 숙의성을 갖춘 ‘기후 민주주의’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여정은 완전한 성공도, 완전한 실패도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시민이 논의한 것은 거대 담론이 아닌, 생활 속 기후 전환
시민기후협약은 식량, 주거, 이동 수단, 소비, 생산 등 5개 분과로 나뉘어 각 분야의 기후 대응 방안을 제안했다. 시민들은 전문가의 브리핑을 듣고, 시민 사회 단체의 의견을 경청하며, 동료 시민들과 열띤 토론을 거쳐 총 149개의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만들어 냈다. 단순히 "기후가 중요하다"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주택 개조 의무화", "고속도로 속도 제한 110km/h 하향", "단거리 항공편 금지" 등 일상의 선택을 바꾸는 실천적 안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생활을 바꾸는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의미 있었던 점은, 시민이 기후 정책의 수용자에서 창안자로 변모한 과정 그 자체였다. 무작위로 뽑힌 시민들이 '일반인'이 아닌 '기후 전문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단순한 찬반을 넘어 정책의 사회적 맥락과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함께 고민했다. 이는 기존 정치에서 소외되던 기후 정책의 '정당성 위기'를 풀어가는 하나의 해법으로 주목되었다.
실행력의 벽, 정부의 후퇴와 시민의 실망
이 역사적인 실험은 제안의 절반 이상이 수용되지 않으며 아쉬움을 남겼다. 마크롱 대통령은 처음에는 "필터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 했지만, 실제 입법화된 것은 일부에 그쳤다. 고속도로 속도제한 하향은 사회적 반발을 우려해 제외됐고, 배당세 인상 제안은 경제계 반발로 철회됐다. 헌법에 환경보호 조항을 넣자는 제안도 의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제안이 정치권에서 희석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보며 좌절감을 느꼈다. 최종 평가에서 시민들은 정부 응답에 대해 평균 3.3/10, 프랑스의 기후 목표 달성 가능성에 대해 2.5/10의 낮은 신뢰도를 보였다.
이는 시민 의회 모델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 준다. 시민들이 아무리 정교한 제안을 만들어도, 그것이 제도권 내에서 정치적 타협을 거치며 실질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후속 체계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국민이 결정한다"라는 메시지는 강력했지만, 정작 결정 권한은 시민이 아닌 정부와 의회에 있었다. 대표성에도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이 간극은 시민의 정치적 신뢰를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슷한 사례는 유럽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일랜드는 2017년 시민 의회를 통해 기후변화 대응 방안을 논의했고, 그 결과 탄소세 인상, 재생에너지 확대, 교통 전환 등 13개의 권고안을 도출했으나, 일부만이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독일 역시 2021년 160명의 시민이 참여한 '기후 시민 의회(Bürgerrat Klima)'를 통해 교통, 에너지, 농업 분야에서 총 77개의 안을 냈지만, 정치권의 전면 수용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흐름은 시민의 아이디어가 실제 정치 결정 구조에 흡수되지 못하는 제도적 단절을 공통으로 드러낸다. 시민의 열정과 숙의가 실행의 문턱에서 좌절되는 경험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시민 참여의 구조화뿐 아니라, 그 실행력을 담보하는 제도적 연계 장치의 설계가 병행되어야 한다.
AI 시민 공론장으로 확장할 수 있을까
이 미완의 실험은 어떻게 보완될 수 있을까. 프랑스 시민기후협약은 시민 스스로 대표성 획득과 숙의 과정에 참여하고 이끌었다는 점에서 민주적 실험으로서 큰 의미가 있었지만, 여론 형성의 확산이나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참여 인원이 15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시민 사회 전체의 분위기나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충분히 흡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시민 의회는 '숙의 민주주의의 모델'로서는 유효했으나, '여론 민주주의의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은 미비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하나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AI 시민 공론장'이다. AI는 기후위기라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를 구조화하고, 더 폭넓은 시민들이 정보에 기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복잡한 과학 데이터를 요약해 제공하거나, 시민들의 의견을 자동 분류해 쟁점을 시각화하며, 중복된 의견을 통합하고 논의의 격차를 좁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 공론화 이후 입법 및 집행 과정을 시민이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 경로 시각화 도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AI가 참여 이후의 불이행을 감시하는 도구로 기능할 경우, 시민 의회가 '의견 표출의 장'에 그치지 않고 '정책 감시와 책임 요구의 통로'로 진화할 수 있다.
거버넌스 강화 도구로서의 AI
또다른 AI의 가능성은 기술적 보조를 넘어, 책임 회피를 막고 정책 후속 조치를 추적할 수 있는 거버넌스 강화 도구의 기능에 있다. 예를 들어, 시민 의회의 권고안이 정부나 의회에 전달된 이후, AI는 그 이행 여부를 정량적 데이터와 정성적 분석을 통해 모니터링하고, 일정 주기로 시민에게 그 결과를 투명하게 피드백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 이른바 'AI 기반 정책 이행 추적 시스템'은 정치적 책임을 가시화하고 정부의 후속 조치를 시민 스스로 점검하고 요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대만의 vTaiwan 플랫폼, 스페인의 Decidim 모델 등은 AI 기반 참여 플랫폼을 통해 시민 참여의 심도를 높이는 동시에, 정책 집행의 추적성과 피드백 메커니즘을 강화하고 있다. 프랑스의 시민기후협약도 이러한 기술적 보완이 있었다면, 더 많은 시민 의견을 효율적으로 수렴하고, 권고안의 설득력을 높이며, 정치적 책임의 실행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시민기후의회는 끝나지 않았다. 비록 시민기후협약의 제안이 온전히 실현되진 않았지만, 이 실험은 정치와 시민 사회에 강한 질문을 던졌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고, 시민의 책임은 어디까지이며, 민주주의는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실험이다. 참여를 선언에서 끝내지 않고, 구조로 정착시키기 위해 최근의 AI 기술과 민주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시민형 AI공론장을 상상해 본다.
기존의 시민의회 모델이 시민형AI 공론장으로 보완 발전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