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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의 생태포럼 | 건조함이 만드는 숲

 

2024-12-05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향을 내는 식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지역이 따뜻한 남쪽나라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을 청년과 추어탕을 먹으면서 소멸해가는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추어탕은 미꾸라지가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지역마다 재료와 형태가 다양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울산의 추어탕에는 보통 방아풀(배초향, Agastache rugosa)과 제피가루(초피나무, Zanthoxylum piperitum 열매 껍질을 말려서 곱게 간 것)가 들어갑니다. 향이 독특해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방아풀과 제피가루가 들어간 음식들이 남부지방의 생태계를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손님이 오시면 추어탕을 비롯해 남부지방의 향이 담긴 음식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남부지방에는 매운탕이나 반찬에도 제피가루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고, 방아풀을 넣어 부친 전도 있습니다. 방아풀이 속한 꿀풀과에는 들깨나 박하처럼 향이 강한 식물이 많습니다. 제피가 속한 운향과에도 귤이나 황벽나무처럼 향이 강한 식물이 많은데, 요즘 학생들이 많이 먹는 마라탕의 ‘마’가 초피나무의 얼얼한 맛을 의미합니다. 동파육을 비롯한 여러 중국식 고기 요리에 두루 들어가는 정향과 팔각, 양꼬치를 찍어 먹는 쿠민, 쌀국수를 비롯한 동남아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요리에 들어가는 고수, 인도의 카레에 들어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향신료 등 향을 내는 많은 식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지역은 주로 따뜻한 남쪽 나라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방아풀과 제피는 남부지방에서 사용하는 지역명입니다. 식물분류학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각각 배초향과 초피나무입니다.

우리의 숲 보다 더 강렬하고 다양한 향기를 풍기는 숲이 있습니다. 바로 지중해의 숲입니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고, 겨울에는 대체로 건조합니다. 하지만 지중해는 반대로 여름이 건조하고, 겨울에 비나 눈이 많이 내립니다. 이러한 지중해와 비슷한 기후를 가진 지역들을 지중해성 기후(Mediterranean Climate)라고 합니다. 지중해의 숲에는 이런 기후에 적응한 상록수와 키 작은 나무들이 자랍니다. 주로 만날 수 있는 종들은 라벤더, 로즈마리, 민트처럼 강한 향을 가진 식물과 함께 코르크가 두껍게 발달한 참나무류와 건조에 강한 소나무류, 올리브나무들입니다. 뜨겁고 건조한 태양이 내리쬐는 지중해의 숲은 다양하고 강렬한 향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걷다가 길가의 허브를 건드리면 향은 더 강하게 퍼져 나갑니다. 허브에 스친 손등과 바지에는 허브의 향이 배입니다.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아의 숲입니다. 건조한 지역의 나무들은 작지만 강한 향을 내뿜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는 어떻게 이런 향기로운 숲을 만들어 냈을까요? 건조한 여름은 식물에게 아주 가혹한 환경입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는 빛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이 필요합니다. 여름의 지중해에는 햇빛이 충분합니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잎 뒷면의 기공을 열어야 하는데, 기공을 열면 소중한 물이 증발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중해의 여름은 비가 아주 적게 내립니다. 섣불리 기공을 열었다가는 얼마 없는 물을 전부 잃어버리고 식물은 말라죽게 됩니다. 지중해성 기후의 식물들은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두꺼운 왁스층을 가진 잎을 만들어 수분의 증발을 줄이거나, 잎의 표면적을 줄이기 위해 가시와 같은 잎을 가진 식물들이 주로 살아남았습니다. 올리브나무처럼 아주 깊이 뿌리를 뻗어 지하수를 이용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다육식물들은 아예 낮에는 기공을 닫은 채 포도당만 합성하고, 밤에만 기공을 열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가혹한 환경에서는 초식동물로부터 소중한 잎을 지키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초식동물이 잎을 뜯어먹으면 새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의 숲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이른 봄부터 애벌레나 곤충, 포유류 등의 초식동물로부터 잎을 뜯어 먹히며 살아갑니다. 잎을 잃으면 더 많은 잎을 만들어 냅니다. 일부 잎은 먹이로 내어 주고, 나머지 잎을 살리거나 새 잎을 틔워서 광합성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여름이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새 잎을 만드는 전략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새 잎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물이 필요합니다.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잎에서 흡수한 이산화탄소로 포도당을 만들고, 그 포도당으로 셀룰로스를 만들어야 새 잎을 틔우고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새 잎을 만들기 위한 물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중해성 기후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잎사귀 한장한장이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잎을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잎을 지키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초식동물로부터 잎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만들거나, 초식동물이 먹기 싫어하는 맛과 향을 내는 물질을 생산하거나, 소화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의 물질을 잔뜩 만들어서 세포 안에 쌓아 두기도 합니다. 

지중해성 기후의 식물들은 강한 향기뿐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식물이 만들어 낸 2차 대사산물을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화학적인 방어를 위한 물질들을 2차 대사산물이라고 부릅니다. 1차 대사산물은 일반적으로 식물의 생장과 발달, 번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대사산물입니다. 포도당과 아미노산 같은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물질들입니다. 반면 2차 대사산물은 방어 또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는 독특하고 부수적인 물질들입니다. 도토리의 탄닌처럼 소화되기 힘든 떫은 맛을 내는 물질이나 피마자 씨앗의 리신처럼 독성물질을 만들기도 합니다. 인삼의 사포닌, 고추의 캡사이신, 마늘의 알리신, 허브의 향을 내는 다양한 물질들도 모두 2차 대사산물입니다. 식물의 생장과 발달, 번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2차 대사산물이 부족하다고 해서 식물이 죽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경쟁이나 방어에 필요한 물질이 부족하다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존과 번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식물들은 2차 대사산물을 이용해 초식동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하지만 같은 종 또는 다른 종과 상호작용하는 물질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식물에게서 얻는 향료, 의약품 등이 대부분 2차 대사산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꽃에 담긴 향기, 찻잎이 가진 쌉싸름한 맛과 차분한 향, 하루의 활력을 주는 커피에 녹아 있는 카페인, 음료와 케잌에 향을 더하는 오렌지와 레몬의 시트러스 향, 껌과 사탕에 들어가는 페퍼민트의 향, 딸과 아빠 사이의 벽처럼 느껴지는 민트초코 등 이 모든 것들은 식물이 만들어 낸 2차 대사산물입니다.


커피에 녹아있는 카페인도 식물이 만드는 2차 대사산물입니다.
커피에 녹아있는 카페인도 식물이 만드는 2차 대사산물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식물이 만들어 낸 2차 대사산물을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이 물질들은 농장에서 기르고, 공장에서 추출한 뒤 제품으로 만들어서 우리 손에 오기도 하지만, 가까운 정원이나 베란다의 텃밭, 화분에서 우리의 부엌으로 오기도 합니다. 저는 정원이나 텃밭, 화분 쪽에서 만들어지는 물질들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기후변화나 탄소배출처럼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정원에서 잘 키운 식물은 훨씬 풍부하면서도 복잡한 맛과 향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리고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지중해의 숲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중해에서 온 허브를 우리 삶 속에서 기르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일입니다. 화분에서 기른 바질을 넣은 토마토소스 파스타, 민트를 으깨 넣은 모히또, 로즈마리를 얹은 샐러드,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과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가 소중합니다. 식물들이 주는 맛과 향을 즐기며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지중해의 숲의 풍경과 향기를 상상해 보세요.

정원에서 딴 허브가 잔뜩 들어간 오일파스타 입니다. 정원의 향을 오롯이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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