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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의 생태포럼 | 줄기로 만드는 숲

 

2024-11-29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의 줄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우리는 굵고 튼튼한 나무의 줄기에서 강인함과 인내를 느낍니다. 줄기 안에 감춰진 나이테에 새겨진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오래전의 과거를 되짚어 보기도 합니다. 오래 살아온 나무는 지혜와 성장을 상징하며, 신화 속 세계수처럼 생명과 세상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줄기와 힘차게 뻗은 가지를 사랑합니다.


식물을 전공한 사람들은 나무의 줄기만 보고도 그 나무의 이름을 맞출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도 줄기만 보고 이름을 맞출 수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대나무입니다. (사실 대나무도 92개 속, 5000여 종을 포함하는 거대한 분류군입니다만, 전공자가 아닌 이상 대나무까지만 알아보셔도 무방합니다.) 대나무는 따뜻한 남부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충청 이남 지역의 야트막한 산이나 들판에서 대나무의 군락지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곧게 뻗은 대나무의 줄기는 정말 멋집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대나무의 올곧은 모습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하여 사군자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이른 봄에 홀로 꽃을 피우는 고고한 매화,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은은한 향기로 숲을 채우는 난초, 모든 초목이 시드는 가을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 국화와 함께 사계절 곧고 푸른 대나무는 유교사회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품격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사군자로 채워진 정원을 만들 수 있을까요? 매화, 난초, 국화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은데, 대나무가 어렵습니다. 왠지 모르게 정원에 심은 대나무들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가늘고 시들시들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푸르른 대나무를 담장처럼 정원에 둘러치고 싶지만 대나무는 건강하게 자라주지 않습니다. 왜 정원에서 대나무를 키우는 일은 이리도 어려울까요? 


대나무는 아주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름은 대‘나무’이지만 나무가 아니라 풀에 가깝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어떤 식물이 풀이 아닌 나무로 분류되려면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로 목질부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형성층이 있어 부피 생장을 해야 합니다. 대나무는 목질부는 있지만 형성층이 없어 부피생장을 하지 않습니다. 나무들은 껍질 아래 형성층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세포분열이 일어납니다. 매년 조금씩 자라 굵어지면서 나이테라는 흔적을 남깁니다. 하지만 대나무는 형성층도 없고, 나이테도 만들지 않습니다. 처음 죽순이 만들어질 때의 굵기 그대로 처한 환경에 따라 자랄 수 있는 높이까지 위로만 자랄 뿐입니다. 식물분류학상으로도 벼과(Poaceae)에 속합니다. 바나나와 야자수 또한 나무처럼 생겼지만 같은 이유로 풀로 분류됩니다. 


대나무의 꽃과 열매를 보면 대나무가 벼과의 식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닙니다. 대나무의 구조 또한 다른 나무들과는 다릅니다. 보통의 나무들은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땅 위로는 줄기를 곧게 뻗습니다. 줄기 위에 가지와 잎이 달립니다. 하지만 대나무는 뿌리뿐만 아니라 줄기 또한 땅속에 있습니다. 대나무의 줄기는 땅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기어가듯이 자라며, 일부만이 땅 위로 조금 드러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땅속줄기(Rhizome)라고 부릅니다. 땅 아래에 숨어 있는 땅속줄기에서 죽순이 돋아나고 그 죽순이 자라 대나무의 지상부(地上部)가 됩니다. 땅속줄기에 저장된 풍부한 양분과 잘 발달된 뿌리를 토대로 죽순은 놀랍도록 빠르게 자랍니다. 빽빽한 대나무숲을 가득 채우는 곧은 줄기들은 사실 줄기가 아니라 가지에 가깝습니다. 이 가지들은 땅속줄기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뿌리로 연결된 거대한 사시나무숲 판도(Pando)처럼 대나무 숲 또한 땅속줄기로 연결된 거대한 존재입니다.

대나무숲 근처를 산책하다 만난 대나무의 땅속줄기입니다. 왠지 낯이 익은 모습입니다.

사실 대나무의 땅속줄기는 대나무숲과 관계 없어 보이는 경로를 통해 꽤나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나무 손잡이가 달린 명품 가방, 구찌의 뱀부 1947입니다. 이 손잡이의 재료가 대나무의 땅속줄기입니다. 2차대전 중 재료 부족에 시달리던 구찌는 일본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던 대나무를 이용한 가방을 개발했습니다. 이 가방은 구찌라는 브랜드의 혁신과 우아함을 대표하는 디자인으로서 시대를 초월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습니다. 뱀부 1947은 패션 업계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으며, 다른 명품 브랜드들이 독창적인 소재를 탐구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구상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다시 대나무를 옮겨심기하는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나무를 옮겨심기할 때 가지와 줄기를 거의 온전히 보전한 채로 뿌리의 일부를 흙과 함께 파냅니다. 하지만 대나무을 옮겨심기할 때는 가지만 온전히 보전한 채로 땅속줄기를 토막내 뿌리와 함께 파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대나무를 옮겨심기하는 일이 왜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나무를 잘 옮겨심기하려면 땅속줄기와 뿌리의 구조를 최대한 잘 보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땅속줄기와 뿌리가 옮겨심기한 땅에서 건강하게 활착할 수 있다면 대나무는 그곳에서 새 죽순을 만들고, 새 가지를 뻗을 수 있습니다.

대나무의 땅속줄기를 잘라 옮겨심기하는 것은 보통 나무의 줄기를 잘라 옮겨심기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대나무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숲 전체가 긴밀하게 연결된 군락(群落; colony)입니다. 대나무숲을 구성하는 개체들의 역할 구분은 마치 세균이나 곰팡이의 군락과도 비슷합니다. 대나무숲의 중심부는 충분한 자원을 바탕으로 건강한 죽순을 생산하고, 대나무숲의 변두리는 숲 바깥의 환경으로부터 대나무숲 전체를 지키는 울타리의 역할을 합니다. 자연상태의 대나무숲은 원형에 가까운 군락을 형성합니다. 대나무뿐 아니라 군락을 형성하는 거의 모든 생물들은 중심부의 비율을 높이고, 변두리의 비율을 낮출 수 있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옮겨심기한 대나무가 멋진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나무로 가늘고 긴 울타리를 만들면 옮겨심기하는 과정에서 땅속줄기가 상하는 문제와 별개로 군락의 중심부 비율이 줄어들게 됩니다. 중심부를 잃어버린 군락은 활력을 잃고 쇠퇴하게 됩니다. 

세 가지 유형의 군집 개념도입니다. 세 군집은 모두 30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x5 군집은 중심부가 12칸, 변두리가 18칸입니다. 10x3 군집은 중심부가 8칸, 변두리가 22칸입니다. 15x2 군집은 중심부가 0칸, 변두리가 30칸입니다. 군집이 원형에서 멀어질수록 중심부의 비율이 감소합니다.

나무를 잘 옮겨심기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대나무를 잘 옮겨심기는 더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무리하게 옮겨심기한 비루한 대나무를 보며 마음을 다치지 마세요. 사철 푸른 대나무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다면 따뜻한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보세요. 담양의 죽녹원이 있고, 울산의 태화강 국가정원이 있습니다. 담양이나 울산이 아니더라도 겨울이 따뜻한 남부지방에서 대나무숲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산과 들의 경계에 있는 야트막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나무숲, 그 숲의 바닥에서 기는 줄기를 찾아보세요. 그리고 땅속줄기로 이어진 거대한 대나무숲의 연결성을 느껴보세요.

울산의 태화강 국가정원에는 십리대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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