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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희 작가 | 이름보다 오래 된

 

2024-11-25 김사름 기자


동물권변호사단체 피엔알(PNR)은 지난 2024년 11월 18일부터 23일까지 강남 신논현역 '비타카페'에서 ‘제1회 동물법 컨퍼런스’를 기념하는 '예술작품'과 '도서전'를 개최했다. 총 13종의 '동물권' 관련 도서와 변호사들의 추천사가 전시되었으며 고상우, 정의동, 문선희, 문서인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라니01 73x63cm_c-print_2020
라니01 73x63cm_c-print_2020

문선희 작가는 현대 사회와 역사의 모순을 직시하는 사진작가다. 2015년에 발굴 금지 기간이 해제된 구제역·조류 독감 매몰지 100여 곳을 기록한 연작 <묻다>로 주목받기 시작했다.(2019년 책 출간) 2016년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자신의 언니처럼 초등학생이었던 광주시민 80여명의 기억에 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설치 작업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를 발표했다.(2016년 책 출간) 2019년에는 지난 15년간 고공농성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담아낸 작업 〈거기서 뭐하세요〉를 발표했다.

『이름보다 오래된』의 밑바탕이 된 고라니의 초상 사진 연작 〈널 사랑하지 않아〉는 2013년부터 10년간 진행해 온 작업으로, 2022년에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2021년 제22회 광주신세계미술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이 사회 현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정서적이고 감각적이지만, 그 내부에 파고든 사회 정서적 서사는 그 무엇보다도 신랄하고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3년 제13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은 작가의 “유려한 감성과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사진 문선희작가 인스타그램
사진 문선희작가 인스타그램

구제역 3년 후, 수만 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해 매몰한 땅에 언뜻 보면 꽃처럼 피어난 곰팡이를, 흘러나오는 액체를, 남아있는 동물들의 뼈를, 그 잔인한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기록한 <묻다>,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고라니의 얼굴을 보고 “고라니의 얼굴이 각각 다르다는 점, 그리고 다를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아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 <이름보다 오래된>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건과 존재를 기억할 수 있게 한다. 


전시 작품 외에도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가슴에 품었던 5·18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담아낸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현장을 기록한 <거기서 뭐하세요>등 작가가 전하는 사진과 글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가의 외침은 조용하지만, 그 울림은 보는 이의 마음 한 켠을 오랫동안 차지할 만큼 강하다.

 

공식 홈페이지 https://sunnybymoon.modoo.at

 

이름보다 오래된


어느 날 길 위에서 사슴을 만났다. 


누군가 노루였어? 아니면 고라니?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이름만 익숙할 뿐 서로 어떻게 다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나는 고라니나 노루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그들을 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비를 하나의 단어로 덮어 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200여 마리의 고라니를 만났다. 처음 고라니 초상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길어도 3~4년이면 이 프로젝트를 매듭지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50여 점의 초상사진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운 좋게 기회를 얻어도 야생의 존재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경우에 따라 며칠이 걸리기도 했고,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첫 만남에 극도의 경계심이나 불안감을 표현해 시도조차 못한 경우도 많았고, 몇 달을 기다렸으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아 끝내 촬영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미처 준비되기 전에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어린 고라니들의 초상은 졸업앨범 형식으로 구성했다. 무미건조하고 획일적인 타원형의 틀이 역으로 그들의 고유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가 되어 주었다.


정성을 들여 초상사진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비슷하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다. 모두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로 초대받은 생명들이다. 그 유일무이함에 가슴이 부풀기도, 아리기도 했다.


초상사진 작업을 하는 동안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끝끝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래서 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고라니들조차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사슴이겠지만, 모든 존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가지고 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 고라니는 우리 ‘고유종’이자, ‘희귀동물’이며 치타, 코알라와 같은 등급의 ‘멸종위기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농작물 피해를 근거로 ‘유해 동물’로 지정하고, 해마다 수십만 마리를 사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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