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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 정월, 기후 안녕을 위한 덕담을 나누자

 

먹거리를 생산하지 않는 겨울의 한복판, 정월에는 한 해 내내 말리고 담고 저장해 온 음식들로 밥상을 차린다. 여름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졌지만 풍년을 기약할 수 없는, 기후변화 시대에 '지구의 더위를 사자'는 덕담을 나눠 보자.


박진희 2025-1-23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먹거리가 생산되지 않는, 정월 음식은…


이제 곧 음력 새해가 다가온다. 설날이 오고, 대보름이 온다. 먹어야 하고, 먹고 싶어지는 음식에 대한 생각도 시간을 따라 함께 온다. 양력 2월 초에 입춘이 있어 절기로 따지면 설을 지나면 초봄이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과 얼음, 눈이 내리는 날들이니 정월은 여전히 겨울의 한복판이다. 논과 밭은 추운 기운이 넘실대고, 먹을 것은 생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설과 정월 음식의 기본은 떡국과 술, 저장해 둔 과일, 말려 둔 나물이 된다.

먹거리가 나지 않는 겨울철 밥상에 올리기 위해, 처마 밑에 무청 잎을 말리고 있다. 사진_한국교육방송공사의 “한국기행_영동알프스 시래기”
먹거리가 나지 않는 겨울철 밥상에 올리기 위해, 처마 밑에 무청 잎을 말리고 있다. 사진_한국교육방송공사의 “한국기행_영동알프스 시래기

삶고, 말리고, 담고, 띄우고, 뽑다가 보면 겨울의 한복판이다


농사짓던 시절, 봄이면 산과 들의 고사리와 산나물을 뜯어 삶아 말렸다. 늦여름이 되면 마지막으로 달리는 호박과 가지를 썰어 말렸다. 바로 따지 못해 딱딱해진 옥수수를 말렸다. 가을이면 앞마당에서 대추를 수확해 말렸고, 뒷마당의 감을 따서 홍시가 되게 했다. 겨울이면 수확한 무를 뚝뚝 썰어 무말랭이를 만들고, 무청 잎을 말려 시래기를 만들었다. 배추를 삶고 말려 우거지를 만들었다. 찬 바람 쌩쌩 불면 수확해 둔 녹두로 숙주나물을 만들었다. 콩으로 두부를 만들고, 알뜰하게 비지도 띄웠다. 메주를 만들고, 청국장을 띄웠다. 어떤 때에는 햅쌀을, 어떤 때에는 묵은쌀을 들고 방앗간으로 가서 가래떡을 뽑았다. 장날이면 말려 둔 옥수수와 가래떡으로 뻥튀기를 튀겼다. 고사리를 뜯고 말리다 보면 봄이 지나갔고, 호박과 가지를 썰어 말리고, 옥수수를 널어두면 여름이 지나갔다. 하늘을 보며 대추와 감을 따면 가을이 지나갔다. 무말랭이를 말리고, 시래기와 우거지를 널다 보면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있었다.

호박, 가지를 말리고, 우거지로 국을 끓여 준비한 밥상. 사진_한국교육방송공사의 “한국기행_한식”
호박, 가지를 말리고, 우거지로 국을 끓여 준비한 밥상. 사진_한국교육방송공사의 “한국기행_한식

온 계절을 품고 있는 정월 밥상


제철 음식을 먹고, 나중의 먹을 것을 준비하는 일은 고된 노동의 계절인 농번기에는 힘든 농사일에 수고로움을 얹는 일이 된다. 그러나 그 수고로움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겨울의 빈 들판을 덜 두렵게 하며 진가를 발휘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월 음식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계절을 위해 온 계절이 준비해 온 결과이고, 온 계절과 온 계절 노동의 축적이다. 지금은 시설 농업이 주류화되고 있어 겨울에 생산되는 것이 풍족하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정월 음식은 여전히 온 계절을 품고 있는 밥상이 된다.


다시 한 해의 노동을 준비하는 출발선


우리는 설날과 대보름에 먹는 음식에 여러 의미를 부여한다. 가래떡은 장수를 의미하고, 오곡밥은 풍요를 의미하고, 귀밝이술은 지혜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 모든 의미 부여가 가능한 것은 부지런한 노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월의 음식은 모든 계절을 이어온 연결선이며, 숭고한 노동이 축적된 경건한 밥상이다. 다시 한해를 준비하게 하는 출발선이다. 새해의 안녕과 풍요를 바랄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여름이 길고 겨울이 짧아도 풍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월을 맞이하는 농민들은 올해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25년 농업전망’에 따르면 2025년 농업 분야 10대 이슈 중 기후위기 관련 이슈는 3개로 기후위기 시대 식량안보, 기후위기 시대 물가 대응, 탄소배출 감축 노력이 포함되었다. 농민들은 기후변화 확대로 폭염과 이상 기온이 심해지고, 생산량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소비자들도 기후위기가 물가상승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우리나라 109년(1912~2020) 기후변화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나라의 여름일수는 20일이 늘어났고, 겨울일 수는 22일이 줄어들었다. 강수일수는 감소하였으나, 강우 강도는 증가했다. 여름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진다고 해서, 풍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지구의 더위를 사들이자


정월, 온 계절을 담은 식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날을 막으려면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려는 전 지구적 노력이 필요하다. 떡국을 먹으며, 서로에 대한 덕담과 더불어 기후 안녕을 위한 덕담을 나누자. 대보름 부럼을 먹으며, 내 더위를 파는 대신 지구의 더위를 사들이자. 그래야 10년 뒤, 100년 뒤 온 계절을 품은 정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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