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플라스틱 국제 협약’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김용만 대표 편집인
플라스틱은 신비하다. 편리하고 내구성도 강하고 게다가 저렴하다. 이렇게 특별한 물질을 만난 후 인류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싸고 효율이 높은 에너지원인 화석연료 덕분이다. 플라스틱은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에서 추출한 화합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고분자 물질이다. 수많은 화학 물질이 뒤섞인 조합이며, 자연 재료의 한계를 극복한 과학의 총아다. 대중화된 지 겨우 50년이 넘었는데, 플라스틱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플라스틱과 이별할 때가 되었다. 우리의 지속가능한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때문이다.
신비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던 플라스틱이 위험한 존재가 된 건 인류가 너무 많이 사용하는 탓이다. 일상생활에 플라스틱이 아닌 게 없다. 심지어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대부분 플라스틱이다. 이렇다 보니 썩지 않아서 좋았는데 이제는 썩지 않아서 문제다. 썩지 않은 상태로 잘게 쪼개진 ‘미세 플라스틱’은 인간과 동물의 몸에 부지불식간에 침투한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미세 플라스틱 보균자라고 보면 된다. 화학 물질이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의사가 아니라도 상식을 통해 알 수 있다.
전 세계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19년에 4억6000만톤이다. 2000년 2억3400만톤에서 2배 늘었다. 2019년 한 해 3억6000만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발생했고, 이중 재활용된 건 9%에 불과하다. 나머지 90% 이상이 버려지거나 매립 또는 소각 처리되어 토양과 대기를 오염시켰다.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폐기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전체 배출량의 3.6%인 18억톤(2020년 기준)에 이른다. 유엔 보고서들에서 예측하고 있는 수치들은 암울하다. 지금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말이다.
하여 국제사회는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목표로 법적 구속력을 갖춘 국제협약을 추진 중이다. 2022년 3월 제5차 유엔환경총회 2차 회의에서 175개국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안이 그 근거다. 만장일치 결의안이 나오기까지는 숙성의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유엔환경총회에서는 해양오염의 주범인 폐플라스틱과 미세 플라스틱 문제에 대해 논의해 왔다. 그러다 2022년엔 플라스틱 오염 자체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절차는 2024년까지 다섯 차례의 ‘정부간협상위원회’를 거쳐 2025년 중순 ‘전권외교회의’에서 확정된다. 지금까지 네 차례의 협상위원회가 있었고 올해 11월 25일 부산에서 마지막 협상위원회가 열린다. 즉 부산 회의에서 최종안이 나와야 내년 국제협약이 정식 비준될 수 있다.
최종 협약에 이르기까지 2년이 넘게 다섯 차례의 협상 자리가 필요하다는 건 그 만큼 쟁점이 첨예하고 복잡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번 플라스틱 국제협약 협상에는 그동안 진행되어 온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기후변화협약의 한계와 쟁점이 그대로 녹아 있다. 부산 회의에서 협상을 타결하고 예정대로 내년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협약이 출범한다면, 지구 차원의 기후변화 대응에 기념비적인 일보 진전이 될 것이다.
가장 큰 쟁점은 해결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크게 ‘생산 감축’과 ‘재활용 우선’으로 나뉜다. 이에 따라 법적 구속력 여부, 목표 연도 명시 여부, 재원 조달 방법 등 세부 쟁점들이 줄지어 있다. EU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우호국 연합(HAC)’은 생산 감축, 법적 구속력과 목표 연도 명시, 세계은행(WB) 같은 기존 기구를 통한 재원 조달을 주장한다. 한편 러시아, 중국, 인도, 브라질,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하는 ‘플라스틱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은 재활용 우선, 자발적 목표, 새로운 재정기구 설립과 오염 부담금 신설을 주장한다.
글로벌 석유기업들은 ‘GCPS’와 입장을 같이 한다. 플라스틱의 99%가 석유에서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석유기업들이 ‘GCPS’편을 든다고 해서 마냥 ‘GCPS’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HAC’에는 플라스틱 제조 시설을 해외로 옮겼거나 아예 제조 여력이 없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생산 감축을 해도 잃을 게 적다. 수입을 줄이면 된다. 반면, ‘GCPS’ 국가들은 석유화학이 주요 기반 산업이다. 잃을 게 많다. 수출을 못하면 타격이 크다. 합리적으로 협상이 진행되려면 상대적으로 손실이 큰 쪽에 대한 실질적인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평행만 달리다 최종 협상안을 만들지 못할 공산이 크다. 쟁점 대립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라고 단순화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론 ‘HAC’에 속해 있다. 그런데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로는 선진국 대열에 있지만 석유화학 산업이 여전히 국가 경제에 주요 비중을 차지하기에 어정쩡한 모습을 보인다. ‘HAC’와 ‘GCPS’ 측 이해관계를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치는 평행선에 있는 양측을 조율하고 방향을 제시하기에 유리하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타당한 협상안을 도출할 수 있는 최적의 국가일지 모르겠다. 우연하게도 협약으로 가는 마지막 협상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리니 말이다.
기후변화 대응은 몇몇 국가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날씨와는 달리 기후는 지역 단위가 아니라 지구 시스템에 의해 조절된다. 지구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고 국제사회의 긴밀한 연대가 필수다. 그런데 개별 국가들은 처한 상황이 저마다 다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기후변화협약이 더디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를 극복하는 실질적인 국제연대가 구축되려면 이 차이를 인정하고 고려하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번 부산 협상위원회에서 인류의 합리성이 발휘되는 현명한 협상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그 길을 밝히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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