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기후 리터러시로 무장한 시민들의 자각에서 나온다
김용만 대표 편집인
역사를 추진하는 동력은 항상 ‘대중의 각성’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잠들어 있으면 역사는 뒤로 밀리곤 했다. 그래서 역사는 권력을 쥔 집단이 아니라 ‘민초’들이 주인공인 ‘다큐드라마’다. 본분을 잊고 스스로 대통령이기를 거부하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2024년 12월 14일 여의도 국회 앞 무대의 주역은 깨어 있는 민초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같으면 자신들이 동경하는 스타를 향해 흔들 응원봉을 들고 나온 젊은 팬들이고, 1987년 거리를 누볐던 중년들이다.
대한민국은 국가 존망을 다투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와중이다. 내란을 준비한 자들이 작성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다. 이번 혼란을 타개하는 데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 절차와 정당정치가 살아 있을 때,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성향도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조갑제와 정규재도 한 목소리로 내란 준동을 성토하고 민주적 질서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란 상황을 종료하고 ‘전화위복’이 되어 한번 더 도약하는 기회로 삼을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도처에 잔불이 있고 마지막 불까지 진화하지 않고서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공들인 탑이 무너지듯 자칫하면 몇십 년 뒤로 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를 모으고 젖 먹던 힘까지 써야 할 때다. 그렇다고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아니다. 인생은 ‘고해’다. 인류가 지구를 향해해 온 악행의 대가인 ‘기후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후 이상 변화는 개별 국가 영역을 벗어난 지구 전체의 문제다. 몇몇 나라가 움직여서 될 게 아니다. 그만큼 해결하기가 복잡하고 어렵다. 기후위기 대응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모든 종(種)은 멸종한다.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듯이 영원히 존속하는 종 또한 없다. 천수를 다하는 게 순리이듯 우리 종도 천수를 다하는 게 맞다. 성급한 멸종은 억울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기후 이상 변화는 직관적이지 않다. 사람이 바로 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긴밀하게 대응 할 텐데 말이다. 기후변화는 대부분 이성으로 인지하여 이해해야 한다. 교육과 홍보를 통한 ‘기후 리터러시’가 절실한 이유다. 대중의 기후 리터러시를 위한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후 이상이 피부에 와 닿는다는 건 우리가 손쓸 수 없는 상황임을 의미한다.
언론의 종류와 형태가 아무리 다양해져도 그 역할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주요 쟁점을 수면 위로 올려서 공론의 장을 만든다. 보도와 토의는 시민들이 문제의식을 갖는 토대가 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사안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각성의 힘이 모아지면 당면 문제는 해결되고 세상은 그만큼 변화한다. 절체절명의 기후위기라는 파고를 넘어서는 길은 기후 리터러시에 달렸다. 기후 리터러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 ‘기후 언론’에 달렸다.
기후 언론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면 우선 기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날씨는 감각에 밀착되어 있지만 기후는 감각에서 떨어져 있다. 현장에서 기후 주제를 다루는 기자들에게는 일반상식과 경험 이외 덧붙여 다른 자질이 요구된다. 기후, 생태, 환경, 에너지 등 관련 분야 전문 지식과 이를 엮어서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기자들에게도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다. ‘기후 언론 학교’가 절실한 이유다.
현재 기후, 환경 전문기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건 해외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해외에서는 최근 들어 관련 전문기자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들이 가시화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구체적인 걸음을 떼어야 할 때다. 대규모 왜란을 대비해서 율곡 선생은 ‘십만 양병’을 주장했다고 한다. 지구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기후 이상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는 기자가 ‘양병’이다. 전대미문의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기후 리터러시로 무장한 대중들의 자각에서 나온다. 먼저 무장한 양병들이 필요하다.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 있다. 할 일이 많은데 시국이 시끄럽다. 하루빨리 안정되길 바란다. 세계 도처에서 비이성적인 사건과 인물이 발호하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는다. 막히면 뚫거나 돌아가서라도 이성을 찾아왔던 게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의 역사도 그랬다. 정상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밀린 숙제들을 하게 될 것이다. 나라가 백성을 버려도 백성은 나라를 버리지 않는다.
지난 달 24일 개봉한 영화 ‘하얼빈’을 봤다. 과장 없는 메시지와 깔끔한 구성, 간만에 보는 우수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관객 수가 382만명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적다. 나라가 어수선해서 영화관을 찾을 경황이 없겠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했다. 영화가 끝나고 머리와 가슴에 파고드는 한 마디. “어떻게 지켜낸 나라인데, 감히.”
잘읽었습니다, 내용에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