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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포럼 | 김우성 | 씨앗으로 만드는 숲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2024. 06. 20


하나의 작은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운 뒤, 오랜 시간을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누구나 아는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씨앗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다릅니다. 많은 씨앗들은 싹을 틔워 보지 못하고 동물이나 미생물의 먹이가 됩니다. 싹을 틔우더라도 대부분은 빛이나 물이 모자라서, 치열한 경쟁 속에 도태되거나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어 사라집니다. 드물게 병에 걸리거나 가뭄과 홍수, 산불과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에 의해 큰 나무가 되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시련을 이겨 내며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낼 수 있어야 하고, 셀 수 없이 많은 행운이 있어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작은 씨앗은 큰 나무가 되고, 큰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됩니다.  

숲의 하늘을 떠받치는 큰 나무도 하나의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제 딸이 저의 모든 것이듯, 씨앗은 식물의 모든 것입니다. 현 세대의 소중한 유전정보와 모든 가능성을 소중하게 담은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게 될 다음 주자입니다. 식물들은 씨앗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생존에 적합한 곳까지 가 닿을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작고 멀리까지 날아가는 씨앗도 있고, 장미과(科, family)의 다양한 열매처럼 동물에 먹혀 멀리까지 퍼지는 씨앗도 있습니다. 고추속(屬, genus) 식물 중 일부는 포유류가 먹으면 고통스럽고, 조류가 먹으면 아무렇지 않은 캡사이신이라는 물질을 씨앗에 넣음으로써 종자를 퍼트리는 종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포유류가 먹지 말라고 만든, 캡사이신을 너무도 사랑한 인간이라는 포유류에 의해 고추속 식물은 전 세계로 퍼지는 데 성공합니다.) 사막에는 땅 속에 묻힌 채 건조한 기후를 오래 견디며 몇 년이고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씨앗들도 있습니다.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 온 각자의 전략은 변화하는 생태계 속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또한 실패하기도 합니다. 씨앗들의 성공과 실패에 따라 숲을 구성하는 나무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식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씨앗을 퍼트립니다.

숲의 바닥에서는 모든 종류의 씨앗이 동시에 땅에 떨어져 큰 나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씨앗들은 경쟁이 적은 빈 땅에 먼저 도착해서 싹을 틔우고, 다른 씨앗들은 늦게 싹을 틔우더라도 경쟁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큰 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이 또한 전략의 일부입니다. 식물이 살기 어려운 암석지대 같은 곳에는 씨앗을 뿌릴 필요도 없는 지의류나 선태식물이 먼저 자리 잡습니다. 아주 적은 양의 토양이 있다면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웁니다. 얕은 토양이 만들어졌다면 키 작은 관목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이후에는 뜨겁고 메마른 땅을 견딜 수 있는 소나무나 진달래와 같은 종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나무들이 자라면서 숲의 바닥은 점점 어둡고 축축해지고, 양분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간간히 보이던 곤충들 외에 새와 포유류들이 늘어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늘에서도 자랄 수 있는 참나무류와 단풍나무류를 비롯한 활엽수들이 자라 먼저 자리를 잡은 소나무류와 경쟁하게 됩니다. 어린 소나무들은 밝고 건조한 땅에서는 잘 견뎠지만, 그늘진 숲의 바닥에서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줍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졸참나무나 서어나무류가 더 짙은 그늘을 견뎌 내고 자라 숲의 주인이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친 숲의 변화를 천이(遷移, succession)라고 합니다. 씨앗들이 퍼지고, 싹을 틔우고,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는 방식에 따라 숲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어둡고 축축한 숲의 바닥에서 가문비나무와 거제수 나무의 씨앗이 싹을 틔웁니다.

소나무의 씨앗들은 이제 영영 기회를 잃어버린 것일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태계는 무심하고 또한 역동적인 변화를 반복합니다. 산불로 숲이 만든 그늘과 축축하고 두꺼운 낙엽이 모두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다시 뜨겁고 건조해진 숲의 바닥은 풀과 관목, 소나무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됩니다. 북미에서 자라는 방크스소나무는 산불이 발생한 후 뜨거운 열에 의해 솔방울이 열리면서 씨앗을 퍼뜨립니다. 산불이 나지 않는 해의 방크스소나무는 솔방울이 열리지 않고, 씨앗도 퍼뜨리지 않습니다. 씨앗을 퍼뜨려도 그늘에서는 살 수 없으니 산불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방크스소나무 씨앗의 전략입니다. 자연에는 스스로 불을 내는 식물도 있고,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불을 키우는 새도 있습니다. 산불은 누군가에게는 재난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방크스소나무의 솔방울을 불로 가열하면 송진이 녹으면서 씨앗이 밖으로 나옵니다.

끝 없이 펼쳐진 숲은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작은 씨앗은 끝 없이 펼쳐진 숲에서 만들어집니다. 자연은 그렇게 순환합니다. 숲의 바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씨앗들이 다양한 형태로 숨어있습니다. 씨앗 안에는 풀과 나무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각각의 씨앗이 적당한 때를 기다려 싹을 틔우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 내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다시 씨앗을 맺을 수 있기를, 그 과정에 필요한 만큼의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행운이 모자라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큰 나무가 되기 전에 미성숙한 개체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더라도 그 삶 또한 생태계 안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개체의 삶이 마무리 된 후 미생물에 의해 아주 작은 분자 수준까지 나뉘어 숲의 거대한 순환 안에서 돌고 돌며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다른 모습의 씨앗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울식물원에서 만난 씨앗 전시입니다. 씨앗은 많은 의미를 담고있고, 누군가에게는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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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Park
F Park
Jun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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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은 글!!!

글을 읽다 보니 빅토르 위고가 떠오르네요.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 - <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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