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2024. 05. 24
우리는 창밖으로 초록색 풍경을 봅니다. 소파에 앉아 거실 창밖으로, 혹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초록색 숲을 봅니다. 문을 나서면 정원과 가로수를 만나고 조금 더 걸으면 공원과 도시숲을 만납니다. 조금 더 멀리 나가면 교외의 큰 숲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60% 이상은 초록 숲입니다. 우리는 가까이서든 멀리서든 초록색 숲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초록색 숲 가까이 살게 되었을까요? 조선 시대의 숲은 지금보다 더 울창했을까요? 사실 우리가 지금처럼 초록의 숲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우리는 울창한 숲보다 황폐한 숲 가까이에서 산 역사가 훨씬 깁니다. 1910년대 서울 동숭동 대학로 일대의 사진을 보면 산에 나무가 거의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경북 김천시 조마면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1950년대 부산 인근의 숲에도 나무가 없습니다.
왜 산에 나무가 없을까요? 땔감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집의 터를 정할 때 배산임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물과 가까워야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농사도 짓고, 나아가 교통로로 쓰거나 물고기도 잡는 등 생활 전반에 이용할 수 있었을 테니 임수의 중요성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배산은 왜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가혹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북서계절풍을 막아줄 수 있는 지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겨울 뿐 아니라 여름에도 매일 산에서 연료를 얻어야 했습니다. 매일 산에서 땔감을 가져와야 요리와 난방을 위한 열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산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고, 그 결과 산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황폐해졌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국토 면적의 60%가 넘는 산림이 민둥산에 가까웠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비가 내리면 흙탕물이 흘러내려와 하천 바닥에 쌓이면서 하천이 얕아지고, 자주 홍수가 발생해 농사가 망하고,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우리는 황폐한 숲을 초록 숲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산림청을 설립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숲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민둥산에 나무를 심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흙과 양분은 빗물에 모두 쓸려 내려간 상태였고, 토양은 딱딱하고 암반이 노출되어 있어 도저히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깨에 삽과 곡괭이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 땅을 파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지형을 만들어야 했거든요. 사람의 손으로 산을 깎아 계단과 같은 구조를 만들고, 나무를 심을 자리를 파서, 그 자리에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흙을 지게로 지고 와서 채워 넣었습니다. 소중한 묘목을 가져와 심고, 물도 항아리에 이고 지고 산을 올라가 묘목이 말라 죽지 않도록 관리했습니다. 비료를 주고, 풀을 베는 등 사후 관리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담긴, 국가 단위의 노동력을 동원해 만든 것이 지금의 우리 숲입니다.
우리가 숲을 복원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확고한 정책적 방향성과 국민의 참여와 희생이 주요했습니다. 더불어, 운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연료 체계가 바뀌었습니다. 나무를 쓰던 아궁이가 연탄 아궁이로 바뀌었습니다. 연탄은 나무에 비해 같은 무게에서 발생되는 열의 양이 더 많고, 또한 열이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더 좋은 연료를 가지게 되면서 우리는 나무 대신 연탄을 기반으로 한 난방과 취사 시스템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심은 어린 나무들이 살아남아 50년 뒤 우리가 보고 있는 숲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숲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숲을 복원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있었고,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고된 노동이 있었습니다. 많은 예산이 투입됐고,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나무를 심던 시절의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우리는 그 혜택을 가까이서 누립니다. 사람들은 숲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숲을 지키고 복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