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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우치 트리엔날레에 가자 ⑤ 해안개발로 환경과 자원을 잃은 바다

 

세토나이카이는 연안습지 파괴, 바다 매립과 간척, 그리고 즐비하게 들어선 중공업 공장의 오폐수로 인해, 극심한 적조 현상을 겪었고 어획량도 급격하게 줄었는데, 1973년 세토나이카이 보호 관련 법이 적용 이후 매립이 완화되고 바다는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풍성하지는 않고 있다.


2024-12-05 제종길, 고은정, 이응철


제종길 13대 안산시장, 17대 국회의원, 해양학 박사

고은정 전 수원시 디자인기획관, 도시공학박사

이응철 전 일본 국립사가대학교 교수, 농학박사·보건학 박사

 

연안습지 파괴, 얕은 바다 매립이 해양오염의 원인


전편에서는 문장을 서술할 때 주로 과거형을 썼다. 세토나이카이가 이젠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바다가 더는 아닐 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이번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람 살기 좋고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세토우치의 해안지역은 정부가 1950년대 후반부터 과도하게 개발하려고 연안습지를 파괴하고 얕은 바다를 매립·간척하면서 해양오염의 원인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엇이라도 다 품어줄 것 같았던 앞바다가 이상 신호를 내기 시작했다. 예술제가 열리는 섬 중에 환경문제로 널리 알려졌던 나오시마와 이누지마, 테시마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다의 오염은 현에 따라 상황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그 피해는 전체 바다가 함께 입었다. 예술제가 열렸던 12개 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중 한 섬인 샤미지마(沙弥島)는 이젠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이 작은 섬은 원래 시코쿠 해안에 있었으나 1967년에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10년 후, 섬은 길이가 9.4㎞ 다리인 세토오하시(瀬戸大橋)의 시코쿠 쪽 종점이 되었다.

작품 번호 in07B인 이누지마 세이렌쇼 미술관(Inujima Seirensho Art Museum)으로, 야키노리 야나기(柳幸典)가 아트를, 히로시 삼부이찌( 三分一博志)가 건축을 맡아 공동으로 작업했다. 이누지마 섬에 남아 있는 구리 제련소 유적을 보존 및 재현한 박물관으로 여러 독특한 작품들을 갖고 있다. 이곳은 화강암 채굴과 구리 제련을 했는데, 제련소가 활발했던 1909년~1919년에 섬이 크게 발전해서 한때 3000명 이상의 많은 주민들이 살았으나, 2017년에는 47명 그리고 현재는 35명만 살고 있을 정도로 극적인 인구 감소가 일어났던 섬이다. 사진_제종길

중공업 집중으로 해양오염 발생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세토나이카이는 대양과 해협으로 열려있는 바다이나 통로는 좁고 수심이 낮은 내만의 특성을 가진 반 폐쇄성 바다다. 이러한 지형 구조로 되어 있어 안정된 바다이긴 하나 오염이 발생하면 바로 외부로 흘러나가거나 희석되지 않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 기후가 좋은 세토우치 연안들은 다 얕은 습지였으니 해안개발 처지에서 보면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 발전기에 해안개발의 박차가 가해졌고, 1950년대 이래로 철강, 석유화학, 조선 등 중공업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해안지역이 산업과 도시 입지와 항만 건설용으로 매립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세토우치 해안지역이 했었다. 오늘날에도 국내 제품 중 일반적인 점유율은 46%이고, 철강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의 35%, 펄프제지 산업의 30%가 이곳 해안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중반에서부터 1970년대 중반에 오염이 발생하고 해양환경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오카야마현의 우노항 인근에 조선소가 보인다. 이렇게 해안을 따라 산업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_제종길

죽음의 바다로 바뀌다


1898년부터 2005년까지 총매립 면적은 약 455㎢에 달했다. 내해에서 가장 큰 섬인 아와지시마(淡路島) 면적의 약 70%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이 대규모의 면적은 수심 10m 미만의 얕은 바다의 약 20%가 매립됐었음을 의미하며 그 대부분(77.8%)이 전후에 매립되었다. 간척과 매립의 결과 자연 해안선이 심하게 축소되었다. 고대부터 세토나이카이의 얕은 바다에서 주민들은 자연 해안을 농경지나 염전으로 만들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도시 지역 확장으로 산업 부지를 자연환경보다 우선시하여 점차 자연 해안선이 줄어들어 현재 37%만 남아 있다. 매립으로 인해 잘피밭과 해조밭 그리고 여러 해양 생물 서식지가 사라졌다.

일본 환경성의 자료로 세토나이카이의 매립(또는 간척) 면적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 막대그래프는 매년 일어난 매립 상황인데, 세로 선을 기준으로 왼편은 1973년 '세토나이카이 환경 보전을 위한 임시 조치에 관한 법률' 적용 이전이고 오른 편은 적용 이후이다. 선그래프는 연도별 매립 면적의 누적량을 나타낸다.

또 적조가 매우 자주 발생했는데, 그로 인한 산소고갈로 많은 어패류, 일부 양식 어류들은 전멸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 바다가 일본에서 적조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수질이 심각하게 오염되었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성장과 발전의 대가로 이 풍요로웠던 바다가 희생되었다. 한국에서 과거 적조 때문에 오랫동안 해양오염의 대명사가 되었던 진해만처럼 내해도 ‘죽음의 바다’로 불렸다.

작품 번호 og18의 ‘오기지마 파비리온(Ogijima Pavilion)’이다. 건축물은 유리창에 신사 참배길과 함께 바다와 직접 연결된 듯 보이게 종이로 바다 풍경과 해양동물들을 표현했다. 문어를 비롯한 문어단지 그리고 파도와 등대로 풍요로웠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기원을 담고 있다. 건축물은 브라질의 오스카 오이와(Oscar Oiwa)와 일본의 시게루 반(坂 茂) 작가의 협업 작품이다. 사진_제종길

적조로 해산물 피해 극심


수질의 악화로 깨끗한 모래 해변과 습지가 감소하여 지역 주민들이 자연과 접촉할 기회, 예를 들어 가족과 함께 해변을 방문하여 수영, 일광욕, 조개 캐기 등등을 할 기회를 줄어들게 했다. 예전에는 바다에서 하는 활동은 세토나이카이 주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일부였으나 매립지에 공장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바다로 나가는 길을 막았다. 해저에서는 모래를 채굴하고, 바다에 폐기물을 투기하는 쓰레기 문제, 여러 공장에서 화학적으로 해로운 물질 등을 바다에 배출하는 행위로 수많은 우려 사항들이 있었다. 다 수질을 악화시키고 생태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수질의 문제로 인해 생긴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적조였다.

이치로 이마이(今井一郎) 등의 논문(2021)에 따르면 적조는 1976년(연 299회)에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는 세토나이카이에서는 적조가 빈발했다. 적조는 대부분 여름철에 발생하는데 수산업에 큰 피해를 줬다. 적조로 인해 폐사한 양식산 방어의 수가 1420만 개체로 가장 많았던 해는 1972년이었는데 이때 피해액은 자그마치 대략 7000억원(1엔을 10원으로 환산)에 달했다. 한편 1987년 8월엔 135만 마리가 죽어서 약 1600억원 정도의 피해를 줬다. 이후 법적 규제는 수질을 개선해 세토나이카이의 적조 발생률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 이후로 적조 횟수는 연간 100회 이내로 감소했고, 2015년부터는 더욱 감소세를 유지해 2019년에는 58건만 기록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오염은 적조뿐만이 아니었고 어획량이 준 수산물은 방어만이 아니었다. 멸치, 굴, 문어 등 주요 수산물의 어획량은 급격히 감소했고, 어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다카미지마에 설치된, '카야코 나카시마(中島伽耶子)'의 2016년 작품 ta02로 '시간이 흘러가는 집(時のふる家)'이다. 빛이 아크릴 투명판을 통해서 들어와 내부를 비추는데, 이 역시 과거를 대비하며 현재의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사진_제종길

세토나이카이의 해양환경 보전에 나서다


1965년부터 1975년 사이에 세토나이카이에서 수질오염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여러 해안에서 발생해, 바다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1973년에야 지역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세토나이카이 환경 보전을 위한 임시 조치에 관한 법률(瀬戸内海環境保全臨時措置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이 제정된 이후에 연안 매립과 간척 면적이 크게 줄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이 법은 ‘세토나이카이 환경 보전을 위한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일명 세토나이카이호, 瀬戸内海法)’로 영구화되었다. 이 법에서는 부영양화에 따른 적조 발생 대처 방안이 담긴 새로운 조항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어민들은 잘피밭의 소멸로 인해 어족자원이 감소한 것으로 판단하여 잘피 서식지 복원을 요청했다. 이후 굴 껍데기를 뿌려 바닥 퇴적물을 개선하는 기술을 개발해 잘피밭 복원에 성공했고, 그 면적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깨끗한 바다’는 되었으나 아직 ‘풍성한 바다’는


지난 2013년은 ‘세토나이카이호’ 제정 4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그리고 2014년에는 ‘세토나이카이 국립공원이 지정 80주년이었다. 더 나아가 특히 2015년은 세토나이카이를 위한 중요한 방향 전환이 있었다. 2015년 2월 말에 중앙정부의 ‘세토나이카이의 환경 보전을 위한 기본 프로그램(Basic Program for the Conservation of the Environment of the Seto Inland Sea)’ 전부 개정안이 내각의 승인을 받았다. 추가로 9월 말에 ‘세토나이카이호’ 개정안이 위의 주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통과되었다. 법과 기본 프로그램의 견줄 수 없는 조합이 세토나이카이를 위한 관리에 대대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시스템 변경의 목표는, ‘깨끗한 바다’를 달성해 ‘풍성한 바다’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깨끗한 바다'를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위 프로그램 집행 이전인 2008년에 ‘국제 EMECS 센터(International EMECS Center)’는 “지금까지 천연 해변, 잘피밭과 갯벌 면적이 감소했고 어획량도 또한 줄어들어 예전의 풍요로움은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이후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우리는 이 말에 여전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로운 혼지마(本島) 포구의 전경이다. 하지만 항구의 활발함은 엿보이지 않는다. 사진_제종길

바다의 복권, 우리 DNA를 탐구하는 여정


2000년 이후 에치고-쯔마리 아트 트리엔날레(Echigo-Tsumari Art Triennale) 총감독이자 예술제의 총감독이기도 한, 프람 키타가와(Fram Kitagawa)는 예술제 블로그 ‘아트 세토우치(Art Setouchi)’에 주제인 ‘바다의 복권(Restoration of the Sea)’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우리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호기심을 갖고 지구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먼 해안에 무사히 도착한 사람들은 간단한 집을 짓고 가져온 씨앗을 심었습니다. 우리의 조상은 모두 선원, 어부, 농부, 목수였습니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의 여정은 우리 자신의 DNA를 탐구하는 여정입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바다의 복권’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제삼자의 시각으로 예술제는 주최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세토나이카이와 세토우치에 사는 어민들이 처한 힘든 현실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댓글 3개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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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Dec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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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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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Dec 06, 2024
Rated 5 out of 5 stars.

바다를 담은, 바다를 닮은 작품들이 너무 멋집니다! 바다를 마주하면 너무나도 평온해집니다. 평온을 주는 바다의 복원, 복권이 우리 유전자 속에 바람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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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Dec 06, 2024
Rated 5 out of 5 stars.

한번 훼손된 자연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체감하게 되는 만큼, 지금 있는 자연과 자원이 당연한 것이라거나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더욱 노력해서 보전해야 함을 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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