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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파머 |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기후위기를 마주하는 지혜와 가르침①

 

2024-10-11


배이슬 /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교육의 본질인 자립의 시작은 ‘농’으로부터, 농업의 구조적 문제는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름이 가지는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곧 우리 사회와 삶을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고민으로 실천하려 애쓰며 살아가는 농민입니다.




 

기후위기는 이미 와 있었다


2020년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미쳤네”였다. 할머니와 농사를 지은 지 8년쯤 되다 보니 제법 제때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때를 가늠하는 할머니만의 지혜를 단편적으로나마 꽤 체득했었기에 당시의 혼란은 난관이자 허무함이기도 했다.

‘당산 뒤로 구름이 들어가면 비가 오는 거여, 저짝 산에 산벚이 피기 시작하니까 볍씨를 얼른 담궈야 해’처럼 할머니는 책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정보가 아니라 팔십 평생, 아니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집 논밭을 중심으로 미기후를 읽어 내고 그에 맞게 농사의 때와 할 일을 알아차렸다.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이든농장의 논과 밭. 사진_이든농장

‘오동지, 정칠월이라고 하는 게 서로 맞잡이야’ 겨울을 나면서 할머니는 내년에 5월은 비가 많을지, 7월에 비가 많을지를 가지고 논에 물 대는 일을 서두르거나 콩 심는 일을 미루는 것을 이미 가늠했다. 그런데 2020년에는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어떨 때는 아주 크게 어긋났다.


‘시한에 상추가 뜯어먹히기는 처음이네, 미쳤네! 미쳤어. 벌레가 미쳤어.’

‘영동할매 바람이 뭔 못자리때까지 부냐. 미쳤네.’

‘아이가?! 산벚 피는데 조팝도 피고 이게 뭔 일이랴. 날씨가 미쳤네.’


할머니로부터 이어 온, 담배상추. 사진_이든농장

그해에는 마을 할머니들이 둘러앉았다 하면, '미쳤네, 미쳤네'를 외치실 만큼 전에 없는 일들이 많았다. 가을 녘에 하우스 한쪽에 할머니 시집오기 전부터 심었다던 담배상추 씨앗을 자연스레 흩어 뿌려 심어 놓으면 겨우내 단단히 자란 상추를 겨울 끝부터 부지런히 먹었는데, 눈 많고 춥기로 유명한 진안의 겨울이 춥지 않아서 하우스 안에서 벌레들이 살아남아 상추를 남김없이 먹어버렸다.

그뿐이랴 산벚 피면 못자리하는 때, 조팝나무 피면 모내기하는 때라고 꽃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두 꽃이 한때에 피니 그 역시 영문 모를 일이었다. 큰비가 내려도 잠긴 적 없는 산 밑에 밭 하나가 온통 물에 잠기는 일도 있었고, 가늠 안 되는 하 수상한 때라며 부러 올콩, 늦콩 고루 나누어 심었는데 올콩은 가물어 나다 말고, 늦콩은 물에 잠겨 나다 말기도 했다.




2020년 비로 잠겼던 숲밭 . 사진_이든농장

겨우 제법 철 좀 들었다 으쓱하던 8년 차 농부에게 얼마나 큰 시련이었는지 누가 알까. 할머니도 헷갈려 하는 통에 다들 때를 더듬어 찾느라 힘든 시기였다. 누구는 아직은 기후위기가 온 게 아니라고 하고 누구는 돌이킬 수 없다고도 하지만, 차곡차곡 쌓여온 기후위기는 이미 2020년도부터 직접 삶의 문턱을 두드리고 있었다.

2024년 여느 때처럼 배추를 심던 시기에 심었던 농부의 배추도, 재래종으로 늦되게 심은 농부의 배추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분명 배추가 있던 자리인데 벌레가 먹어 앙상한 뼈대조차 없이 배추는 말 그대로 실종되었다. 추석 때까지 계속된 더위에 마르고, 때려 붓듯이 내린 비에 외려 뿌리가 썩어 마저 마르고 썩어 없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배추들은 계속되는 더위 덕에 왕성해진 벌레들은 억세진 풀 대신 보드랍고 다디단 배추, 한없이 약해진 배추를 신나게 먹었다.

농약이나 비료를 하지 않으니 할머니는 100포기 먹을라치면 1000포기는 심으셨다. 그런데 2024년에는 1000포기를 심었어도 20포기나 건질까 싶은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추석 때까지만 해도 괜찮으려니 했는데 마을 이곳저곳 논들에 점박이 무늬가 생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100포기를 먹을라치면 1000포기를 심었다. 사진_이든농장

올해 벼농사를 줄여 두 필지만 심었고 내심 오래 건강하게 흙을 키운 터라 괜찮은가보다 했더니 여지없이 한 필지에 작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면 혹시나 했던 벼멸구는 더운 날 이미 예년보다 많은 알을 낳았고 그 유충들은 조금씩 꾸준히 벼를 먹어가고 있던 것이다. 전국에 벼멸구에 의한 벼 피해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렇게 배춧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쌀값은 덕분에 안정될 거라는 이상한 이야기가 나누어졌다. 청 벌레도 벼멸구도 억하심정을 갖고 농부님들 속 썩이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든 기후위기가 드러나고 있는 것일 뿐. 끊임없이 지속 불가능한 형태로 먹고사는 꼴을 유지해 오는 우리에게 이미 예견된 일들이었다. 우리는 대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기후위기, 답도 이미 있었다


기후위기로 점점 더워지니 조만간 사과도 굴도 안 날 거라고 한다. 농업 관련 이슈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아열대 작물을 심거나 논에 물떼기를 해서 탄소가 덜 나오는 탄소 농법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기후위기는 계속 더워지는 게 아니라 날씨의 흐름이 패턴화된 기후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알 수 없게 되는 형태다. 진안읍은 천둥과 번개에 비가 휘몰아치는데 부귀면에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일, 안천면에 어느 마을들에는 우박이 오는데 마령면에는 해가 나는 일, 단시간에 쏟아부은 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지형을 바꾸고 있다.

기후위기에 어떻게 먹고살까 그 대안을 모색한다며, 지구온난화로 평균기온이 오르니 따뜻한 데서 자라던 거 심자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경제적 수익성이 잠시 보장될지언정 우리의 삶은 지속할 수 없다. 그러니 기후위기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 알고 어떻게 먹고살지를 더듬어야 하는 때다.

신기한 건 2020년에 '미쳤다' 소리 듣는 기후의 변화를 체감할 때, 할머니는 ‘바꿔야겠다’가 아니라 농사짓던 방법을 더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대안이기도 했다. 똑같은 빨간색의 팥을 심더라도 할머니는 적두팥과 올팥을 나누어 심었다. 그건 기후위기를 만나기 전에도 할머니가 20살 시집오기 전에도 그리했다고 했다.

더 중요한 건 빨간팥만 심는 게 아니라 어두운 붉은빛의 비단팥과 잿빛의 무늬가 있는 쉬나리팥도 심었다. 적두팥은 크고 탐스럽지만 수량이 적을 때가 많고, 어느 해에는 올팥만 잘 영글 때가 있다. 죽을 끓이면 적두팥이 더 맛있고, 팥밥을 하거나 하얀 앙금 낼 때는 껍질이 얇고 쉰 날 만에 영그는 쉬나리팥이 적당했다.


할머니의 오랜 지혜, 다양하게 나누어 심는다


퍼머컬처에서는 이를 다양성을 활용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원리로 이야기한다. 이는 단순히 달라진 이후에 대비하는 것, 한 바구니에 달걀을 다 담지 않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누어 심으면 그것의 쓰임에 따라 삶은 직접 풍요로워진다. 더불어 달라지는 기후에 어떤 품종이 더 잘 적응할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각각의 품종의 씨앗들이 매년 같지 않고 급변하는 기후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일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씨앗을 지속해서 받아서 심을 때 연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먹고사는 꼴은 생태, 즉 나를 둘러싸고 함께 먹고사는 관계망을 생각해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키우는 농사는 삶과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자 문화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니 사과 대신 오렌지만 먹고살자고 할 수는 없다.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가 불어나는 데는 할머니들이 농사짓던 것처럼 다양하게 짓지 못하게 된 유통구조, 생산자가 가격을 결정하지 못하고 시장의 논리로 성장한 농업의 구조적 문제들의 합계에 있다. 돈은 그렇게 소비자도 생산자도 결정권을 잃게 했고, 단일화와 기계화, 수동적인 생태를 만들었다.


재래종 논감자. 사진_이든농장
여러 종류로 다양한 감자들. 사진_이든농장

13년간 꾸준히 감자를 심으며 체감한 것은 이미 있는 대안과 답을 멀리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해 감자가 한창 들 때에 내내 가물어서 이집 저집 물을 댔더랬다. 할머니는 온갖 씨감자를 들인 손녀딸 때문에 하는 수없이 수미, 두백, 홍영, 자영 4종의 개량종을 심고는 아버지에게 스프링클러를 대라고 성화셨다. 씨받는 감자니 외려 더 놔두는 거라며 게으른 나의 감자밭에는 수미를 포함한 논감자, 고무신감자, 지게감자, 자주감자 등 7~8종의 감자가 아무도 감자밭인지 모르게 풀로 잘 위장하고 있었다.


‘풀도 안 메고 두둑 옆구리다가 감자를 넣었으니 감자가 들겠냐’

‘남들보다 한참 늦되게 심었으니 캐기나 하겠냐?’

할머니에게 온갖 타박을 들었다.


풀속에 잠긴 감자밭. 사진_이든농장

그해 여느 때처럼 심었던 감자들은 올라오다 때아닌 된서리에 꼬실라져서 다시 싹을 내는 동안 늦게 심은 감자는 그냥 자랐다. 물 한 번 대지 않았지만 풀 덕분에 가뭄을 덜 탔다. 이슬이 맺히면 풀을 따라 흙에 흘러들어 감자는 살아남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던 감자밭에서 제법 감자를 캤다. 가물었던 해에는 논감자가 잘 들었고, 물이 많은 해에는 논감자는 겨우 들었지만 수미나 두백이 제법 들었다.

감자에게 배워야 하는 이야기다. 단일 계통의 감자를 심었다가 대기근을 맞이한 아일랜드의 이야기, 이르게 들기 시작하는 논감자는 흰감자가 들려면 한참 멀었을 보릿고개에 감자 북을 줘가며 땅속에서 똑 따서 먹었기에 꼭 한 켠에 조금씩 심었다는 이야기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다양하게 심었을 때 감자와 우리 주변의 생태계는 다양해지고 지속할 수 있는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먹고살 대안은 이미 할머니의 할머니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함께 먹고사는 지혜, 가지각색의 감자들이 전해 준 이야기에 답이 있다.(2편에서 계속)

다양하게 심었을 때, 감자와 우리 생태계는 지속할 수 있다. 사진_이든농장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농장입니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습니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며 삶을 짓는 농장입니다. 사람들과 농사지으며 나누는 것을 열심히 해 왔고, 지금은 잠시 쉬어 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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