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9
연재를 시작하며
독일은 분단의 아픔을 딛고 마침내 통일을 이룬 국가다. 히든 챔피언과 제조업 강국이라는 명성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게는 국제경쟁력 세계 1위, 대표적 복지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공생을 위해 사회생태 전환의 길을 걸어 왔다. 탈핵 등 환경운동의 본산이다. 유럽에서도 최초로 녹색당이 연합정부를 구성할 만큼 친환경-생태주의 시민운동이 발달한 나라이다. 독일의 도시와 농촌, 산과 숲은 어떻게 인간의 사회생태적 삶(social-ecological life)을 충족시키고 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생태국가 독일을 다녀왔다.
이상호 박사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용노동부장관 정책보좌관,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전문위원, 국회 정책보좌관, 민주노총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폴리텍Ⅱ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2024년 9월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산학협력단 부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템펠호프(Tempelhof) 공항의 변신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베를린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다. 가족들과 함께 추억 여행으로 다시 베를린을 찾았던 2013년이 벌써 10년 전이니 또 10년이 흘러서야 다시 베를린을 찾았다. 나에게 베를린은 어떤 곳인가?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계속 이어진 공무로 장기 휴가는 꿈에도 못 꾸다가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 공식적인 나의 모든 임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독일행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유럽 항로가 더 길어지는 바람에 비행 시간은 2시간이 더 걸렸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드디어 그토록 그리던 베를린에 도착했다.
아, 그런데 비행기가 착륙하는 동안 창가로 보이는 지상의 모습이 뭔가 좀 다르다는 느낌? 도착한 공항은 예전 서독 지역 템펠호프(Tempelhof) 공항이 아니라, 베를린 주와 브란덴부르크 주 접경에 위치한 동독 지역 쉐네펠트(Schoenefeld) 공항이었다. 통독 이후 베를린의 국제공항은 2개, 즉 서독의 템펠호프와 동독의 쉐네펠트였다. 알고 보니 2000년대 들어서면서 쉐네펠트 공항으로 일원화되었다. 그럼 템펠호프 공항은? 그 넓은 공항과 활주로를 어떻게 한 걸까? 산업단지, 아니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을까?
독일은 달랐다. 답은 공원화였다. 템펠호프 공항은 현재 유럽에서 상당히 큰 도시공원이 되었다. 자연보호 구역과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도시 내 녹색공간이 되었다.
베를린, 세계 각국의 벤처기업과 창업가들이 모여드는 도시로
자유 도시 베를린은 국제적 도시 메트로폴리탄으로 완전히 변신한 모습이다. 10년 전, 2013년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을 때와 또 다른 모습이다. 당시만 해도 베를린 동부 주변 지역은 여전히 구 동독 시절 풍취가 느껴졌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해처럼 그 당시 시내 중심가(Mitte) 곳곳은 동독 시절 흉물스러운 주거지와 공공기관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진행된 도시재생 및 리모델링 사업으로 베를린은 분명히 환골탈태하고 있었다. 지금 베를린은 독일 각지의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곳, 세계 각국의 벤처기업과 창업가들이 모여든다는 메트로폴리탄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를린 쉐네베르크(Schoeneberg) 지역을 친환경 도시재생지구로 만든 유레프 캠퍼스이다.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실험, 유레프 캠퍼스
독일의 수도, 장벽을 무너뜨린 통일의 상징적 도시, 글로벌 메트로폴리탄으로 거듭나고 있는 베를린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속가능한 도시 재생모델에 기반하여 에너지 친화적 건축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 솔루션을 결합시키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그게 바로 유레프 캠퍼스(EUREF-Campus/ https://euref.de/en/euref-campus_en/)다.
2008년 베를린시로부터 이 부지를 인수한 EUREF AG는 예전에 가스저장고로 사용하던 시설을 개조하고 주변 지역을 에너지 전환을 위한 실험실(LAB) 지구로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문화, 관광 및 창업벤처 등을 촉진시키기 위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했다. 비즈니스와 과학을 위한 혁신 센터, 기후중립 에너지 공급시설, 지능형 에너지 네트워크, 에너지 효율형 건물, 미래 이동성을 위한 테스트 베드 등 지역의 에너지 전환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이 곳은 환경 보호와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한 행사, 캠퍼스 투어 및 기업 방문, 그리고 EUREF 에너지 워크숍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포럼 및 정보의 허브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EUREF-캠퍼스는 이미 2014년부터 독일 정부가 확정한 2045년 CO2 기후 목표를 매년 달성하고 있다.
5.5헥타르에 해당하는 캠퍼스는 자급자족형 에너지 시스템으로 구축되었고, 캠퍼스 내 모든 에너지는 자가 생산한 재생 가능 에너지로 공급된다. 연간 약 2387메가와트시의 전력을 생산한다. 190개 이상의 전기차 충전소와 자율주행 셔틀 버스가 운영되고 있다. 150개 이상의 기업과 연구소가 입주해 약 7000명이 근무하고 있다. 탄소중립뿐만 아니라 캠퍼스 내 레스토랑들은 미쉘린 스타 셰프들이 지역 생산물을 사용해 지속가능한 요리 문화를 제공한다. 건축물은 예술 작품과 조형물로 꾸며져 있으며,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보여 준다. 2024년에는 뒤셀도르프에서 유레프캠퍼스(EUREF–Campus Düsseldorf)가 완공 예정이고, 2025년에는 EUREF–Campus Hamburg가 시작될 예정이다.
공공기관의 선도 모델, 베를린 브란데부르크 교통공사(VBB)
베를린 브란데부르크 교통공사(VBB)는 도시철도(S-Bahn) 역사 지붕에 농식물을 기르고, 도시농업을 하면서 그곳에 태양광 패널 등을 설치하는 등 녹색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때 녹색 지붕은 그늘을 제공하고 공기 중의 열을 제거하며, 지붕 표면과 주변 공기의 온도를 낮추는 효과를 발휘한다. 식생이 어려운 도시나 건물과 시설이 밀집한 도심 지역에서 녹색 지붕을 사용하면 낮 동안 열섬 효과를 상당히 완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녹색 지붕에서 길러지는 식물, 허브, 풀 또는 숙주 식물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주를 이루고 있는 도시 환경에서 새, 나비, 곤충 등에게 안락한 서식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녹색 지붕 사업(Gruene Dach)은 지붕의 녹색화를 통해 수도 베를린에서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 정부가 만든 기금 프로그램을 통해 운영되고 지원된다. 대체적인 지원 내용은 베를린의 특정 지역에 있는 100제곱미터 이상의 건물 지붕을 녹화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차등 지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베를린브란데부르크 교통공사가 공공기관의 선도모델로서 이러한 지붕 녹색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교통공사가 관할하는 S-Bahn(도시철도)은 15개 노선과 약 170개의 역으로 구성된 경전철 네트워크인데, 330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시철도 네트워크는 베를린 도심과 교외, 그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브란덴부르크 주의 정거장까지 연결시킨다. 이러한 녹색 지붕 사업은 대부분 태양광 보급 사업과 연계해 추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를린은 역시 베를린이다. 독일의 심장부인데 독일 같지 않은 그 무엇이 주는 매력이 있다. 폐쇄된 공항에 아파트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 공원으로 만들어 내는 선택, 용도 폐기된 가스저장고를 대규모 에너지 전환 실험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힘, 도시철도의 역사(驛舍) 지붕을 녹색화하고 태양광으로 만들어 내는 곳! 독일의 자유 도시 베를린이 생태 도시로 성큼성큼 변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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