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이후 한국 사회는 경제발전했지만,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들의 근로기준법 적용은 여전히 부족하다. 엥겔스와 레닌는 노동귀족이 노동운동을 약화시킨다고 했지만, 현 한국 상황에서 대기업-정규직-공공부문 노조는 헌법과 노동법과 사회보험이 하층 노동자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되기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윤효원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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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스스로를 희생한 날로부터 54년이 지났다. 전태일이 산화한 해인 1970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79달러였다. 노동자대투쟁이 발발한 1987년 3555달러, 민주노총이 출범한 1995년 1만2565달러, 민주노동당의 깃발 아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2004년 1만5082달러, 일년 전인 2023년이 3만4121달러였다. 전태일 이후 한국의 ‘생산력’은 120배 넘게 늘었다. 전태일의 시대보다 훨씬 잘살게 된 요즘이다. 하지만, 아직도 노동시장 하층의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법보다 적용받기 힘든 근로기준법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법대 교수 등 법기술자들에 따르면,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근로자’와 노동조합법이 말하는 ‘근로자’가 다르며, 헌법에서 말하는 ‘근로자’가 다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법은 물론 최저임금법, 고용보험법, 건강보험법, 국민연금법, 산재보험법의 적용도 보편적이고 일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사각지대가 폭넓게 발생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이 자신의 노동으로 일하며 먹고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노동기준’을 규율하는 법이 아니라, ‘고용에 관한 약관과 조건’을 규율하는 법으로 전락한 오늘의 현실이다. 근로기준법의 보장이 가장 절실한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근로기준법’은 간데없고 ‘전태일’만 나부끼는 셈이다.
‘노조 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노동법 체제
현실적으로 5인 미만 사업장은 노동조합을 만들기 대단히 어렵고, 산별노조 같은 초기업별 노조에 개인적으로 가입하더라도 (사업장의 지불 능력을 고려할 때) 노조와 사용자가 체결하는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기도 어렵다. 프리랜서나 개인사업자의 지위를 갖고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분절된 고용관계와 파편화된 업무환경 때문에 노동조합으로 뭉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영세사업장에 노조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프리랜서나 ‘개인사업자’의 노조가 결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큰 성과가 없는 이유는 분절되고 파편화되고 분산된 이들의 고용관계와 근무환경 때문이다. 존재 조건 자체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단체교섭을 하기 힘든 상태인 것이다.
고용관계와 근무환경으로 인해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기 힘들고, 노조로 조직되더라도 효과적인 단체교섭이 사실상 불가능한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들이 기댈 언덕은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기간제근로자보호법, 사회보험법, 최저임금법 같은 노동법이 만들어 놓은 제도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하층 노동자들이 고용관계와 근무환경이 확실하지 않다는 ‘법기술적’ 해석으로 노동법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 수는 2200만 노동자 중에 500만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누가 만들었나
한국 노동시장 상황은 고용관계가 분명하고 근무여건이 안정된 상층 노동자와, 고용관계가 느슨하고 근무여건이 불안정한 하층 노동자로 분단된 ‘이중구조’에 발목 잡혀 있다.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의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큰 상층 노동자는 대부분 노동법과 사회법의 보호를 확실하게 받는 반면,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의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작은 하층 노동자의 상당수는 노동법과 사회법이 만들어 낸 제도에서 소외되고 있다.
노동시장을 양극화시키고 차별적인 법제도의 적용을 초래하는 ‘이중구조’의 덫을 누가 만들었을까.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성장해 온 정규직 노조가, 대기업 노조가, 공공부문 노조가, ‘조직노동’(organisedlabour)이 만들었을까. 대기업-정규직-공공부문에 기반한 한국의 노조운동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만들어 낸 원인일까. 아니면 그로부터 파생된 결과일까.
한국 노조운동이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생성적(generative) 원인이라면, 한국 노조운동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함으로써 이중구조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국 노조운동이 처한 오늘의 현실이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서 생성된(generated) 결과라면 단순히 한국 노조운동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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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와 레닌의 ‘노동귀족’론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5년 출간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영국에서 사회혁명이 임박했다고 예언했다. 하지만, 반세기가 흐른 1892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영어판을 다시 내기까지 영국에서 사회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엥겔스는 “노동자계급 내부에 특권층”이 출현한 때문으로 풀이한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1892년 영어판 서문에서 엥겔스는 런던 신문 『커먼윌 Commonweal』 1885년 3월 1일자에 “1845년과 1885년의 잉글랜드”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재인용한다. 여기에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귀족층’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이게 나중에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정교하게 발전하게 된다.
레닌이 언급한 ‘노동귀족’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새로운 계급을 가리킨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더 나은 근로조건과 복지를 누리는 노동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 노동자들과는 달리 자본가들과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하며,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운동 내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레닌은 이러한 노동귀족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들이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며,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간주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방해물
다시 엥겔스로 돌아가보면, 그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귀족층”이라고 묘사한 대상은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자리 잡고 있던 노동조합(trade unions)이었다. 노동조합은 “성인 남자들이 노동을 대부분 담당하거나 전담하는 직종들의 조직”으로 “이런 직종들에서 성인 남자들의 조직력은 여자와 어린아이와의 경쟁은 물론이고 기계와의 경쟁에 의해서도 크게 약해지지 않았다. 기계공들, 목수들, 벽돌공들은 저마다 하나의 권력이며, 벽돌공들과 그 조수들의 경우 기계의 도입을 저지하는 데 성공할 정도로 강력하다. 1848년 이래 이 노동자들의 상황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략) 고용주들이 이들과 동행해 왔을 뿐 아니라 이들 역시 고용주들과 무척 원만하게 지내 왔다. (중략) 이들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귀족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비교적 안락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을 변경 불가능한 결과로 여기고 있다.”
엥겔스는 “특권을 지닌 소수의 ‘보호받는’ 노동자들만이 영속적인 혜택을 받았고 대다수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처지 개선을 경험했다”면서 “특권을 가진 소수가 가장 많은 몫을 챙겼고, 대다수는 기껏해야 어쩌다가 한번씩 일시적으로 자기몫을 얻었다”라고 썼다. 그는 “영국이 산업을 독점한 기간에 영국 노동계급은 독점의 혜택을 어느 정도 공유했”는데, 이게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없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 엥겔스는 “독점의 붕괴와 더불어 영국 노동계급은 특권적인 위치를 잃을 것이고, 자신들이 외국의 동료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에 있음을 알게 될” 때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노동귀족’론의 원조인 엥겔스와 레닌은 ‘노동귀족’의 문제점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방해물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제기했다. 산업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사회주의 혁명에 나서야 할 노동자들이 독점자본의 잉여를 분점하면서 보수화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레닌의 불만이었다.
고임금 노동자는 보수적인가?
이러한 엥겔스와 레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찰스 포스트(Charles Post)는 「노동계급 의식 탐구: ‘노동귀족’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노동귀족’이 자본주의 체제에 동조하여 혁명적 변화를 저해한다는 가정이 역사적 자료와 일치하지 않으며, 노동계급의 다양한 행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포스트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항상 보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인 것은 아니며, 역사적으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 조직과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음을 강조한다. 그는 ‘노동귀족’ 이론이 노동계급의 복잡한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며, 노동계급의 의식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조직 형태, 노동시장의 구조, 정치적 환경 등 보다 포괄적이고 다차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방해자인 ‘노동귀족’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학술적 논쟁을 고려할 때, 나는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이 현 시기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는 데 의미 있는 이론적 기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 시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엥겔스나 레닌이 주장하는 식의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는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하든 못하든 대기업-정규직-공공부문 노조는 현 시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대기업-정규직-공공부문 노조는 헌법과 노동법 모두가 노동시장 하층 노동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를 주장해 왔다. 또한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을 노동시장 상층만이 아니라 하층에도 전면적으로 적용할 것을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이러한 주장과 요구를 줄기차게 거부해 온 쪽은 오히려 국가와 자본이다.
따라서 상황과 정세에 맞지 않는 지나친 ‘노동귀족’론은 오히려 노동운동 내부에 분열과 불신을 조장하면서 대기업 노조를 우경화시켜 노동운동의 주력에서 이탈시키는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찰스 포스트가 말했듯이 높은 임금을 받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노동자가 반드시 보수적이거나 우익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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