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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뒷날 풍경ㅣ작가 한강을 추앙하며

 

2024-10-25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그녀의 소설이 어렵다?


지난 주 한 모임에 다녀왔다. 뜨거운 20대를 같이 보낸 왕년의 동지들. 의사와 CEO를 포함해서 나름 성공한 분들(본인은 제외)의 모임에서 단연 화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었다. 요즘처럼 답답한 국내외 정세에서 그녀의 수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한 줄기 햇살처럼 청량한 것인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음주와 함께한 모임인지라, 좀 시답잖은 농담도 있었다. 그녀 특유의 길게 늘어뜨리는 말 톤, 다소 게슴츠레한, 혹은 흐리멍텅한(실례되는 표현임이 분명하지만) 눈매에 대한 얘기들(결국 무엇이건 풍자해내는 SNL에서 김아영이 묘사해내는). 20대 초반의 그녀와 미팅했던 의대 후배와 ‘연대는 한강을 낳고 고대는 정몽규와 홍명보를 낳았다’는 평까지.


하지만 이구동성으로 다들 지적했던 것은 그녀의 소설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상당한 독서가들인 그들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내게는 좀 낯설었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의 대표작들(그외 『여수의 사랑』이나 『흰』 같은 작품까지 포함하여)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기들. 그런데 그녀의 작품이 술술 읽히는 종류의 글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렵다’는 표현을 들을 정도인가?



해녀의 자맥질 같은 CONTEXT


결국 그녀의 작품이 독서가들에게도 이런 인상을 주는 이유는 CONTEXT로서의 반성적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칼럼을 읽는 분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TEXT로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글들과 달리, 그녀의 글은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단히 조심스럽게 선택된 단어와 부호와 빈칸들의 촘촘한 연결망으로서 구성된 문장들은 독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회의하며,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준 (그리고 많은 분들 역시 공감할) 『소년이 온다』를 읽는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했던 표현대로 ‘무언가 다른 존재’가 그녀의 몸을 빌어 써내려간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문장들의 무게는 한국 문학사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런 그녀의 문장을 볼 때마다 ‘이것은 마치 해녀(海女)의 글과 같다’라는 생각을 한다. 일반인이라면 버티기 힘든 깊은 바닷속으로 자맥질해서 기어이 굴이든, 조개 일속을 따오는 해녀의 노동. 아슬아슬할 정도로 숨이 턱 막히는 죽음의 한 치 앞까지 인간 존재의 바다를 유영하는 노동이 그녀가 쓰는 글의 본질이 아닐까. 아마도 노벨상위원회가 ‘실험적 산문의 혁신가’라는 표현으로 상찬하는 이유는 그런 그녀의 글이 가진 CONTEXT로서의 힘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물론 번역가들의 몫이 크지만)


최고의 무사(武士), 유사(儒士), 운문가, 산문가


개인적으로 그녀 못지않은 문장가로서 소설가 김훈과 작가 유시민을 떠올린다. 김훈은 마치 적전무사(敵前武士)와 같은 기세로 써 내려간다. 그의 문장은 칼처럼 벤다. 몽당연필이 그의 검이지만, 옛날에 태어났다면 그는 장수였을 것이다. 반면에 유시민은 유사(儒士)와 같다. 조선시대였다면 유시민은 상소시위를 주동하다 고초를 겪지 않았을까?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결기가 있는 그의 글은 매력적이다. 비록 단 한번도 그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던 적이 없지만, 책을 내면 팔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노벨문학상 후보로 그동안 물망에 올랐던 시인 고은과 소설가 황석영 역시 충분히 받고도 남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운문가(韻文家)인 고은이 개인적인 추문으로 낙오했고(그의 시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세노야’를 부른 적이 없겠지만), 최고의 산문가(散文家)인 황석영을 제치고 젊은 거장(54세인데) 한강이 받은 셈이지만. 그래도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나 『장길산』의 절창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됐건, 작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오랜만에 독서 열풍이 분다. 1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100만 부가 넘는 책이 팔린다. 인쇄소는 밤 세워 찍고, 책을 주지 않는다는 볼멘 항의 때문에 교보문고는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시라는 요청을 해야만 했다. 이런 호사(好事)에 어찌 다마(多魔)가 없겠는가. 그녀의 수상에 딴지를 걸고 싶어하는 사람들, 스웨덴대사관을 항의 방문하는 사람들, 그녀가 전라도 출신이고,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가 광주민중항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까워하는 사람들.


독서의 종말과 유튜브 쇼츠


나는 이런 화제거리들, 이런 시샘들과 논란들이 모두 ‘좋다’. 그러니까 이미 시대의 메인스트림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문화로서 독서가, 오늘날 불과 성인의 32%만이 1년에 종이책 한 권 이상을 본다는 현실이 조금이나마 바뀌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93%의 초중고생이 책 한 권 이상을 보다가 20세만 되면, 문자와 안녕하는 이 세태(그렇다. 매체가 아니라 문자 자체와 작별하는)가 조금 지체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 물론 이런 열풍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그 어떤 자리에서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킥킥대는 풍경이(전 세계가 그렇겠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겠지만.


이런 모습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한 ‘노동의 종말’보다 먼저 찾아온 ‘독서의 종말’을 대체하는 것은 유튜브 쇼츠가 아닐까. 컨텐츠로서 유튜브 알고리즘을 소비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30초 이내의 짧은 쇼츠가 주는 도파민의 쾌감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를 보기보단 짧은 영화 소개를 보고, 책을 읽기보다 ‘3줄 요약’으로 마무리. 그래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SNL에서 풍자한 대로 작가 한강을 진짜 江으로 착각하건 말건, 그저 그녀의 책을 끼고 다녀야 힙하다는 느낌을 주건 말건, 문화인이라는 인증이 필요해서 SNS 이미지를 연출하건 말건, 지금의 열기가 당분간 식지 않길 바란다.


다시 한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녀의 남은 생도, 써내려갈 글들도 여전히 빛나기를! 더불어 그녀의 소망대로 세계와 인간을 뒤덮은 이 폭력의 연쇄들이 조금이나마 끊어져서 수상을 마음 편히 기뻐할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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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7일 전

한강 작가의 글이 해녀의 자맥질과 같다는 표현이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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