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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정치ㅣ윤효원ㅣ일제가 항복한 진짜 이유

 

윤효원 2024-09-20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다는 허구


1945년 이뤄진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을 항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그해 5월 독일이 패망하면서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는 항복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미 공군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고,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8월 9일 전쟁 개시 이후 최초로 최고위직 6인으로 구성된 최고각의가 열려 무조건 항복 문제를 논의했다.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은 이날 아침에 이뤄졌는데, 이때는 항복을 전제로 회의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사흘 전 있었던 히로시마 원폭의 피해 상황에 대한 육군의 보고서는 8월10일에야 각의에 도착하게 된다. 두 번의 원폭은 지도부의 항복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 전역 66개 도시에 각각 500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여름, 미 육군 항공대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도시 파괴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 전역 68개 도시를 공격해 잿더미로 만들었다. 170만 명이 집을 잃었고, 30만 명이 죽고, 75만 명이 다쳤다. 66번의 공습은 재래식 무기로, 2번의 공습은 원자폭탄으로 했다. 재래식 공격이 야기한 파괴는 원폭보다 심각했다. 공습 1회당 도시 하나에 폭탄 500개를 투하했는데, 그 파괴력은 히로시마 원폭의 4분의 1 수준에 달했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첫 공습은 3월 9일과 10일 밤 도쿄 전역에 걸쳐 이뤄졌고 12만 명이 살해당했다. 단일 도시 폭격 사망자수로는 최대치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보다 훨씬 많았다. 히로시마에 앞서 미 육군 항공대는 26개 도시를 공습했다. 그중 3분의 1에 달하는 8개 도시는 파괴 정도에서 히로시마보다 심각했다.


일본은 공습이나 원폭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이 두려웠다


당시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소련이 중립으로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은 수차례 논의했지만, 히로시마 원폭의 충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도시 공습 문제는 45년 5월과 8월 9일 밤 딱 두 번 논의됐다. 일본 지도부가 원폭을 포함해 공습을 심각하게 여겼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심지어 8월 13일 군부는 원폭이 몇 달 동안 견뎌 온 화염폭탄보다 위협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1945년 설날 일본 어전회의.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전쟁의 시작과 종결을 결정했다.


일본 지도부가 걱정한 것은 공습이나 원폭이 아니라 소련군의 참전이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지도부는 강경파든 온건파든 전쟁이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연합국이 요구하는 무조건 항복을 어떻게 피하느냐는 것이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기존 국체를 유지하고, 전쟁범죄 재판을 회피하고, 조선·대만·만주·베트남·태평양 등 식민지 영토를 보존하느냐가 관건이었다.

1941년 4월 일본이 소련과 체결한 중립조약은 5년짜리였다. 1946년까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도부는 스탈린이 미국과의 항복 협상을 중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반면 군부는 본토에 상륙하는 미군과 결전을 벌여 유리한 항복 조건을 따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구상 모두 1945년 여름에 급박하게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관동군은 일본 본토가 미국에 항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소련군에 대항했다


1945년 2월 흑해 연안 얄타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만났다. 당시 소련군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석권하고 독일 본토로 진공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했고,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안에 소련군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 9일 소련은 독일로부터 공식 항복문서를 받았다. 스탈린의 약속대로 독일이 항복하고 정확히 3개월째 되던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다음날 150만 명이 넘는 붉은 군대가 만주국을 침공해 일본 관동군과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 일부는 조선으로 진군해 8월 11일 웅기, 12일 나진, 13일 청진을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종전을 선언했지만,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만주와 조선반도에서는 소련군에 대항하는 일본군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8월 15일 일본군이 전투 행위를 멈춘 대상은 미국군과 영국군이었던 것이다.

관동군은 유럽 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소련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일본 본토가 미군에 항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미국은 사할린을 점령한 소련군의 홋카이도와 혼슈 진공을 반대했고, 조선반도의 38선 이북에서 멈출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동의했고, 소련군은 8월 20일부로 작전을 종료했다. 일본의 최종적인 항복문서 서명은 1945년 9월 2일 이뤄진다.

1945년 청진항에 상륙한 소련군



미국은 일본이 아닌 소련에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 정보부는 미군이 몇 달 안에 침공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반면 소련군이 일본에 진공하는 것은 열흘이면 충분하다고 봤다. 소련군의 본토 점령보다 미국에 무조건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지도부는 미국측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재빨리 전했다. 미군의 무차별 공습과 원폭으로 자국민 수백만명이 살상당해도 유리한 방향으로 항복 조건을 타결하려 전쟁을 계속하려 했던 일본 지배층은 소련군의 전투 개시 소식을 듣자 꼬리를 내리고 무조건 항복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군의 본토 점령을 서둘러 허용했다.

1946년 미국 정부가 발행한 <전략폭격보고서>(Strategic Bombing Survey)는 “원폭 공격이 없었더라도 제공권 장악만으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압박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면서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라고 썼다.

전쟁을 끝내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탄 투하는 불필요했다. 하지만,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미리 알고 있던 미국은 일본이 아닌 소련에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 노동자 수만명이 일본인과 더불어 원폭 희생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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