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원의 지구와 정치 | 달라이 라마의 CIA 커넥션: 티베트, 신정 정치와 냉전 공작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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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4일
- 5분 분량
2025-07-04 윤효원
"서구는 달라이 라마를 ‘성인’ 이미지로 소비해 왔지만, 그는 냉전의 한복판에 뛰어든 CIA의 ‘공작원’이었다. 인도에 소재한 티베트 망명정부는 정교일치의 신정 정치라는 신비주의적 외피를 띠었지만, 사실 어떤 정권보다 정치적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왔던 농노제에 기반한 티베트의 정교일치 봉건체제는 20세기 중반 중국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해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티베트는 미국의 냉전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공작 무대로 전락했다."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티베트 – 냉전 대리전의 마당
서구는 오랫동안 티베트를 이상화해 왔다. 만년설 아래에서 명상하는 승려, 폭력 없는 공동체, 그리고 자비의 화신인 달라이 라마는 ‘영적 이상향’의 이미지로 반복 재현되었다. 그러나 이 신화에 가려진 티베트는 역사적으로 정교 일치의 신정 체제와 봉건적 농노제에 기반한 후진 사회였다. 20세기 중반부터는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공작과 테러 활동을 벌인 냉전 대리전의 마당이었다.
농노제에 기반한 신정 정치
인류학자 멜빈 골드스타인(Melvyn Goldstein)는 그의 저서 『현대 티베트의 역사 1권: 1913–1951』(1991)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이 진입한 1950년 10월까지 티베트는 정교일치적 봉건 농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티베트 사회는 귀족-승려-농노로 구성된 봉건적 계급 사회였다. 농노는 이동, 혼인, 재산 소유에서 억압을 받았다. 노예에 가까운 지위였고, 지주에게 빚 대신 자녀를 양도하거나, 농노 자신이 토지와 함께 거래되기도 했다. 골드스타인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해방’시키기까지 농노 착취에 기생했던 티베트를 ‘평화 공동체’로 이상화하는 서구의 이미지 조작에 비판적이다.
청나라의 티베트 지배
봉건적 신정 국가였던 티베트를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지배한 시점은 미합중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기도 전인 17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720년 강희제는 라싸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1751년 건륭제는 신정 체제의 지배자인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행정구조를 개편하여 티베트를 청제국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1839년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청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이 티베트를 넘보기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가 티베트를 통해 인도 북부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티베트를 차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영국군의 라싸 점령
1903년, 영국은 ‘외교 사절단’이라는 명목 하에 무장 군대를 파견하고, 이듬해인 1904년에는 티베트 수도 라싸를 점령했다. 수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희생당했고, 영국은 티베트에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라싸 조약’은 무역 거점 개방과 전쟁 배상금, 영국의 정치적 개입 권한을 포함했다.
1906년 영국은 붕괴 직전의 청나라와 조약을 맺어 형식상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척하지만, 1907년에는 러시아와 함께 티베트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며 양자 간의 비공식적 지배 구도를 확립한다. 티베트가 서구 열강의 시야에 본격적으로 포착된 이때부터 서방 제국주의는 티베트를 ‘독립 국가’라 치켜세웠고, 군사적 간섭과 정치적 개입의 명분을 만드는데 열을 올렸다.
티베트 ‘분리’ 시도와 중국군 진입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동부 지역에 무력으로 진입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라싸로 들어오려던 중국 대표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국경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베이징과의 평화적 교섭을 거부한 티베트 신정 체제는 미국과 영국, 인도 등에 외교적 서한을 보내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려 한다"며 개입을 요청했다. 애초 마오쩌둥은 애초에 평화적인 협상을 시도했으나, 티베트 신정 체제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마오쩌둥은 무력 진입을 승인했다.
티베트의 봉건 지배층에게 신중국으로의 편입은 정교일치 봉건체제의 해체를 의미했고, 이들은 외세를 통한 국제적 중재 혹은 티베트의 독립 보장을 얻기 위한 지연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귀족과 승려의 반발과 CIA 음모의 서막
1951년 5월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중앙정부는 티베트의 종교, 행정, 자치적 권한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근거해 중국 정부는 사회개혁을 추진하자, 귀족과 승려가 반발했다. 개혁을 둘러싼 갈등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폭력 사태로 발전했다.
1956년 중국이 추진한 토지개혁과 인민공사 조직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농노제에 기반한 부족 질서와 정교일치의 봉건제를 해체하려는 사회주의 개혁에 저항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 무렵, 미국은 티베트 내부에서 고조되는 반중 감정과 저항 움직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속명 라모 텐둡, 승명 텐진 갸초)의 형 걀로 텐둡은 인도로 건너가 미국 당국과 접촉했고, 이를 계기로 1957년부터 CIA는 티베트 청년들을 비밀리에 훈련시켜 무장 게릴라 조직화를 추진했다.
작전명 ‘ST CIRCUS’
케네스 콘보이와 제임스 모리슨은 『CIA’의 티베트 비밀전쟁』(2002)에서 CIA가 작전명 ‘ST CIRCUS’ 하에 콜로라도의 캠프 헤일(Camp Hale)에서 티베트 청년 수백 명을 훈련시켰다고 밝혔다. 청년들은 게릴라 침투, 암살, 폭파, 암호, 산악 침투 등을 익힌 후 인도와 네팔 국경을 통해 티베트로 잠입했다.
CIA는 무기, 무전기, 식량, 의약품을 티베트에 공수했는데, 여기에 미국 정보작전용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에어 아메리카는 CIA 산하의 위장 항공사로 라오스·티베트·중국 접경 등에서 정보 및 군수 물자 공수를 수행하면서 무기, 무전기, 식량, 의약품의 공중 투하를 통해 CIA가 양성한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1959년 반혁명 폭동’과 신정 체제의 종식
1959년 3월 티베트 라싸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훗날 중국 정부는 이를 ‘1959년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하며, 티베트의 신정 지배 세력과 외부 세력이 결탁한 반공·반중 무장 반란으로 평가했다.
중앙정부가 추진한 사회주의 개혁, 특히 농노 해방과 토지 재분배에 반발한 구질서의 수호자들은 정치적 권력에 더해 경제적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민병대를 결성하고, 군수물자를 확보했으며, 민중을 선동해 소요 사태를 유도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납치 시도’를 이유로 수십만 군중을 라싸에 집결시켰고, 군사적 충돌을 계획적으로 유도했다. 이는 단순한 민중 시위가 아니라, 무장 쿠데타를 통한 체제 전복 시도였다.
1959년 ‘봉기’를 티베트 내부 반혁명 세력과 외부 제국주의 세력이 공모한 반란으로 규정한 중앙정부는 이를 군사적으로 진압했고, 티베트 통치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후 티베트는 자치구로 정식 편입되었다. CIA의 사주를 받은 봉기가 실패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필두로 티베트 지배층이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의 형, 걀로 텐둡
달라이 라마의 둘째 형인 걀로 텐둡(Gyalo Thondup)은 티베트 망명정부의 더러운 음모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중국 중앙정부 전복을 위해 CIA 및 대만 국민당(KMT)과 긴밀히 교류했다. 인도 망명 이후에는 티베트 지도부와 국제 정치세력 간의 비밀 외교·공작의 핵심 중개자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망명정부의 대미 전략을 설계하고, 무장 게릴라 작전을 지원한 미국 측 인사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걀로 텐둡의 역할은 단순한 외교 창구를 넘어섰다. 미국과 대만을 오가며 티베트 분리운동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 통신망, 훈련 계획 등을 조율한 실질적인 전략가였다. 이러한 활동은 1970년대 초 미·중 외교 정상화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는 CIA가 주도한 캠프 헤일에서의 게릴라 훈련과 에어 아메리카를 통한 무기 공수 작전에 깊숙이 관여했다.
2015년, 걀로 텐둡은 회고록 『깔림퐁의 국수장수(The Noodle Maker of Kalimpong)』을 출간했다. 공동저자는 미중관계 전문가인 앤 서스턴(Anne F. Thurston)이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이 미국과 대만, 그리고 티베트 망명정부 사이의 연결고리였음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의 고백으로 티베트 망명운동이 단순한 도덕적 저항이 아니라, 국제 냉전 질서 속의 반공 전략 행위였음이 드러났다. 달라이 라마 형제들의 기획으로 티베트는 냉전 구도의 지정학적 대리전에 비밀리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과 CIA 공작의 종식
1959년 라싸 봉기를 “미국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은 무장 쿠데타 시도”라고 규정한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으로 상징되는 티베트 분리세력의 배후에서 미국 정보기관이 공작을 벌여 왔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공개적으로 이를 부인하며 “달라이 라마는 순수한 종교 지도자”라고 선전했다.
1960년대 내내 계속되었던 CIA의 티베트 공작은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외교관계 수립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동력을 잃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인도의 티베트 망명정부에 대한 CIA 공작금 지원을 중단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CIA의 커넥션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냉전의 전략 자산’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정보자유법(FOIA)에 따라 기밀 문서가 해제되면서 티베트에서 자행된 CIA의 더러운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은 CIA가 티베트 망명 정부에 매년 수백만 달러를 지원했고, 그중 일부가 달라이 라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이 자금은 경호, 선전, 외교 활동, 망명정부 운영 등으로 분산되었고, 1990대 들어 달라이 라마는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CIA와의 커넥션이 세상에 까발려지자 달라이 라마는 “우리는 그들(CIA)이 티베트를 사랑해서 돕는 게 아니라, 중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았다”고 변명했다(LA Times 인터뷰, 1998년 9월 15일). 미국 외교비평가 윌리엄 블럼은 『희망을 살해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 및 CIA 개입사』(2003)에서 CIA가 제3세계에서 수행한 더러운 공작 중 하나로 티베트를 열거하며, “달라이 라마는 냉전의 전략 자산이었다”고 평가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전략 변화와 달라이 라마의 실체
1974년 이후 달라이 라마는 망명 정부에 게릴라 공작을 중단시켰다. 1956년부터 이어지던 CIA 지원의 중단에 따른 교묘한 전략 변경이었다. 그는 이른바 ‘중도노선’을 내세우면서 티베트 독립이 아니라 중국 내 자치를 목표로 한다고 선전하면서 비폭력과 외교적 호소라는 외피를 내세웠다. 이는 군사적 수단이 막힌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술이었다.
티베트 출신 지식인이자 작가인 자므양 노르부(Jamyang Norbu)는 달라이 라마를 둘러싼 신비화에 강한 비판을 제기해왔다. 그는 『환상과 현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치적 실수와 위선』(2009)에서 “망명정부는 (CIA 공작금의 중단 이후) 비폭력의 도덕성 뒤에 숨은 외교 전략을 구사해왔다”고 쓴다.
달라이 라마는 단순한 도덕적 교사나 피해자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셈법을 아는 음모가였다. 그의 비폭력 담론은 미국이 주도한 냉전 전략의 정치적 술책이었고, 그의 망명정부는 종교적 이미지 뒤에 숨어 냉전을 수행한 폭력조직이었다.

냉전의 유산과 티베트의 위치
서구는 달라이 라마를 ‘성인’ 이미지로 소비해 왔지만, 그는 냉전의 한복판에 뛰어든 CIA의 ‘공작원’이었다. 그리고 인도에 소재한 티베트 망명정부는 정교일치의 신정 정치라는 신비주의적 외피를 띠었지만, 사실 어떤 정권보다 정치적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왔던 농노제에 기반한 티베트의 정교일치 봉건체제는 20세기 중반 중국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해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티베트는 미국의 냉전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공작 무대로 전락했다.
지금 미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이미지와 티베트의 분리를 활용한 대중국 전략을 포기했을까? 티베트-대만을 연결시킨 ‘CIA의 비밀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티벳 망명 정부와 달라이라마의 민낯을 생각해봅니다. 환생하는 달라이라마도 코미디 이지만 이를 이용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도 변함이 없군요. 결국 당하는 건 잘못이 없는 국민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