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원의 지구와 정치 | 평화의 지정학 ― 제프리 삭스, 유럽의회에서 유럽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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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 3분 분량
2025-05-09 윤효원
제프리 삭스 교수가 유럽의회에서 밝힌 '평화의 지정학' 메시지: 힘에 기반한 일방주의 대신 다자간 협력과 평화 구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평화는 설계되어야 한다” — 제프리 삭스가 던진 질문
2025년 2월 19일,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교수는 유럽의회에 섰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국제정치 분석가인 그는, "평화의 지정학(Geopolitics of Peace)"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삭스 교수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지정학적 충돌을 정면에서 마주 보며, 무엇이 갈등을 불러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지를 질문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한 도발이나 추상적 이상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삭스 교수는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서 유럽이 스스로의 미래를 재설계할 것을 촉구했다. 오늘날 세계 질서와 국제정치의 흐름을 고민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연설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는 “평화는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평화는 설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국 중심 질서의 허상, 패권을 넘어서야 할 때
삭스 교수가 제시한 첫 번째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오늘날의 국제 갈등,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히 ‘러시아의 침략’이라는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추구한 일방주의적 외교 정책에 주목했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과정에서 미국과 독일은 고르바초프에게 “NATO는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NATO는 발트 3국을 비롯해 동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고, 러시아는 점차 서방으로부터 고립되었다. 삭스 교수는 이 과정을 “국제 신뢰의 붕괴”로 규정했다.
냉전의 승자였던 미국은 승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라는 이름 아래,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강요했고, 그 과정에서 다자 간 합의와 상호 존중의 원칙은 무너졌다. 삭스의 말대로 “힘에 기반한 일방주의는 불안정과 갈등을 부를 뿐”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반발과 긴장을 초래했다. 러시아만이 아니다. 중국, 이란, 남반구(Global South)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일방적 행보에 의구심과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 전쟁은 외교 실패의 결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구조적 긴장의 폭발이었다고 삭스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2014년 마이단 혁명에 주목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친서방 정권 교체는 자발적 민중 봉기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미국과 서방은 정치·경제·정보 지원을 통해 적극 개입했고, 이 과정은 러시아로 하여금 안보적 공포를 극대화시켰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서방 편입 노선을 분명히 했고, NATO 가입을 공식 목표로 삼았다. 삭스 교수는 이 과정을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안보 위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교적 해결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이를 무시하고 군사적 충돌을 선택한 것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했다. 전쟁은 필연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다.
유럽, 독립적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그늘을 넘어서
삭스 교수의 연설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유럽에 대한 당부였다. 그는 “유럽은 스스로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물었다. 오늘날 유럽은 미국의 전략적 하위 파트너처럼 행동하고 있다. 삭스 교수는 이를 “자기부정”이라고 표현했다.
유럽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권이고, 고유한 역사와 문명을 지닌 대륙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러시아, 대중국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그는 유럽이 자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기반해 러시아와 협상을 재개하고, 중국과도 긴장 완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러시아, 미국-중국 간 갈등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 평화와 안정을 설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협력과 다자주의의 재발견
삭스 교수는 세계를 이분법적 선악 구도로 보는 접근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국을 ‘경쟁자’나 ‘위협’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성공한 나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중국은 수십 년에 걸쳐 수억 명을 빈곤에서 탈출시켰고, 세계 경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삭스 교수는, 이를 위협으로만 간주하고 억제하려 드는 미국식 접근이야말로 세계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동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일관되게 ‘두 국가 해법’을 지지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공존을 추구해야 하며, 미국은 더 이상 특정 국가 편향적 태도를 버리고, 진정한 중재자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21세기 세계질서는 협력과 존중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연설 이후,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
삭스 교수의 연설은 유럽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은 그의 NATO 비판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지식인과 정책 전문가들은 삭스 교수의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연설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선다. 그는 묻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가?”
국제사회는 여전히 군사적 억제력과 패권 논리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삭스 교수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용기 있게 대화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힘의 논리가 아닌 법과 협력의 원칙으로 세계를 조직하자는 제안이다. 이는 쉬운 길이 아니다. 더 많은 인내와 전략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삭스 교수는 단언했듯이, “평화는 우리의 선택과 설계에 달려 있다.”
맺으며: 한국에도 던지는 질문
오늘날 한국 또한 이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다. 미중 패권경쟁의 격랑 속에서, 한국은 스스로를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또한,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 외교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제프리 삭스의 연설은 유럽만을 위한 경고가 아니다. 세계 각국이 자국의 이익과 존엄을 지키며, 동시에 글로벌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깊은 메시지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를 설계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세상은 분명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