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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북ㅣ만추의 밤을 지켜 줄 나무의 세레나데

2025-11-28 안은영

가을밤 나무 에세이 추천, 만추의 밤, 잠 못 이루는 이들을 위한 나무 에세이 추천. 고다 아야의 나무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을 통해 계절의 쓸쓸함을 위로받는 독서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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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 작가, 책방 사이 대표

기자로 밥벌이를 했고 『여자생활백서』,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물들』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숲해설가, 유아숲지도사를 거쳐 강동구에 숲·생태·기후·환경 전문 독립서점 ‘책방 사이’를 운영 중이다. 지구에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변화의 가격을 지불하고 있음에도, 무엇 때문에 지불하는지 모르고 있는 듯하다.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어서일까.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 늘었다. 밤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리워할 것이 많아진다는 얘기도 되니까. 과거에 남겨 두고 온 이야기들을 맥없이 들췄다 접는 동안 밤이 깊어간다.


거실 창밖이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것을 바라보다가 방에 들어와 침대 맡의 램프를 켠다. 베개를 세워 등을 받친 뒤 머리맡에 둔 책을 집는다. 깊은 계절로 들어가는 쓸쓸한 밤에 유난히 더 잘 읽히는 책이 있다. 스르르 잠에 빠지는 동안 책이 바닥에 떨어진대도 미안하지 않을, 내 마음을 마구잡이로 헤집지 않을, 계절과 일상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당대의 문장가와 사색가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나무에 관한 책은 가을과 겨울 사이 아쉬움으로 가득한 11월 끄트머리에 제격이다.


고다 아야 지음, 차주연 옮김, 『나무』, 책사람집, 2024
고다 아야 지음, 차주연 옮김, 『나무』, 책사람집, 2024

정갈한 나무 이야기, 고다 아야의 ‘나무’


홋카이도의 가문비나무는 죽은 나무 위에서 싹을 틔운다. 대지에 길고 늘씬하게 박힌 고목 위로 나란한 새싹이 자라는 모습은 경이롭다. 죽은 나무는 어린 나무가 뿌리내리는 대지이자, 뿌리가 약한 가문비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게 잡아 주는 친환경 스크럼이다. 고다 아야의 『나무』(책사람집)의 첫머리는 순환하는 가문비나무로 시작된다.


작가는 초목을 가까이하게 된 배경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귤나무, 감나무, 벚나무, 동백나무 등의 묘목을 받아 삼남매가 각자의 나무로 길렀던 기억부터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꽃이 필 때 소리를 내는 연꽃과 황폐한 정원의 연못가에서 황홀하게 바라봤던 등꽃 얘기를 할 때는 남다른 감수성으로 사춘기를 보냈을 어떤 소녀의 눈빛이 오버랩된다. 책은 소박하고 단정한 노부인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에세이다.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인 고다 로한의 둘째 딸로 태어난 작가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다수의 수필과 소설을 내놓으며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두루 받았다. 이 책은 작가가 생전에 써 놓은 작품들을 엮은 유작으로 초목 애호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무, 그리고 나무와 함께 하는 삶이 열다섯 꼭지의 글에 빼곡히 담겨 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정서적 파수꾼


책에서 작가는 “한 해는 겪어 봐야 나무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 “적어도 계절마다 한 번은 봐 두어야 그 나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가문비나무의 갱신’부터 마지막인 ‘포풀러’가 완성될 때까지 13여 년이 걸린 이유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자연현상과 나무들의 한살이에 얼마나 고요하게 천착하던지,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나의 더디거나 늦되곤 했던 성정에 슬며시 자부심이 들었을 지경이다.


그래서 감독 빔 벤더스는 자신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의 머리맡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이 책을 고른 것일까.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다. 성실한 노동자로서 그의 하루는 대부분 화장실 청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이사이에 보석 같은 미장센이 박혀 있다. 동전으로 뽑아 먹는 캔 커피, 손때 뭍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즈',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는 필담과 중고서점에서 100엔 주고 산 책 『나무』가 그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히라야마의 『나무』는 꼭 하루치 의식의 궤적을 꿈으로 보여 준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교교한 검은 숲과 햇살에 부서지는 이파리가 책의 활자와 교차하면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에서 이 책이 이토록 효과적인 매개체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별일 없이 흘러가는 것에서 반짝이는 것을 찾았던 작가의 세계관이 영화의 주제와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손에 잡히는 크기에 글의 분량이 적다는 것도 침대 맡을 지키는 정서적 파수꾼으로 합격점이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창비, 202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창비, 2021

헤세의 식물적인 고백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숲과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시인이라는 말이 있다. 헤르만 헤세는 이 말의 근대적 기원을 이룬 주인공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머무는 곳마다 크고 오래된 숲 주변을 선택했고, 종종 작품에 자신의 성소(聖所)를 은유하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창비)의 발행인인 폴커 미헬스는 헤세가 “초기 소설들에서 슈바르츠발트의 어린 시절 숲의 마법, 즉 우듬지 아치에서 벌어지는 빛의 놀이, 봄의 봉오리 향기, 전나무 기둥들이 만들어 내는 홀을 묘사했고, 훗날에는 그가 제 2의 고향으로 삼은 스위스 테신의 풍성한 밤나무 경사면들을 서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데미안』, 『싯다르타』 등 동서고금의 문장가인 헤세는 비감한 순간마다 나무를 통해 세상을 위로했다. 그는 자국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벌이는 시대를 살아야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독일의 청년에게 영혼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썼고, 정치색 강한 글들로 독일인에게 ‘매국노’라 불리며 스위스 망명 길에 올라야 했다.


그때의 심경을 헤세는 잘려나간 그루터기에 빗대 이렇게 적었다. “가장 단단하고 고귀한 목재는 좁다란 나이테를 가진 나무라는 사실을, 가장 파괴할 수 없고 가장 강하고 모범적인 나무의 몸통은 산 위 높은 곳, 늘 위험이 계속되는 곳에서 자라는 나무라는 사실을 농부네 소년도 안다.”

     

노 시인의 담담하고 위대한 관조


녹록치 않았던 삶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책에는 자애로운 나무 관찰자이자 오랜 산책가로서의 행복한 시선이 곳곳에 담겨 있다. 나무를 노래하는 시, 틈틈이 써내려 간 간결하고 목가적인 수필은 위대한 이름에 걸맞은 긴 여운을 남긴다. 헤세가 생각하는 나무는 거대하고 신령스러운 무언가가 아니다.


책에서 그는 “한 그루 나무는 말한다. 나의 힘은 믿음이다. 나는 씨앗의 비밀을 끝까지 살아낼 뿐 다른 것은 내 걱정이 아니”라고 적었다. 작가의 관조에서 긴 세월을 거쳐 단단히 뿌리내린 노목의 고요가 엿보인다.


덧붙여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망명한 스위스 베른의 브렘가르텐 성 뜰에 있는 밤나무들에 붙인 노래다. 잠들기 좋은 데시벨로 평화롭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를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중략)

우리가 사라지고 잊혀도

높은 나무에선 여전히

지빠귀가 노래하고 바람도 노래하겠지

저 아래에선 강물이 암벽에 부딪혀 거품을 내고

     

그리고 공작새가 저녁 외침을 지를 때

홀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겠지

그들은 수다를 떨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찬양하고,

깃발 단 배들이 지나갈 테지

영원한 오늘이 그걸 보고 웃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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