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농업 | 한국 농업에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설계'
- Dhandhan Kim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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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1시간 전
2025-12-03 김복연 기자
기후위기 속에서 한국 농업은 기술 부족이 아니라, 기술이 작동할 생태계의 부재가 더 큰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스마트팜과 정밀농업 기술은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유지·보수 체계, 수익 구조, 품종 다양성 등 핵심 기반이 부실해 오히려 농가의 부채와 리스크를 키우는 역설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품종 쏠림과 시장 자멸 구조는 기술의 효과까지 무력화하며 농업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지속가능한 농업의 전제는 기술 확산이 아니라, 기업·농가·정부가 함께 구성하는 생태계 설계다. 기술은 농업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요소일 수 있지만, 기술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기술은 생태계를 가진 산업에서만 기능하고, 생태계를 잃는 순간 기술은 농가의 부담이 된다.

기술이 해법이라는 오해
기후위기 담론에서 기술은 가장 먼저, 가장 손쉽게 호출되는 단어다. 정밀농업, 스마트팜, 예측 AI는 농업 혁신의 상징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한국 농업의 현실은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기술이 정착할 수 있는 경제적·산업적 생태계의 부재에 있다. 기술을 적용해도 이를 유지하고 확산할 수 있는 시장 구조가 없고, 기업은 수익을 내지 못하며, 농가는 기술 도입 이후 더 높은 수익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기술은 해법이 아니라 농가의 부채와 리스크를 키우는 요인으로 전환된다. 기술은 생태계가 존재할 때만 기능하는 도구이며, 지금 한국 농업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이를 떠받칠 구조가 없다는 데 있다.
‘부채만 남기는’ 악순환
기술이 농가에 정착하려면 생산량 증가나 품질 향상을 통해 소득이 실질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영농비 증가, 유통비 부담, 시장 가격의 극심한 변동성이 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과를 상쇄한다. 기술이 작동하더라도 농가의 손에 남는 수익은 거의 변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든다. 이 구조에서는 어떤 기술도 지속적으로 확산될 수 없다.
기술을 공급하는 기업 역시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 기술 도입 농가는 초기 보조금으로 설비를 들여놓지만 유지보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고, 기업은 판매 이후 수익 구조가 없어 시장에서 철수한다. 스마트팜 초기 도입 사례는 이러한 구조적 실패를 대표적으로 보여 준다. 정부 지원으로 설치된 스마트팜 상당수가 고장 이후 방치되었고, 부품 수급과 A/S 인력 부재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농가에는 빚만 남고 기술은 폐기물처럼 남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기술 중심 담론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가리지 못한다. 기술은 농업을 혁신하는 자동 장치가 아니라, 시장·수익·유지 생태계가 있을 때만 살아남는 조건부 시스템이다.
품종 다양성의 붕괴가 기술까지 무력화한다
기술의 경제성을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품종 다양성 부족이다. 특정 품목의 가격이 상승하면 전국적으로 재배 면적이 급증하고, 2~3년 후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는 단순히 정보 부족이나 농가 의사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품종이 시스템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부재한 구조적 문제다.
샤인머스캣은 이 구조의 전형적 사례다. 고가 프리미엄 시장에서 출발했지만 전국적 재배 붐 이후 가격이 급락했고, 농가는 품질 유지 기술을 지속할 동력을 잃었다. 품질은 빠르게 하락했고, 기술과 설비는 유지되지 못했다. 결국 “가격 폭등 → 과잉 생산 → 폭락 → 기술 포기 → 품질 하락”이라는 악순환이 시장 전체를 무너뜨렸다.
양파·마늘·배추·대파 등 반복되는 품목 쏠림 현상은 기술 도입의 효과를 무력화할 뿐 아니라, 기술을 유지할 경제적 기반 자체를 사라지게 만든다. 품종 다양성이 무너지면 기술도 설 자리를 잃는다.
생태계를 잃는 순간 기술은 농가 부채로 남아

한국 농업이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기술 중심 담론을 넘어 기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생태계를 정책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지탱할 구조가 필요한 것이다.
기업, 농가, 정부의 역할도 재정의되어야 한다. 기술 기업은 한국 농업에 적합한 모듈형 저비용 기술 개발과 더불어 농촌진흥청과 협력한 기술 표준화를 추진해 시장 파편화를 줄여야 한다. 농가는 개별 도입이 아니라 지역 단위 영농조합을 통해 기술을 공동 구매·운영함으로써 유지 비용을 낮춰야 한다. 정부는 기술 도입 농가의 초기 리스크를 줄이는 기술 보증 펀드를 조성하고, 기업이 장기 A/S를 제공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시장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수익 구조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일정 수준의 친환경·기후 대응 기술을 도입한 농산물에 대해 정부가 일반 수매가보다 높은 보상 가격을 적용하는 환경·기술 보상 가격 제도, 지역별 생산량 조정과 수출형 품종 전략 구축을 통한 품종 다양성 정책, 그리고 가격 폭락을 예방하는 수요 기반 재배 체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기술은 농업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요소일 수 있지만, 기술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기술은 생태계를 가진 산업에서만 기능하고, 생태계를 잃는 순간 기술은 농가의 부담이 된다.
지속가능한 농업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것에서 시작
기후위기 시대의 농업은 기술로만 해결될 수 없다. 기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장, 기업, 품종, 수익 구조가 함께 작동하는 종합 생태계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 농업은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기술이 살아갈 생태계가 없는” 구조적 모순에 놓여 있다.
이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한국 농업은 기후위기보다 먼저 생태계 부재로 인한 구조적 붕괴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가 수년째 문제 인식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실질적인 실행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농업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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