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금요특강ㅣ전영우 교수ㅣ숲과 한국 문화

최종 수정일: 6월 10일

 

2024.03.08


 

숲과 한국 문화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창재 원장님께서 저한테 부여한 주제가 숲과 한국 문화입니다. 하필이면 이 주제를 저한테 주셨을까? 플래넷03에서 숲이란 용어를 썼지만 12주 강의 중에 숲이란 용어가 들어간 주제를 발표한 분들은 별로 많지 않았어요. 다 산림이지. 각별히 생각하셔서 저한테 이런 강의 기회를 주셨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24~25년 전에 정확히는 3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산림 용어에 익숙해 있을 때, '숲' 용어를 썼고, 여기 계신 이수용 사장님 덕분에 『숲과 한국문화』를 펴낼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책은 2004년에 일본 동경에 있는 국사관행에서 일본 판으로 출판되었고, 2010년 유프로(IUFRO, 국제임업연구기관연맹) 세계총회를 기해서 한국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 책보다는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해서, 기후 위기의 시대, 생태 위기의 시대, 우리 숲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 본다는 관점에서 과거의 숲을 말면서 미래의 숲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소금(자염), 경복궁, 조운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소나무입니다. 저 세 가지는 소나무를 땔감으로 해서, 건축재로, 조선제로 해서 우리들은 살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저는 지난 30여 년 동안 소나무에 이른바 몰입해서 1993년부터 책을 펴내고, 2002년부터 2년 전까지 소나무와 관계되는 여러 책들을 써냈습니다. 점선은 공동 저작이고 실선은 제 단독 저술입니다. 그래서 소나무에 대해서는 여러분께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고, 따라서 우리 문화의 소나무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가도 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내용은 농경사회를 지탱한 소나무 숲부터,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1.    농경사회를 지탱한 소나무 숲


소나무 숲이 어떻게 농경사회를 지탱했는가? 우선 조선 시대를 살펴보면 우리는 다른 답을 얻을 수 없을 만큼 소나무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사회였습니다. 1910년도 한일병합이 되기 전에 조선통감부는 3월부터 7월까지 조선 전역의 산림에 대해서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수종 구성은 어떤가 예를 들면 구체적인 건 못 밝히더라도 활엽수인가, 소나무인가, 소나무 외의 침엽수인가를 밝혀냈습니다. 조선 시대 누가 어떤 산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1910년 숲은 단숨에 자라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저 기록을 통해 조선 말기 산림 상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아주 큰 용량의 디지털 자료를 뽑아서 낸 겁니다. 우리나라 국립산림과학원은 이 자료를 가지고 아주 재미난 데이터를 도출했어요. 가운데 것은 소나무 숲의 분포 지역을 나타내는 거고, 저것은 언어 지도로 앞에 보여 드렸던 지도를 가지고 조선 시대 때 어떤 숲이 있었는가를 보여 주고, 맨 오른쪽에 있는 것은 활엽수들은 산악지방과 북한지방에 북쪽지방에 많았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남부 지방, 해안가, 북부 지방의 해안가 지방, 개마고원 일대가 전부 초록색 소나무 숲이 차지한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소나무 숲은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한반도 저지대의 대부분에 분포하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죠.

2002년에 정치영 선생이 조선 후기의 인구를 지역별로 분류해 인구 밀도까지 나타낸 지도를 보면, 해안가 주변 지역들의 인구가 밀집하고 또 남부지방의 곳곳이 인구가 밀집함을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경작지 면적도 해안가 주변과 남부지방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놀랍게도 그와 유사하게 소나무 숲들도 인구가 밀집한 지역 경작지 주변 남부지방 해안가 곳곳에 다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조선 시대 소나무 숲이 어디에 있었고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인구 비율은 1678년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6%가 살았고 1726년의 경우에는 약 25% 정도가 살았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구의 4분의 3은 소나무와 밀접한 지역에서 살아 왔다고도 거칠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사회의 농경사회를 지탱한 임산자원은 대부분 소나무 숲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나무도 썼죠. 그렇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농경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작지가 있어야 됩니다. 조선은 건국 시기 인구가 570여만 명에서 차츰 늘어나서 1700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늘어나는 입의 수만큼 경작지가 늘어야 되고, 그 경작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토양 비옥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임상 유기물, 이른바 낙엽, 낙지(떨어진 가지), 잎을 끌어 모아서 퇴비로 만들어야 합니다. 불을 뗀 재와 사람의 똥, 가축의 똥오줌을 가지고 퇴비를 만들어서 지력을 유지해야 되죠. 그래서 인가나 마을 주변의 숲들은 점차 계속해서 임상 유기물을 끌어다 쓰게 되고, 결국 산림토양의 질이 나빠졌습니다. 나빠진 산림토양에서는 일반 활엽수들은 자랄 수 없고,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활엽수 숲은 점차 도태되고 점차 주변의 숲은 소나무 숲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게 소나무 단순림 구조가 되었다고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죠.

조선은 건국하자마자 소나무 관련 강력한 정책을 시행합니다. 왜? 재정을 뒷받침하는 세곡 운반선은 소나무로 만든 좋은 배였습니다. 오늘날엔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세금도 내고 다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기차도 없었습니다. 국가 재정을 충당할 길은 오직 각 지역마다 농민이 낸 쌀이라는 세금을 강이나 바다를 통해서 배로 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운선, 세곡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재를 확보하는 것이 나라의 건강한 재정을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세곡 운반선은 다른 나무로는 못 만들었어요. 오직 소나무로만 만들었어요.

두 번째 외침을 맞는 전남은 거북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선과 판옥선도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재정, 국가의 안정, 이걸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 소나무였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세 번째로 조선에 와서는 건축재도 마땅한 게 없었습니다. 고려 때만 해도 느티나무나 다른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를 썼지만, 인가 주변의 굵은 활엽수들은 이미 다 베어졌고, 남은 것은 소나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궁궐 건축재는 무엇으로 가지고 썼다? 소나무로 건축재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소나무가 없으면 궁궐조차도 옳게 지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조선은 강력하게 소나무 보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통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가능하면 주자 가례를 백성들한테 주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이 유교식 매장 문화 장려였습니다. 이른바 죽음을 관과 곽에 넣어서 땅에 매장하는 것을 국가에서 강력한 정책으로 시행했는데, 그 관제는 오직 소나무만 쓰게 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천 가지 나무들이 조선반도에서 자랐지만, 오직 소나무만 중요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세종은 ‘송목양성병선수호조건(松木養盛兵船守護條件)’이라 해서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아주 강력한 규정을 만들었고, 1808년까지 산림과 관련 법령들은 대부분 소나무와 관련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산림 정책은 오직 소나무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입니다. 공조산림조의 조선의 산림은 오직 소나무 한 가지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듯, 조선 초기부터 소나무는 함부로 벨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금송 또는 송금은 베지 말아야 할 소나무를 지키자는 말입니다. 소나무 행정인 송정, 모두 의송지지라든지, 연해금산이라든지, 의송산이라든지, 송전이라든지, 봉산을 지정한 이 모든 일들에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왜? 배를 만들고 궁궐을 만들고 관자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2.    소나무가 농경사회에 끼친 영향


그럼 이렇게 써 왔던 조선의 소나무 숲은 어떻게 변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선 인구가 많은 한양에서부터 헐벗기 시작한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임진왜란과 또 잠시 뒤에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부터는 도성 내외 산림이 민둥산이 계속되고 있다는 기사들이 나오고, 1710년에 이르러서는 도성의 백악산, 인왕산, 남산, 타락산, 이 네 개의 산들이 전부 다 헐벗고 민둥산으로 변해 산사태가 일어난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한반도 산림이 대부분 수탈되고 산림자원이 다 날아갔다고, 저부터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일제가 수탈해 간 것도 일부 있지만은 그 일은 1700년대부터 조선에서 시작되었음을 이 기회에 기억해 두세요.



당시 모습을 담은 대표 사진이 1905년 오스트렐리아 사진 작가 조지 로스가 찍은 것입니다. 헐벗은 인왕산의 모습과 저 뒤에 북한산, 보현봉, 문수봉 등의 능선들을 보시면 나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헐벗은 민둥산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일제가 저 때는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던 때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886년 퍼시벌 로웰은 고종의 사진도 찍은 분일 것 같아요. 지금도 있는 홍지문, 탕춘대 성곽 주변의 헐벗은 북한산의 모습입니다. 조선 시대 남쪽 인구 밀집 지역의 산림은 대부분 헐벗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왜 헐벗었는가? 그렇게 많은 소나무와 관련된 법을 규칙을 제정했는데 조선은 왜 숲을 지키지 못했는가?



무악재 주변입니다. 허버트 폰팅이 1903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오늘날 마치 이란의 모습을 보는 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정조 시대의 한양은 『조선왕조실록』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경산은 서울에 있는 산, 주변 산입니다. 영조는 '경산의 소나무는 사대부 때문에 모두 없어질 것이다. 내가 저 바깥 사저에 있을 적에 이를 들어서 알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계속 이른바 양반 권세가들이 서울 주변의 숲을 결단내고 있다는 이야기죠. 더욱 놀라운 것은 1740년에 “예전에는 서울 한양에서 30~40리만 가도 나무를 해 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70~80리를 가야 겨우 땔감을 취할 수 있다.” 이때는 소빙기의 언저리에 있어서 겨울이 아주 추웠습니다. 그래서 온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754년에 도성 사산(四山, 네 개의 산) 관리를 위해서 참군 제도를 도입했는데 그 이유는 사산에서 유출된 토사로 인해서 청계천이 물난리가 발생했습니다. 영조는 '사산을 더 이상은 훼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군대를 동원을 해서 좀 지켜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1760년에 마침내 청계천을 준설합니다. 남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민가를 덮친 기사도 보입니다. 초창기 백악산, 인왕산, 목멱산, 탈악산이라고 표시해 둔 곳만 서울의 사산이었지만, 서울의 영역은 점차 넓어져서 영조 때에는 조선 후기 성저십리까지 확장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사산의 범위는 오늘날 서울 경계가 있는 대조리, 우의동, 수유현 이런 데까지 넓어집니다. 그래서 각 구역마다 군대를 동원해서 남산은 금위영, 그 다음에 훈련도감, 어영청 등등이 서울 주변 산들을 보호하게 하지만 옳게 지키지는 못합니다.

하도 남산 주변이 사라지니까 정조는 1796년부터 남산 바깥쪽 남산, 외 남산 구역을 지키고자 99년 동안 아주 엄격한 규칙을 하나 정합니다. 『승정원일기』가 다 번역이 되지 않아서, 근래 제가 찾아 보고한 내용입니다. 해마다 봄, 가을에 저 남대문에서부터 청학정, 전생서, 남단, 이태원, 안봉·복병헌(매봉산 버티고개), 오늘날 버티고개를 지나서 사한단(옥수동 8번지), 무학봉까지 매년 봄가을에 남산의 소나무 숲이 어떤 형태인가, 심은 나무들의 모습이 어떻게 자랐는가를 보고했고, 그 보고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남산의 숲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한양 주변만이 아닙니다. 산림 황폐는 경기도, 황해도, 서해안, 영남으로 확산하고 국가 재정 운용의 필수적인 조선재를 더 이상 조달할 수 없는 산림자원 고갈 상태에 이릅니다. 충청도와 전라도, 연해 각처의 국가 지정 소나무 조선재 보호림(봉산), 이 산이 헐벗었다고 정조는 『정조실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역시 비슷한 시기에 해마다 5년마다 한 번씩 만든 배를 보수하고 10년이면 새롭게 만들어야 되는데 그걸 나무가 없어서 더 이상 지킬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연해에 있는 소나무 숲들이 전부 다 황폐해지고 고갈됨으로 조선재를 더 이상 충당할 수 없게 된다는 그런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때 민둥산과 여기 동탁이라는 것은 역시 헐벗은 산을 뜻합니다.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는 영조 숙종 때부터 영조 정조, 그다음에 순종 시기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죠. 이건 특히 조선 후기 소빙기의 영향 때문에 몬도극소기(1645~1715)가 있고 달톤극소기(1790~1830)가 있는데 우리 역사에 경신대기근,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하죠, 그 다음에 을병대기근, 저런 시기에 점차 왕실은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산림을 사점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점차 산에 들어가서 개간함으로 해서 나무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권문과 각각의 권세가 산림을 훼손해서 그걸 팔아먹었고, 산은 더욱 더 황폐해졌습니다. 1800년대 전후에 산림 황폐가 최고조에 도달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연료를 어떻게 공급할 건가? 하는 기사들 또는 사진들이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점선은 인구 증가의 선을 나타내는 겁니다. 573만 명에서 1843만 명에 이르기까지 1800년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산림 면적은 감소하고, 1인당 이용할 수 있는 입목 축적의 양은 더욱 더 줄어듭니다. 그래서 1 이하로 떨어지는 시기는 이른바 지속가능성이 훼손되는 시기로서 이제 사회의 붕괴 조짐을 볼 수 있는 시기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런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게 1700년부터 1800년에 이르는 시기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당시 목재값이 어떻게 요동을 쳤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시 『조선왕조실록』이라든지 『승정원일기』에 관 가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1500년 전후에는 실록에는 관 하나를 맞추는데 16냥이나 20냥했다고 합니다. 한 냥의 가격은 오늘날 한 5만 원 정도되는 가격입니다. 1677년도 한 냥의 단가는 5배, 3배, 4배 오릅니다. 60량으로 오릅니다. 뭐 때문에? 산림자원, 소나무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753년에 하급품 관가는 60냥, 하지만 중급품은 100냥, 상급품의 관가는 200냥에 달했다고, 1753년에 영조에게 이 공납하던 공인들이 하소연을 담은 상소를 올립니다. 시장가는 3배나 더 비싼데 정부에서는 3분의 1 값밖에 주지 않는다는 상소들을 모아 놓은 책이 『공패』라는 책입니다. 영조가 엮은 책입니다. 그 책의 기록 때문에 당시 관 하나의 가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755년 노상추라는 무신이 67년 동안 일기를 써서 구체적으로 여러 내용을 밝혔는데, 그중에 관을 100냥에 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02년 정약전은 오늘날 흑산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송정사의』를 쓰는데, 거기에 양반이 400냥, 500냥 되는 관을 장만하지 못해서 면이나 짚에 싸서 묻는다, 초장을 지낸다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왜 관값이 이렇게 비싸게 되었을까요? 몇 십 년, 100년 사이에 서너 배 오르는 이유는 산림자원 소나무가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것은 당시 관 가격이 얼마나 했는가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지난 연말에 조선 후기 한성부 토지 가옥 매매 문서를 번역해 내면서 알려진 게 있습니다. 여기가 종묘입니다. 저 견평방 회화정동이라는 오늘날 종로구 공평동 일원에 건평 72평, 대지 22평의 가격이 320냥이었습니다. 저 가옥 가격이 320냥이었는데 상품관 하나의 가격이 200냥이었습니다.

또 1753년 비슷한 시기입니다. 관 값이 60냥, 100냥, 200냥 했을 때 왕십리 천변에 밭 4두락 이른바 600평의 거래 가격은 50냥이었다. 1759년 경상도 봉화에 3두락을 27냥에 팔고 있습니다. 양반들은 채면을 세우기 위해 몇 백 냥의 관을 살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못한 대다수 인민, 백성, 서민들은 거적대기에 쌓여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아무리 성리학적 통치 이념으로 주자가례를 장례 의식으로 장려해도 저와 같은 상황에서는 관을 감히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 소나무 숲이 다 사라졌는가? 인구는 늘고, 산림 축적의 임목 축적량은 점차 줄어서 입니다. 임목 축적량이 줄지 않으려면 자꾸 나무를 심어 줘야 되는데, 불행히도 조선은 나무 심는 적절한 방법을 몰랐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무슨 소리냐? 현륭원에 1200만 그루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서 심었다는데 말입니다. 이면을 보면, 소나무를 심어서 기를 방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광해군은 “남산 소나무는 북산의 소나무가 되고, 북산 소나무는 남산의 소나무가 되었네. 날마다 옮겨 심어 끝날 날이 없으니 산 나무가 죽은 나무가 되었네.”라고 합니다. 자라고 있는 나무를 산에서 캐다가 다른 곳에 심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하는 걸, 1510년에 문구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은 숙종, 정조, 고종 때에도 변함없이 이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은 양묘 방법을 옳게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조림 방법을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나무 조선재, 건축재, 관곽재 수요는 급증하였지만 수요를 뒷받침할 소나무 양묘 조림 방법은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아는 오늘날 양묘 방법입니다. 흙 속에 좀 묻어두었다가 겨울을 넘기고 봄에 저렇게 파종하면 1년생 파종묘, 2년생 파종묘를 길러낼 수 있는데, 조선 시대는 저 방법을 안타깝게도 몰랐습니다. 뽕나무 양묘 방법은 알았기 때문에 누에를 칠 수 있는 뽕나무는 계속해서 번식시키고 장려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문제죠. 그래서 조선의 상류층 이른바 권세가들이 나무나 숲에 대해서 무신경했다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있습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현륭원을ㅡ오늘날 융릉이라고 불리우는 수원 화성에 있는 능이죠. 건릉은 바로 옆에 있는 정조의 능이죠.ㅡ조성하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현륭원원소도감의궤』, 『현륭원등록』, 『원소정례』 등등에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고 인부를 몇이나 썼고 인건비를 얼마나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정조 임금이 '11년에 걸쳐서 현륭원의 나무를 심었는데 서류가 우마차로 한 마차다. 이걸 좀 보기 좋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다오.'라고 미션을 줬더니, 오늘날 엑셀 표처럼 정리해서 1200만 9772주를 심었다고 보고한 내용이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느 지역의 나무를 어디에 심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게 오늘날 융릉과 건릉에 조성된 소나무 숲들입니다. 이른바 정조가 인부들을 동원해서 심었던 나무들이죠. 거기에 참나무도 심었습니다.

현륭원은 전체 면적이 한 1000ha라고 했을 때, 길과 하천과 시설이 있던 곳을 빼면 한 600h에 나무를 심을 수 있는데, 1200만 그루를 나무를 심었다니, 그렇게나 많이 심었을까요? 오늘날 ha 당 3천 그루를 심는다면, 180만 본만 필요한 건데 1200만 그루를 심었다고 기록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심었겠는가? 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누구도 왜라고 묻지를 않았습니다. 왜 역사학계에서는 묻지도 않았고, 산림학교도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대답은 양묘법이 없어서 주변에 있는 산에서 큰 나무를 캐다가 심었습니다. 세 그루, 네 그루, 다섯 그루를 심어도 한 그루밖에 살아남지 않는 생존율 때문에 300~400만 그루만 심어야 될 걸 1200만 그루나 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밝혀졌지요. 양성한 묘목을 산에 갖다 심으면 되는데, 당시에는 그 방법이 몰랐습니다. 큰 나무를 옮겨 심었도 자꾸 죽으니까, 정조가 “대토를 해라. 뿌리에 흙이 붙어 있게 해서 파다가 심어라.”라고 했지만, 역시 활착률이 좋지 못했습니다. 양묘법 또는 조림법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해서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어땠을까요? 양묘법이 개발이 되어서 양묘업자가 말이나 배에 실어서 전국 각지로 삼나무와 편백 묘목을 실어 날랐습니다. 요시노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육림 기술을 확립했고, 규슈 지방은 산목해서 땅에 그대로 꽂아버리면 숲이 조성되는 그런 방법까지도 발전했습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조립 양묘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사실이죠.



두 번째 저는 옳은 목공 도구가 없어서 주구장창 소나무만 쓰고자 했기 때문에 우리 산림은 더욱 더 훼손되었다. 자원은 고갈되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우리 처음 700년대 후반부에 그려진 아주 큰 그림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평성시도>의 일부로 집짓는 모습입니다. 저 왼쪽 아래쪽에는 판재를 만드는 자귀질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오른쪽 가운데는 판자를 만들고 있는 잉거톱의 모습이 보입니다. 세 사람이 당기고 한 사람이 밀면서 나무의 판자를 짜개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역시 통나무를 내고 판지를 내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중기도 없었을 뿐만 아니고 트럭도 없었고, 무거운 목재는 겨우 배로 운반할 수밖에 없어서 북부지방의 울창한 산림을 사용할 수가 없었고, 그 다음에 물레방아용 큰 회전식 톱이 없었습니다.

유럽은 그런 게 있어서 참나무를 가지고 집을 지었지만, 조선은 아주 강한 재질의 특성을 가진 참나무를 건축재로 옳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정은 200년이 흐른 1900년 초에도,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주 계량 톱을 만들어서 계량 톱으로 판재를 켜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기 톱날를 갈고 있는 줄 장인 모습도, 톱날이 무뎌지면 톱날 장인이 톱날을 갈고 저렇게 널찍한 판자를 아래쪽에서도 한 사람이 켜고 있고 위쪽에서도 한 사람이 켜고 있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오래된 건축물에 가면 마루판부터 봅니다. 흔히 전통 건축학자들은 추녀선이 아름답다, 멋지게 내리 꽂혔다고 이야기하는데, 산림학자는 도리어 고개를 수그리고 마룻장 밑바닥부터 봅니다. 이유는 마루 위판은 대패질로 해서 반반한지 몰라도 마루 아래판은 저렇게 울퉁불퉁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마루판을 톱으로 반듯하게 자르는데, 왜 옛날은 저렇게 울퉁불퉁한 마루판이었을까요? 톱이 없었기 때문에, 동력톱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잉거장을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임을 줘야 했기 때문에, 정부의 건영 연금건축물조차도 토벌 잉거장을 쓰지 못해서 전부 다 자귀질로 짜갠 판재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건물은 요 근래 복원한 건물임을 알 수 있겠죠. 그죠? 왜 아래쪽 마루판이 판판하기 때문에 기계 톱날로 캐낸 판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경회루를 자세히 보면 아래 쪽은 울퉁불퉁한 청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잉거톱으로 자른 것이 아니죠. 숭례문 역시 마루판 잉거장이 톱날로 자른 것이 아니고 쐐기로 짜개서 자귀질로, 대패로 다듬었음을 증언합니다.

재미난 것은 이런 마루판을 보면 그 당시의 산림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00년대 초에 건립된 건물에 놓은 마루판는 넓고 두꺼운데, 1850년대에 놓은 마루판은 좁고 얇습니다. 왜 그렇겠는가? 자원이 풍부했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는 거죠. 골동품상에서 마루판도 골동품으로 팔고 있습니다. 저는 아는 골동품상에 전화해서 이런 이런 목적으로 마루판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주인이 학문적으로 쓴다니까 선물하겠다고 줘서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마루판의 두께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 제각각입니다. 자귀로 짜개서 한쪽은 자귀질로 듬성듬성하게 다듬었죠. 이것은 아래쪽에 들어갈 부분이죠. 위쪽은 대패질로 팽팽하게 다듬습니다.

조선 후기 제재 도구는 17세기에서 19세기 300년 동안 변함이 없었습니다. 옳은 톱이 없었기 때문에 원목에 쐐기를 박아서 짜개서 자귀질, 대피질을 해서 썼습니다. 판재로 제작하기에는 잉거장의 노임이 너무 비쌌습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만들지 못한 제재용 톱 흔히 잉거톱이 기여했습니다. 재정이 튼튼한 시기의 국가조차 건축물의 마루판을 톱으로 켠 판재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대원군이 만든 경회루, 그리고 숭례문, 남대문 사례를 보여드렸죠. 이 제재톱은 중국에서 들여 온 것입니다. 학자들은 1400년대 말부터 중국에서 들어왔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20세기도 저런 톱을 사용했는데, 중국에서 톱들이 들어와 꽤 많이 보급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배희한'이라는 일제 초기에서부터 1997년까지 대목수를 하신 분이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 구술한 내용입니다. 톱이 없어서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쇠를 두들겨 얇고 길게 만든 철판을 목수들은 사다가 직접 철판 몸체를 얇게 갈아서 편편하게 만든 후에 줄이나 징으로 톱니를 만들어서 탕개톱 이른바 잉거톱을 사용했지만, 열처리 부족으로 톱니가 금방 무너지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1~2월 숲과 문화에, 조선에서는 제재형 톱을 만들지 않았을 거다, 중국에서 아주 비싸게 사서 들어왔기 때문에 제대로 보급되지 못했다는 증거 자료를 여러 건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제대로 된 도구가 없었습니다. 도구만 있었더라면 다른 나무를 쓸 수 있었을 건데, 그래서 소나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해야 될 이른바 배운 학자층, 권세가, 양반, 권력층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숲은 헐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나무는 우리 농경사회를 유지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3. 소나무의 물질적 유용성을 나타내는 사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 사례가 선박 건조, 궁궐 축조, 관재, 도자기, 소금 등이 있습니다. 도자기하고 소금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한번 보시죠. 변산의 솔 숲은 조선재 기지였습니다. 이건 고려 시대부터 이미 익히 알려진 유명한 소나무 산지였습니다. 이런 걸 평저선이라고 하죠. 우리 말로는 '한선'이라고 합니다. 바닥이 낮은 배는 서해안의 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곳, 강바닥 하상이 낮은 곳에 드나들 수 있는 배였죠. 그래서 우리는 저렇게 바닥이 낮은 배를 만들었고 그런 배의 설계도가 있고 그 배는 몇 그루의 소나무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게 연구 결과로 나와 있습니다. 판옥선은 조금만 변형시키면 거북선이 되죠.

그 다음에 안면도 소나무 숲은 궁실용 소나무였다고 하는 것 동국여지지에 나타나 있고, 보시는 바와 같이 서해안 지방에 쉽게 볼 수 없는 쪽에 곧은 질 좋은 소나무 숲이 이뤄져 있습니다. 저 곳은 산이 높지 않고 사면이 바로 바다여서 베어서 옮기기 쉽고 물길로 이용해서 개성이나 한양이나 화성으로 옮기기 쉬웠기 때문에 소나무 건축재 생산 기지였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면도 소나무를 가지고 지은 화성이나 또는 창덕궁 인정전의 모습입니다.

울진 소광리에 가면 오늘날도 이렇게 질 좋은 소나무들이 몸통 속이 꽉 찬 이른바 황장목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로 ‘황장봉계지명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 사회 산직 맹길(黃腸封界地名生達峴安一王山大里堂城四回 山直命吉, 황장봉산의 경계지는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으로 정하고 산직 길에게 지키도록 하였다.)’이라는 표석이 자연석 위에 새겨진 돌이 있습니다. 이 주변 일대는 이른바 생달현(生達峴)에서 안일왕산(安一王山)까지 전부 다 임금의, 왕족의 관곽재(재궁)이니까 함부로 이 소나무를 베면 안 된다고 표시해 둔 거죠. 임금이 죽으면 황장목을 가지고 재궁(梓宮)을 만들었는데 그 재궁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 기사들은 여기 보시는 바와 같이 1919년, 1926년에 제국을 모시고 가는 다시 말하면 황장목으로 만들어 모시고 가는 그림입니다. 관이 마침내 최초로 2005년에 창덕궁 의풍각에서 일반에게 공개가 되었습니다. 유흥준 청장이 설명하는 날 조연환 산림청장이 전화하셔서 정 교수 꼭 가서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하고 필요한 사진을 좀 찍어 놔 달라고 해서, 저는 현장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조선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국가 장례 예법에 모든 관은 소나무로 만든다고 예시했습니다. 특히 성종 때 제정한 『국조오례의』라고 하는 국가장례예법에는 소나무 관 사용을 규범화하고 있습니다. 또 1788년 『춘관통고』에도 소나무관 사용을 준수하도록 예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국조오례의』 흉례에는 '관을 만든다. 대부의 관, 선비의 관, 서인의 관은 장례식 때 이렇게 준비해라.'라고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시신을 넣는 안에 관이 있고 그 관을 감싸는 곽이 있습니다. 관곽의 모습입니다.

이제 연료로서 소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도자기를 굽는 데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땔감이었습니다. 황사라고 일컫는 얇게 자른 장작이라야 백자를 구울 높은 온도를 냅니다. 동시에 원하지 않는 티끌 이른바 납, 중금속과 같은 성분이 소나무에는 없기 때문에 백자 표면을 순백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조선 백자는 오직 연료를 소나무를 가지고, 영사라고 일컫는 소나무를 가지고 구웠습니다.

모든 초식 동물은 인간을 포함해서 소금을 섭취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섭취해서 문제입니다만, 조선 시대 역시 소금 섭취는 필요했습니다. 1907년 천일염이 생산되기 이전에 조선의 모든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들었는가? 저와 같은 함수를 쓰레질하고 증발시켜서 염분 농도를 높였고, 높은 염분 농도 하에 그 물을 길어다가 저렇게 진흙으로 만든 솥이나 쇠솥에 넣어 물을 끓였습니다. 소금 1kg을 생산하려면 소나무 2kg을 뗐습니다. 왕족들에게 소금 이권이 첨예했는데, 국가 재정이 어려워져서 왕족들은 소금 굽기 위한 연료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서해안 바닷가의 소나무 숲은 조선재로 쓸 것인가, 연료로 쓸 것인가가 경쟁이 첨예했습니다. 권력가들은 사익을 위해서 조선재보다는 연료로, 땔감으로 쓰는 데 이용했습니다. 숲은 점점 고갈되었고 조선재 확보는 점점 더 어려웠습니다.

어릴 적 배고프면 이른바 구황식품으로 송기떡을 먹었습니다. 소나무 형성층을 찧어서 보릿가루, 겨 가루와 섞어서 떡을 만들었습니다. 저게 없었으면 춘궁기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재미나는 것은 1787년 통영 주변의 산림에서 피해가 일어나서 정조 임금이 전체 산림을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조사 결과 여기 빨간 줄 쳐져 있는 63%, 2만8284그루 중에 1만7859그루가 그 피, 형성층을 벗겨내는 피해로 나무들이 죽었다는 보고서가 올라옵니다. 송기떡을 만들려고 그랬지요.

우리 조상들은 왜 소나무로 배를 만들고 궁궐을 축조하고 관재로 사용하고 도자기와 소금을 굽고 송기떡을 만들었을까요? 소나무는 주변에서 쉽게 많이 구할 수 있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최고라고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저러한 목적에, 이 땅의 천 가지 나무들 중에서 최선, 최적의 나무였습니다.


4. 소나무의 물질적 유용성이 끼친 영향, 상징과 경관


소나무의 물질적 유용성이 우리 선조들의 머릿속에 상징 체계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계수와 우주수로, 또는 생명의 나무로 <일월오악도>, 배경을 보면 오직 달, 해, 바다, 물이 있는데, 살아 있는 나무로서 소나무가 있죠. 여기까지 오래 사는 기물 중에 소나무가 자리 잡았고, 절조와 기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풍유를 상징하기도 하고, 살아 있는 좋은 땅인 길지로서 문화경관으로 자리 잡기도 하죠. 무덤 주변에도 심었죠. 신라의 최치원이 이미 무덤 주변에 심으라 할 때부터 하나의 풍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소나무를 뭐라고 부르죠? 사장님께서 대표님이 상 주실 겁니다. 아까 소나무라고 많이 답하셨는데 예 저분께 꼭 '다복송'이라고 했죠. 전라도도 경상도도 그 다음에 이제 살아 있는 사람의 거처 주변에도 소나무는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고 해서 심었죠. 마을 주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궁궐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88년도 창덕궁 이른바 우리가 흔히 비원이라고 부르는 후원 뒤편의 소요정과 옥류천 주변은 저렇게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는데, 오늘날은 전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 1920년대에 들어온 솔잎 혹파리 때문에 사라졌다는 게 국립산림과학원의 보고서 내용입니다. 사라지는 소나무들을 조금씩 엮고 있습니다만, 옛날 동대문 청량리 쪽 또는 수원으로 가던 길 주변은 낙락장송의 소나무 가로수길이었습니다.


5.  소나무와 오늘날 한국인의 삶


오늘날 소나무는 어떻게 한국인의 삶에 투영되고 있을까? 우리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외부에 강의하면 호주머니에서 꾸역꾸역 꺼내는데, 오늘 여러분들은 식견이 높아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호주머니 속에 1만 원짜리가 없어서 아무도 안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월오악도>가 1만 원권 안에 있죠? 2006년에 18년 전에 문공부에서 100대 민족 문화 상징을 제정했는데 유일하게 식물로는 소나무가 들어갔습니다. 사찰의 들머리에 있는데, 통도사 무풍한송의 소나무길입니다. 화폐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이고 사회 체계를 지탱하는 상징 권력인데 왜 소나무가 도안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 이 땅에 살고 있는 4천여 식물 중에 소나무가 왜 100대 민족문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 사찰 들머리 입구에 소나무 숲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문화를 나무와 관련된 우리 문화를, 소나무와 관련된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겠죠.

소나무한테? 벼슬을 주었습니다. 옛날 모습입니다. 정이품이라고 하는 오늘날 장관급 벼슬을 주었죠. 이 나무하고 삼척에 있는 준경묘 미인송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산림청에서 연락이 와서 새벽까지 저는 차를 몰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 날 이런 기사가 실렸어요. 혼례가 있었다. 사회면에 이런 기사를 다룰 만큼 중요했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어쨌든 언론은 이 기사를 받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 정이품소나무는 근처에 정부인송이 있는데 왜 외도를 한 것이 아닌가, 주민들이 뿔이 났다고 하는 기사가 역시 신문에 올랐어요. 1년 지난 뒤에 조강지처 품으로 돌아온 정이품 송이라는 기사가 다시 났어요. 도대체 소나무가 무엇이길래 우리 사회는 이렇게 반응할까? 저처럼 소나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런 걸 유심히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되돌아가서 정이품 소나무의 배필이 있는 곳이 준경묘 태조 이성계의 5대 조가 묻힌 곳이라고 알려져 있죠. 가운데 신순우 산림청장께서 제가 혼례를 주관하고 보은군수와 삼척시장께서 혼주를 대표해서 참석하고 저기 삼척 여중학생이 신부가 되었고 남자 초등학생이 보은의 신랑이 되어서 두 소나무를 대신해서 혼례를 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나무가 이른바 쪽 곧고 임업적 가치가 뛰어난 나무라고 해서 정이품 송의 배필이 되는 미인송입니다. 꽃가루 받이를 하기 위해서는 등목부가 저 산 나무 꼭대기에 있는 소나무 위에 올라가서 꽃가루 받이를 해줘야 되죠. 이른바 첫날밤을 보내는 장면을 사람들이 넋을 잃고 보는 장면입니다. 도대체 소나무가 무엇이길래 산림청은 지난 행사를 벌리고 일을 진행하고 있을까?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석송령 소나무의 모습입니다. 부자 소나무로 알려져 있죠. 예천에 있는 나무입니다. 여기 보이는 이 건물들 토지들은 모두 이 소나무가 갖고 있는 겁니다. 저는 유별나서 25~26년 전에 예천군에 가서 옛날 등기부 등본을 찾아보니까 소화 2년에 석송령이라는 소나무한테 이수목이라고 하는 노인이 자기가 갖고 있는 토지를 물려준다고 하는 등기부 등본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어요. 예천군수는 매년 소나무 석송령한테 당신이 이만큼 토지를 갖고 있으니까 세금을 내라고 해서 석송령 소나무는 매년 뚜벅뚜벅 걸어서 세금을 내러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갈 수 없죠. 그래서 이제 석송계 계원들이 제사도 지내고 거기서 노는 토지 임대료를 가지고 옛날에는 장학금을 주다가 오늘날은 학생이 없어서 이른바 설 명절 때 찾아오는 고향 찾는 분들한테 식사 대접하는 데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도에 있는 운문사 처진소나무입니다. 이 소나무는 음력 3월 30일 재배가 돌아오는 날이 되면 막걸리 12말, 물 12말을 섞어서 매년 대접을 받죠. 뭡니까? 배서를 주고 재산을 주고 술 대접을 하는, 마치 사람처럼 여기는 친근한 이런 수목관을 소나무한테 여전히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저는 20주 동안 어디 신문사에 매주 전면 지면을 받아서 이호신 화백 한국화가하고 전국에 있는 소나무를 찾아서 연재를 한 적이 있는데 서산을 지나다가 안면도 가다가 멋진 소나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저 소나무 밑을 올라갔습니다. 재물이 있었는데 떡, 전, 막걸리 대신에 무엇입니까? 막대 알사탕, 초콜릿, 소주 한 병. 저는 그렇게 쓰면서 ‘애틋했다’라고 본 풍광을 신문에 글로 그렇게 썼습니다. 연결고리가 끊어진 줄 알았는데 면면히 소나무하고 우리는 여전히 연결고리를 이어가고 있더군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제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걸 여러분들께 사진으로 보여드립니다.


6.  사라지는 소나무 숲,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소나무는 궁을 복원하는 데 사용되고 있고, 오늘날 경복궁, 숭례문 또는 광화문 복원에 이 땅의 소나무들이 이용됩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역사를 통해서 소나무와 소나무 숲과 한국인의 삶, 우리 조상들의 삶을 반추해 봤습니다. 우리는 옳게 지키지 못해서 숲이 헐벗은 아주 극악무도한 상태까지 헐벗었고, 그 때문에 하층민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나를 함께 살펴봤습니다. 정리하면 소빙기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서, 산림 사유화로 왕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간이 참여하는 송계(松契)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왕실이 그걸 등한시하니, 전문가들이 양묘 기술이나 조림 기술을 옳게 만들지 못했고, 임산자원이 고갈되어 산림이 황폐되었다고 정리할 수가 있겠습니다.

21세기 플래닛03이 추구하는 길도 결국 지구 온난화를 대비하기 위해 숲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기후 위기 시대가 도래할 적에 과거를 교훈 삼아 우리 산림 정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 민과 언론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낼까를 고민하기 위해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나름 이해합니다. 민간 참여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민간이 어떻게 결속하고 어떤 네트워크로 국가의 산림 운용에 참여할지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전문가도 200년, 300년 해야 하는 기술 축적 과정에서 있을 시행착오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전향적인 인풋을 자꾸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숲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왜? 자연의 천이 속도에 따라서 임산연료를 더 이상 안 써서 사라집니다. 이제 수종은 점차 갱신되고 있고, 병해충 특히 재선충병 때문에 숲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기후 변화 때문에 2050년이 되면 남한에서는 소나무가 사라진다고 하는데, 저는 유전적 다양성 때문에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다고 봅니다. 오늘날 재선충병이 가장 화급한 도전할 과제입니다. 지난 36년간 소나무 1500만 그루를 베어냈습니다. 소나무를 팔고, 소나무 관련 강의하고, 책을 내온 저로서는 자괴감과 함께 책임을 느낍니다. 많은 환경론자들은 산불에 취약한 소나무 숲을 빨리 갱신하자고 합니다. 한 면은 맞습니다. 그 산림, 그 소나무 숲에서 삶의 터전을 잇는 산주의 입장을 생각하면 함부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자연을 특히 숲을 접근할 적에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야기의 끝입니다. 현존하고 있는 소나무 숲이라도 제대로 좀 지키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림청도 분발해야 합니다. 지자체에 대한 관리 감독의 기능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전통 문화 경관은 한 번 없어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이 경관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목조 문화재들 대부분은 소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문화재 복원의 원칙은 그 만든 나무로 복원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래서 소나무 숲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까불었죠. 인간은 숲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카를로비츠(Hans Carl von Carlowitz, 1645~1714)는 독일 조림 경제학을 하며, 이른바 '지속가능성' 개념을 제일 먼저 발굴한 사람입니다. 산림에서 지속가능성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현대문명의 만능 열쇠처럼 아무 곳이나 지속가능성을 붙이는데, 저는 회의적입니다. 도리어 전 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1990년 8000Mtoe였다가 2020년 1만4000Mtoe입니다. 놀랄 정도로 화석연료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정보 축적량은 2015년 이후에 생성된 데이터가 90%나 됩니다. 오늘날 일주일 동안 생산되는 정보의 양은 인류가 지난 2천년 동안 생산한 정보의 양과 맞먹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인가? '산림이 인간을 지속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캐나다 생태학자 하몬드가 주장했습니다. 길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생각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습니다. 점점 따뜻해지는 개구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죠. 지난 수천 년 동안 제공되어 온 소나무의 물질적 효용은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적 특성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생명과 장생, 절조와 기개, 탈속과 풍유, 생계와 일상 등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형상화되는 것은 소나무의 물질적 유용성 덕분이다. 한국의 풍토성을 간직한 전통 문화 경관인 소나무 숲은 그래서 보존하고 활용해야 되어야 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Q: 소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는데요. 지금 재선충병 관련 예산 지출이 많잖아요. 그런데 교수님은 문화재 복원이나 경관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과 크게 상관이 없는 지역에 분포하는 소나무들이 있잖아요. 그런 친구들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될까요?

A: 꼭 지켜야 할 곳이 어디냐? 아까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태백산맥 일대 경상북도 북부 지방, 강원도 지방의 소나무는 지켜야 되겠죠. 의지에 따라 통제 가능해요. 제주도는 4~5년 전에는 엉망이었는데 이제 제어 가능해졌습니다. 아까 지자체의 분발이 촉구된다고 말했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Q: 이렇게 숲과 문화에 대한 연구를 평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전 교수님은 소나무 문화 연구를 많이 하시고 또 조예가 깊으셔서 소나무 지키기 운동도 하셨는데, 제 기억으로 '솔바람 운동'도 하셨지요. 근데 이제 그 기운이 점점 소나무한테 불리하고 소나무를 지키는 데 어려운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에서 소나무 재선충법을 시행하면서 소나무를 지키고자 여러 방법을 쓰는데, 그 중에 소나무 재선충을 매개하는 솔수염하늘소를 죽이는 농약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이 농약의 부작용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연히 해인사 주지 스님을 만났을 때 여쭤봤어요. 해인사 가야산 주변에 소나무 재선충이 발생해서 지역 산림 당국이 주지 스님한테 물었답니다. 소나무 재선충 문제로 농약을 항공 살포해야 될 것 같은데 해도 되겠느냐고요.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불살생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라서 곤란했을 듯합니다. 주지 스님의 답은 주변과 화합하는 것 또한 중요해서 약재 살포를 그냥 동의했다고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불교 신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화합도 중요하지만, 자연계 중생들과 하는 화합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생물 다양성과 소나무를 지키려는 문화적 전통 계승 노력이 같은 방향이 아닌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 기술 체계, 특히 남북대 이용 기술 체계가 상당히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많았고, 저 역시 주변에서 소나무를 많이 보며 자란 사람으로 소나무가 굉장히 친근합니다. 최근 소나무를 대체한 수종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이 또한 굉장히 아름답고 좋더라고요. 소나무를 꼭 지켜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전 교수님은 문화적인 가치가 중요해서 소나무를 지킬 수 있다면 많이 지키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자연의 위치에 맞게, 현명하게 생태적인 조건 등 우리 기술 체계를 바꿔가면서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전 교수님과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질문은 아니고 코멘트입니다. 소나무의 문화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이런 얘기도 들었어요.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가 소나무로 짓지 않고 느티나무로 지었다. 그때는 느티나무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텐데 아마 느티나무란 좋은 나무가 다 없어지고 그보다 못한 소나무가 더 많이 있기 때문에 소나무로 지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게 잘못된 생각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희가 주변에 많은 참나무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그런 나무들을 베어내고, 거기다 문화적인 가치를 위해서 소나무를 키우자고 합니다. 저는 소나무와 경쟁이 되는 참나무로 바꾸는 게 맞지 않을까,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A: 질문이 아니지만 코멘트를 하셨길래 저도 보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윤 교수님처럼 생각할 수 있죠. 당연히 또 그 생각이 맞든 틀리든 자연의 운행 속도에 따라서 바뀌어 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문화유산을 지키고 망실되는 자연유산을 보호하려고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는 우리 정체성, 우리의 얼, 우리 문화 요소 곳곳에 돈으로 셈할 수 없는 무엇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부터도 옛날하고 달라서 아까 모두에 보여드린 것처럼 소나무 30년에 이르는 책 중에 2004년도에 펴낸 책에는 소나무를 꼭 지켜야 된다고 했지만 5년 전인가 4년 전에 펴낸 『우리 소나무』에는 서문에 그 이야기를 뺐습니다. 왜? 한계가 있다는 걸 인식을 했기 때문에, 하다 못해 지켜야 될 곳만이라도 현재 좋은 임상의 소나무 숲만이라도 옳게 지키자는 거죠. 같은 이야기 자꾸 되풀이하는데 윤 교수님의 생각이나 제 생각이 꼭 같을 필요는 없죠. 그죠? 이런 자리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깁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