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③ 사사오입 개헌, 법꾸라지와 수꾸라지가 만든 영구집권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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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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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8 박한용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은 영구집권을 위한 음모로, 정족수 확보, 야당 무력화, 법과 수학 왜곡, 폭력 동원 등이 동원되었다. 이는 위헌·위법한 행위로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의 상징이 되었다.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밀어붙인 두 번째 개헌은 1954년 11월 29일 공포·시행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말은 아랫자리 숫자에서 0부터 4까지는 버리고. 5부터 9까지는 0으로 버린 후 윗자리에 1을 더하는 산수법이다. 쉽게 말해 반올림하는 것이니, 사사오입 개헌이란 ‘반올림 개헌’인 셈이다. 이승만의 3선 연임을 골자로 하는 이 기괴한 명칭의 개헌은 1954년 11월 통과되었다. 그 내막을 알아보자.
개헌을 위한 정족수 확보
1952년 7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을 통과시키고, 8월에 2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 헌법에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 중임제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이승만의 대통령 임기도 1956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원래 2회까지만 가능했던 대통령 연임 제한을 고쳐서 초대 대통령에 한해 면제하려고 했다. 즉 자신만 예외로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고자 했다.
3대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는 1956년은 이승만이 81세가 되는 해이다. 통계에 따르면, 1956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의 경우 약 47~49세, 여성의 경우는 약 50~52세였다. 그런데 81세의 이승만이 3선개헌으로 연임한다면 사실상 죽을 때까지 영구집권하는 셈이다.
이승만은 먼저 3선연임 개헌 정족수를 확보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헌법 개정의 의결은 양원에서 각각 그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1954년 5월 20일 시행되는 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개헌에 대해 찬동 혹은 추진한다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하여 114석의 찬성자를 확보했다(1952년의 발췌개헌에서 국회를 하원인 민의원과 상원인 참의원을 두는 양원제를 채택했지만, 실제 참의원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자유당의 후보 공천 과정은 이승만의 3선 개헌을 위한 행동대원 선발 과정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자유당은 이승만 영구집권을 위한 사당(私黨)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당 의원만으로는 개헌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무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매수, 협박, 회유 등의 수단을 동원해 숫자를 늘렸다. 그 결과 개헌 정족수보다 1석 많은 137석의 찬성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공안정국의 조성-뉴델리밀회사건
개헌 정족수를 확보하는 과정과 함께 야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을 무력화하는 공작을 펼쳤다. 그것이 바로 “뉴델리밀회사건”이었다. 이 용공조작사건은 민주국민당 당수 신익희가 1953년 5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특사 자격으로 참석한 후, 인도를 순방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영구집권을 획책하기에 분주하고 야당의 반대가 거세어지던 1953년 10월, 민국당의 선전부장이었던 함상훈이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는 신익희가 1953년 3월에 조소앙의 밀사인 오경심을 만나 뉴델리에서 조소앙과 밀회할 것을 합의하였고, 그 뒤 영국 여왕 대관식에 참석한 후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몰래 만나 이승만과 김일성 정권을 배제한 비자본주의, 비공산주의 제3세력이 연합한 남북통일을 협상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른바 한반도중립화 문제를 논의했다는 주장이다.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헌장을 기초한 저명한 독립운동가로서 6·25 당시 납북된 거물 정치인이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부르짖고 있었고, 6·25전쟁이 끝난지 불과 1년 남짓해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야당 당수인 신익희가 재북 인사인 조소앙과 밀담을 해 한반도 중립화 통일문제를 논의했다는 함상훈의 주장은 매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함살훈의 주장에 대해 신익희와 민국당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적극 부인했다. 내무장관 백한성은 함상훈을 불러 누가 그런 일을 제보했는지에 대해 물었으나 함상훈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국회 차원에서도 진상조사를 벌였으나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신익희와 함께 뉴델리에 갔던 김동성 부의장(자유당) 증언으로 거짓임이 드러났다. 결국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자 민국당은 함상훈을 제명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 ‘뉴델리밀회사건’을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개헌을 추진하는 데 이용했다. 자유당은 이른바 제3세력에 대한 공포를 대대적으로 퍼뜨렸다. ‘공산주의’·‘용공’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였다. 자유당은 공안정국을 이용해 1953년 11월 ‘국가의 안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민투표로서 결정한다’는 조항과 함께 "중립화반대협상배격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자유당 내부의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비주류들이 민국당과 연대하는 것을 끊어내려는 수단이었다. 반공과 공안을 매개로 자유당 인사들의 이탈에 족쇄를 채운 것이다. 동시에 3선연임 개헌이 마치 안보를 위한 것처럼 위장하려는 술책이기도 했다.
수학자가 동원된 반올림 개헌
정족수의 확보, 야당에 대한 용공세력 규정, 내부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공안정국 조성을 마친 자유당은 1954년 11월 18일 개헌안을 상정해 11월 27일 표결했다. 이 개헌의 성사 여부에 따라 이승만의 영구집권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이날 국희의사당 앞에는 군중들이 운집해 그 결과를 지켜보았다.
투표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무효 1명으로 개헌안이 부결되었다. 재적 의원 203명의 2/3 이상인 135.333⋯명 이상의 찬성이 나와야 가결이 되기 때문에, 136명을 넘겨야 정족수를 채워야 했다. 그런데 자유당이 확보한 찬성의원 가운데 최소 2표 이상의 반란표 혹은 무효표가 나온 것이다.
개헌이 불발되자. 민국당과 어용 기관지(機關紙)를 제외한 신문들은 일제히 민주주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이틀 후인 29일 사사오입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사사오입이라니?
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자유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해서 다음과 같은 억지 논리를 내세워 표결을 번복하고 나섰다. 이들은 203의 수학적 3분의 2는 135.333⋯인데, 0.333⋯은 0.5 미만으로서 수학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는 135.333⋯명이 아니라 135명이라고 주장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203의 3분의 2가 135.333⋯이라는 것은 최소한 135,3보다는 커야 한다는 것이니, 사람은 쪼갤 수 없으므로 136명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맞지도 않는 사사오입을 적용시켜 개헌안은 가결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해괴한 주장에는 법꾸리지와 수꾸라지가 동원되었다. 개헌안 투표 다음날 조용순 법무부 장관은 0.333⋯이라는 숫자는 독립된 주체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사오입의 논리로 버림하고 135표만으로도 개헌선인 정족수 2/3에 도달했다는 유권해석을 발표했다. 29일에는 자유당 의원인 최순주 국회 부의장의 사회로 개헌 정족수가 135명이라고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최순주는 지난번 부결 통과를 한 책임을 지고(?) 부의장 직을 사퇴했다.
29일 본회의에서 최순주는 사사오입의 수학적 정당성을 뒤받침한답시고 초대 인하공과대학장과 초대 관상대장을 겸임하고 있던 천문학자 이원철 박사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최윤식 교수의 해석까지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판사를 한 법무부 장관과 어용 수학자들이 각기 법꾸라지와 수꾸라지 역할로 이승만 영구독재에 부역한 것이다.
이정재 등 정치깡패를 동원해 반대를 제압하다
가결 직후 야당측인 무소속 곽상훈 부의장은 부결 선언을 하고 이철승 의원이 의장석으로 뛰어들어 최순주의 멱살을 잡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이정재와 휘하 유지광 등 정치깡패들이 일제히 회의장에 난입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위협하였다. 그러자 조병옥은 당시 자유당 감찰부 차장 이정재를 가리키며 "저기 자유당 감찰부장(실은 감찰부 차장) 얼굴을 내가 알아!" 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깡패들의 난입으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어, 국회는 가결 선언 후 몇 십분 만에 산회되었다.
이에 분격한 야당 의원들은 종래의 위헌대책위원회를 호헌동지회로 확대해 범야당연합전선으로 투쟁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들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에 대한 징계 동의안, 개헌번복에 관한 결의안, 정부 규탄안, 백한성 내무장관 불신임안, 갈홍기 공보실장 파면건의안 등을 제출했지만, 최순주 부의장의 사표만 수리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결되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은 사실상의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개헌정족수 확보를 위한 권모술수와 야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안 정국의 조성 그리고 법과 수학마저 왜곡시킨 이른바 법꾸라지와 수꾸라지의 동원, 정치깡패를 통한 폭력과 공포 조성 등이 동원된 위헌·위법한 행위였다. 당시 ‘사사오입’이란 말은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과 풍자 수단으로 널리 회자되었고, 김영삼, 민관식 등 당시 자유당 소장파 국회의원 일부가 자유당을 탈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이한 점은 이 사사오입 개헌에 직간접으로 관계해 탄핵 요구를 받은 함상훈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조용순 법무부 장관, 갈홍기 공보실장, 백한성 내무장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출신들이었다는 점이다. 친일과 독재는 매우 친연성이 짙었다고나 할까.
연재 순서
③ 2차 개헌(사사오입개헌) – 반올림 셈법으로 꿈꾼 영구집권
④ 3차 개헌(의원내각제) – 너무나 짧고 무능했던 내각책임제 개헌
⑤ 4차 개헌(소급입법개헌) - 민주반역자에 대한 소급 처벌
⑥ 5차 개헌(쿠데타 개헌) - 군사쿠데타의 정당화
⑦ 6차 개헌(3선 개헌) - 영구집권을 위한 교두보
⑧ 7차 개헌(유신독재헌법) - 일제 파시즘의 분단 버전
⑨ 8차 개헌(신군부 쿠데타개헌) - 피의 학살을 앞세운 개헌
⑩ 9차 개헌(87년 체제) - 6·10민주항쟁과 광주학살주범의 불편한 공존
⑪ 연재를 마치며 – 향후 개헌의 방향과 그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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