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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기후정의행진 | ‘정의로운 전환'의 재정의, 불평등을 딛고 연대로

2025-10-02 최민욱 기자

2025년 7월 7일, 경북 구미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베트남 국적의 20대 이주노동자 A씨가 쓰러져 사망했다. 구조 당시 그의 체온은 40.2℃에 달했으며, 경찰과 소방당국은 폭염에 의한 온열질환을 사망 원인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노동·시민단체는 즉각 성명을 내고, 폭염 경보 속 최소한의 안전조치조차 이행되지 않았다며 정부와 사업주의 책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A씨의 죽음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재난을 응축해 보여 준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추상적 위협이 아닌, 노동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산업재해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결과는 언제나 가장 열악한 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고양시에 위치한 쿠팡 물류센터. 사진. 플래닛03
고양시에 위치한 쿠팡 물류센터. 사진. 플래닛03


‘정의로운 전환’의 재정의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위험을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자에게 떠넘기지 않겠다는 국제적 약속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논의는 협소하다. 지금까지 정의로운 전환은 주로 석탄발전소 폐쇄 등으로 일자리를 잃게 될 노동자 보호에 국한돼 왔다.


기후위기는 미래의 구조조정 이전에 이미 ‘현재의 재난’으로 노동자를 위협하고 있다. 건설·농업·물류·플랫폼 노동자들은 이미 폭염, 침수, 폭우 속에서 생명과 건강을 위협받고 있으며, 이들을 위한 보호 정책은 거의 없다. 노동계와 기후운동 진영은 정의로운 전환이 산업 전환기 노동자 보호에 머물 것이 아니라, 기후재난에 노출된 ‘지금 여기’의 노동자를 보호하는 실천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로운 전환은 더 이상 선언이나 계획의 언어로 머물 수 없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기후 적응의 전제가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전환 정의의 실천이다. 진정한 정의로운 전환은 탈탄소 그 자체가 아니라, 전환의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조건을 바꾸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통계로 드러난 기후재난


폭염으로 인한 산업 현장의 피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5년 9월 9일 기준 온열질환자는 4394명, 사망자는 29명에 달한다. 이 중 약 80%는 실외에서 발생했고, 실외·실내를 불문하고 ‘작업장’이 가장 높은 발생 장소였다.


보다 직접적인 지표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승인 현황이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온열질환 산재 승인 건수는 총 147건, 이 중 22건이 사망이었다. 2024년에는 승인 건수가 51건으로 늘었고, 2025년엔 8월까지만 해도 이미 42건(사망 3건 포함)에 도달해 증가 추세가 두드러진다.


피해는 특정 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2020년 1월부터 2025년 7월까지 산재 승인된 온열질환 154건 중 45.4%가 건설업, 사망자의 70.5%가 건설업 종사자였다. 이는 옥외 고강도 노동, 공기준수 압박, 냉방·그늘 미비 등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 노동자 개개인의 부주의가 아니라, 폭염 속에서도 작업을 중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산업 구조의 책임이 명확하다.


이 통계는 실태의 극히 일부만 보여 준다. 같은 해 온열질환 사망자는 29명이지만, 산재로 인정된 사망자는 소수다. 이는 산재보험 미적용 대상인 자영업자·공무원·이주노동자, 그리고 정보 접근이 어려운 일용직 노동자 등이 통계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실제론 산재 신청조차 하지 못한 사례가 훨씬 많을 가능성이 높고, 현재의 통계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기후재난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건설 현장을 넘어 노동 전반에 파고든 기후 위협


폭염은 건설 현장을 넘어 필수노동 전반으로 침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실내 고위험 노동 현장은 물류센터다. 대형 창고 특성상 환기가 어려운 데다 냉방 설비도 미비해, 한여름엔 내부가 40℃를 넘는 ‘찜통’이 된다. 이곳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은 열탈진·열사병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간 정부의 폭염 대책은 옥외 작업자에만 한정됐으나, 물류센터 참사가 반복되며 실내 작업장도 관리 대상에 포함되는 변화가 뒤늦게 이뤄졌다.


농업 현장은 더 열악하다. 비닐하우스 내부는 외부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를 기록한다. 충남 부여의 농가에서는 낮 최고기온 37.8℃에 작업자들이 9시간 이상 일했고, 경남 밀양의 깻잎 농장에서는 30℃ 넘는 온도 속에서 하루 종일 노동이 이어졌다(관련기사). 고용노동부가 권고한 ‘체감온도 33℃ 이상 시 매시간 10분 휴식’ 기준은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다. 비정규·고령·이주 노동자가 밀집된 농촌에서 기후재난은 일상적 폭력이며, 이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는 여전히 미비하다.


플랫폼 노동자들도 새로운 폭염 취약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배달 라이더는 폭염과 폭우 속에서도 수당·수수료를 위해 운행을 멈추지 못한다.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아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위험을 감지하더라도 스스로 작업을 중단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관련기사). 정부의 기후재난 대응 체계가 ‘계약 구조’ 바깥에 놓인 플랫폼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 이들의 노동은 지속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의 전 지구적 노동 위기


기후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노동이 무너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24년 보고서 「기후변화 속 작업 안전과 건강 보장」에서 전 세계 노동자의 70% 이상, 약 24억 명이 폭염과 같은 기후재난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적으로 폭염으로만 1만897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있으며, 약 2285만 건의 업무상 재해가 폭염과 관련해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 자외선 노출로 인한 피부암 사망자(1만8960명), 대기오염으로 인한 옥외 노동자 사망자(86만 명)까지 포함하면, 기후변화는 이미 수십만 명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 지구적 ‘노동 살해 시스템’이 되었다.


이 수치들은 단지 통계를 넘어, 기후위기가 노동권과 산업안전 문제로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산업·국가·노동 형태를 가리지 않고 재난은 폭넓게 침투하고 있으며, 이제 기후위기를 더 이상 환경의 영역에만 두는 것은 정치적 회피일 수밖에 없다. ILO는 각국 정부에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안전 재구조화, 법적 보호 범위 확대, 노동자 주체 참여를 명확히 요구하고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이를 국제 기준에 맞춰 정비하지 않는다면, 구미에서 발생한 죽음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주노동자의 이중고, 고용허가제라는 구조적 덫


기후위기는 이주노동자에게 ‘선택지 없는 폭염’으로 다가온다. 이주노동자의 구조적 취약성 중심에는 고용허가제가 있다. 이 제도는 E-9 비자 노동자의 체류 자격을 특정 사업장에 묶는다. 노동자가 아무리 위험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사업주의 동의 없이는 이직이 불가능하다. 비위생적 숙소, 무더위 속 작업 강요, 안전장비 미비 등 문제가 발생해도 작업장을 벗어나는 순간 비자 취소와 강제 출국의 위협이 뒤따른다.


이는 법적으로 보장된 ‘작업 거부권’이 사실상 무력화된다는 뜻이다. 농장주가 폭염경보가 발효된 날 비닐하우스 작업을 지시해도, 노동자는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생존권과 체류권이 맞바뀐 구조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폭염이라는 재난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고, 가장 늦게 구조된다.


통계는 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국 국적 노동자보다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최대 3.6배에 이른다. 이는 단순히 언어 장벽이나 안전교육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기후위기를 외면할 수 없는 위치에 강제로 고정시켜 버리는 제도적 폭력의 결과다. 이주노동자는 단지 취약한 존재가 아니다. 제도적으로 취약하도록 설계된 존재다.


주거지가 된 재난 현장, ‘숙소’ 아닌 ‘위험물’


이주노동자의 위험은 작업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후재난은 곧장 숙소로 이어진다. 농어업·건설업 분야 이주노동자 상당수는 사업주가 제공하는 임시 가설건축물에 거주한다. 단열이 안 되는 컨테이너, 냉난방 시설 없는 농막, 심지어 법적으로 거주가 금지된 비닐하우스도 숙소로 제공된다.


이런 공간은 여름이면 폭염에, 겨울이면 한파에 그대로 노출된다. 비가 새고, 바람이 통하고, 화재와 감전, 질식에 극도로 취약한 구조물이다. 2025년 2월 평택에서는 보일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기숙사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2020년 12월 포천에서는 비닐하우스 숙소에 머물던 이주노동자가 한파 속에서 숨졌다.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며 “쾌적한 기숙사에서 거주할 권리”를 명시했다(2025년 9월, 서울고법).


더 심각한 것은 정부의 방관이 아닌 ‘승인’이다. 고용노동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이 구조물들을 공식 숙소로 인정하고 있으며, 심지어 숙소비를 노동자 임금에서 공제할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까지 마련했다. 국가는 비인간적 주거 조건을 사실상 제도화하고 있다.


‘일터-숙소 연속 위험’은 기후재난 시대 이주노동자가 처한 구조적 현실이다. 단열·환기·냉난방·전기·가스 시설이 제대로 갖춰졌는지, 관리감독은 이루어지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통역과 분리, 대체숙소 제공이 가능한지 여부는 단순 주거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기후 대응의 실질 조건이자 기본 인프라로 다뤄져야 한다.


기후위기, 불평등을 딛고 연대로


기후위기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같은 폭염이라도, 그로 인해 죽는 사람은 늘 가장 아래에 있는 이들이다. 2025년 여름, 구미의 건설 현장에서 쓰러진 이주 청년 노동자는 한국 노동 정책의 사각지대, 불안정한 비자 제도, 그리고 위험을 외면하는 기업 구조가 만들어 낸 복합적 재난의 희생자였다.


기후위기는 배달노동자가 폭우 속에서 오토바이를 몰게 만들고, 농촌의 계절노동자를 40℃를 넘는 밀폐된 비닐하우스로 내몬다. 고층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장비조차 제공되지 않는다. 이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덥고 가장 위험한 현장에 있는 이들이 법적 보호 없이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한 흐름은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927기후정의행진에서는 노동조합, 이주인권단체, 기후운동 진영이 함께 거리로 나섰다. 이는 노동권·이주권·기후정의가 더 이상 분리된 의제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 투쟁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랜 시간 분절돼 있던 사회운동의 경계를 넘는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


기후위기의 해법은 기술적 전환에 그치지 않는다. 위험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이들의 권리를 중심에 놓는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기후 대응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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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10월 10일

"기후위기의 해법은 기술적 전환에 그치지 않는다. 위험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이들의 권리를 중심에 놓는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기후 대응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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