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날 풍경ㅣ한국 보수의 괴랄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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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0일
- 4분 분량
2025-05-30 최은
서구 기준 보수는 '급격한 변화 반대, 민족과 고유한 전통 강조, 대의제 민주주의 옹호,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사회 발전 추구' 정도의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보수는 누구인가? 지역기반, 재벌체제, 사법과 언론계 카르텔를 형성하던 한국 보수는 아스팔트 보수, '펨코'세력이라는 괴랄한 종말로 치닫고 있다.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그때 구로공단 노동자들에게 위로를
개인적인 이야기 한 토막. 며칠 전 김문수 후보의 부인인 설난영씨가 포항을 방문한 자리에서 ‘노조 운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 분이 말한 취지는 아마도 ‘자신이 알려진 것과 달리, 세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계급 내지는 노동운동에 대한 폄하와 혐오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더군다나 설난영씨 자신이 과거 1985년 ‘구로동맹파업’ 당시 세진전자 노조 위원장이었고, 서노련의장이자 한일도루코 노조 위원장이었던 김문수와 인연을 맺은 분이 아닌가.
사실 내가 사회생활의 첫 발을 디딘 곳이 세진전자 노조가 속한 산업별 연맹이었다. 보수인사가 된 김문수를 다시 만난 것도 1998년 즈음이었다.(처음 만난 때는 1988년 ‘민중당’을 창당했던 장기표와 이재오 옆의 김문수였고) 더군다나 당시 모시던 국장님이 세진전자의 현직 노조 위원장이었고, 구로공단의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수와 설난영에 대해 (이미 친노동 인사가 아니었음에도) 스스럼없이 드러냈던 친밀감은 사선을 넘은 동지를 대하는 그것이었다. 그랬던 김문수가 후일 목사 전광훈의 옆에서 ‘카톨릭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식의 망언을 늘어놓는 인물이 되었다. 여기서 김문수 후보나 설난영 씨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미 60대에 들어선)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릴 뿐이다. 비록 내가 이미 노동운동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그리고 당시 별 기여를 하지도 못하고 밥이나 축낸 소인배였지만) 이 나라 자본주의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에 대한 당신들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라고 감히 말씀 드린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열해진 ‘한국 보수’의 ‘괴랄’한 ‘종말’에 대해 몇 소절 길게 읊어 본다.
서구 기준으로 보수주의자를 따진다면
먼저 ‘한국 보수’. 우리가 누군가를 평할 때, 혹은 스스로를 ‘보수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아니면 많은 분들이 얘기한 대로 한국에 보수주의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수구꼴통’만 있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서구적 기준으로 보수주의자를 따진다면, 현재의 ‘국민의 힘’에 속한 인사들 대부분이 해당되지 않으며, 유럽이라면 ‘네오나치’에 가깝거나, 미국이라면 울트라우익 정도일거라고 본다. 냉정하게 말해서, ‘시장주의 보수’이건, ‘전통적 보수’이건 광의의 ‘합리적 보수’세력은 현재 ‘국민의 힘’의 일부, ‘민주당’의 꽤 많은 인사들이 속한 ‘상상적’ 개념이다. 인물로 빗대어 말하자면, 이회창이 ‘전통적 보수’의 적자였다면, ‘시장주의 보수’는 과거의 이명박 혹은 현재의 유승민 정도 스탠스가 아닐까.
애초에 ‘보수주의’(保守主義) 영어로 Conservatism이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 급격한 변화를 반대하고 민족과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기본적인 대의제(代議制)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사회 발전을 기본 전략으로 한다는 정도가 원형적 개념이다. 이 상식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윤석열과 내란세력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는 자들이 보수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일종의 ‘참칭’이자 ‘언어도단’(言語道斷)에 불과하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논의라고 할 것이다.
민족이나 고유한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는 거리가 먼, 한국 보수
하지만 한 발 들어가서 말해보자면, ‘한국 보수’는 태생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한국은 분명히 보수주의가 절대적 지분을 차지한 ‘우파 국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통해 형성된 ‘민족주의적’ 우파를 상징한 김구, 김규식이 암살, 납북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 축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 박정희정권을 거치면서 ‘한민당’으로 상징된 ‘합리적 보수’(비록 덜 민족적이고, 지주계급에 기반을 두었다고 하더라도)가 만년 야당으로 보낸 세월이 거의 50년에 이른다. 조봉암으로 대표된 진보세력이 거세(去勢)된 것이야 차치하더라도, 그 세월을 거쳐 형성된 ‘한국 보수’의 정체성이 그렇게 민족적이라거나 고유한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무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대체한 것은 과거 ‘개발독재’시대를 거쳐 성장해 온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옹호와 자부심이 아닐까. 어찌됐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나아가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보수’가 굳건히 강조해 온 강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국 보수’의 새로운 적자이고 싶은 뉴라이트세력이나 그들을 후원하는 조중동(물론 그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지만)이 굳이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호칭하는 이유는, ‘민족’이라는 전통적인 우파가 강한 영역에서 밀린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알러지 반응이라고 보여진다. 반공(反共)이라는 절대반지가 퇴색해버린 지금, ‘한국 보수’가 자꾸 반중(反中)이라는 테제에 몰두하는 배경은 대략 이렇다.
지역기반, 재벌체제, 사법과 언론계 카르텔이 합작한, '괴랄'한 체제는 생명을 다했다
결국 2008년 이명박의 집권 이후, 박근혜의 탄핵을 거쳐 윤석열의 탄핵에 이르는 17년간의 횡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국 보수’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괴랄’한 ‘종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던 1인당 GNP 4만불 고지를 넘지 못하고, 장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 전통적인 재벌 중심의 독점자본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저출생과 불평등에 봉착했다는 현실이 이른바 ‘주류’였던 ‘한국 보수’를 몰아붙인 것일까? 해방 이후 가장 황당한 플랜이었던 ‘한반도 대운하’를 주창했던 2008년의 이명박 이후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저열한 최순실 류의 비선세력이나 김건희 류의 미신신봉자들이 정권을 좌우해 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마도 40% 이상의 안정적인 지역기반, 재벌체제(오직 한국만이 유일하게 보유한)라는 일종의 기형적인 시장주의 시스템, 기존 인맥과 혼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사법, 언론계의 카르텔이 합작해서 이룩한 이 ‘괴랄’한 체제는 이제 생명을 다했다.
아스팔트 보수, 합리적이지 않고 실력도 없다
오늘날 이른바 ‘보수판’에 인입된 두 세력들이 부활의 생명수가 될 수 있을까. 먼저 한 세력. 지난 17년간 성장해온 전광훈(김문수와 배인규와 같은 인사들이 포진한) 류의 ‘아스팔트 보수’는 전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실력도 없이 형편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신천지와 통일교, 극우파 기독교의 일부가 혼합된 그들은 기껏해야 영남과 수도권의 노년층을 타켓팅해서 (시쳇말로) 약을 팔고 있다. 지지자가 70만 명을 넘는다고 주장하는 ‘신남성연대’의 대표인 배인규는 히로뽕을 투약하다 장렬히(?) 깜방으로 직행했다.

'펨코'세력, 반민주주의적 엘리티즘에 물든 그들
또 다른 세력은 어떨까. ‘아스팔트 보수’와 결이 다른 이준석 류의 ‘펨코’세력은 수도권의 2,30대층 남성층 일부를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 뭘 주장하는지 모호한 그들은 아마도 강남 8학군 출신의 K,Y대생(믿겨지지는 않지만)을 포함해서 이른바 ‘입결’(대학입학성적으로 계층화한)론자로 보여진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아무리 좋게 평가해 보아도, 박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신다윈주의 어디쯤이다. 부연해서 일종의 ‘반민주주의’적인 엘리티즘에 물든 그들과 닮은 세력을 굳이 찾자면, 태국에서 탁신 전 총리로 대표되는 다수파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부득불 견제하고 있는 하이쏘(하이 소사이어티의 준말) 정도가 아닐까.
어찌 되건, 이번 6.3 대선을 통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은 가닥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한국 보수’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건강한, 합리적인 보수주의가 새롭게 서길 바랄 뿐이다.
지난 기사
일상이지만 어제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디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 세력이 등장하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