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날 풍경ㅣ라 프론테라, 그리고 외국인 배척
- hpiri2
- 5월 2일
- 4분 분량
2025-05-01 최은
한국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가 늘면서 극우파 포퓰리즘이 득세할지도 모른다. 200여 명의 사망자가 났던,1931년 평양 화교배척사건을 통해서 시사점을 제시한다. 무슬림 공동체 확대 반대, 다양한 아시아 인력 수급, 고급 과학기술 인력 유치가 필요하다.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2주 전에 실린 "다문화, 그리고 중국 혐오" 제하(題下)의 글을 이어서.
'이민'하면 지금보다 살림이 나아진다
결국 이민(移民)이라는 행위의 동기는 경제다. 먹고 사는 것.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단기 비자를 받아서 계절 노동을 하건, 합법적인 취업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다 영주권을 취득하건, 중개료를 두둑이 내고 불법 이주를 감행하건. 정치적인 이유나, 환경재난을 피해 난민이 되어 건너가건. 그렇게 해서 간 곳에서 하층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전하거나 아예 마약과 성 산업 같은 불법 영역으로 전락하더라도, 지금보다 낫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간다. 우리 역시 그랬었다.
멕시코에서 '라 프론테라'를 넘어 미국에 간, 라티노
경계라는 말은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Border로 쓰지만, 스페인어로는 주로 La Frontera(라 프론테라)라고 한다. Border는 뭔가 선과 울타리(상이한 요소가 맞대고 있는)라는 의미가 강한 데 비해, La Frontera는 면과 변경(교류하고 혼합된다는)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오늘날, 3145Km의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미국과 멕시코의 La Frontera에서 벌어진 (혹은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 일은 정확히 윗 문단에서 지적한 것들이다. 김희순 선생이 쓴 노작 『라 프론테라—미국 멕시코 국경을 사이에 둔 두 세계의 조우』(도서출판 앨피, 2023)를 보면, 100여 년에 이르는 미국-멕시코 간 이주를 둘러싼 다양한 서사를 엿볼 수 있다. 2차대전 이전 닭장차에 실려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계절노동자로 일하던 멕시코인들은 1943년, 2차대전을 맞아 총력전 체제 하의 미국이 제시한 ‘브라세로 프로그램(스페인 말로 브라소Braso는 팔뚝이다)’을 통해 대거 미국 노동시장에서 제조업과 3D산업에 투입되었다. 그로부터 80년 동안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고 성장한 라티노(멕시코와 중남미국가 출신)의 인구는 6천 만을 넘어섰다. 결국 미래 미국의 정체성은 익숙한 WASP(엥글로섹슨적 정체성, White Anglo-Saxon Protestants)로부터 이탈할 것이 분명하다.
대규모 이주나 이민이 없었던, 한국
그렇다면, 대규모 이주와 이민, 이에 따른 혼란과 정체성의 변화는 현대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인 사건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는 본질적으로 어떤 지역으로 어떤 종족이 유입되고, 기존 주민을 통합하거나 배제하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한국은 그런 예외적인 경우의 하나일 것이다. 한국인의 유전자에 대한 연구와 고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삼국통일 이후 1400여 년간 대규모의 이주나 이민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공고히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다문화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은 쉽게 결론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국의 화교(華僑)사에 대한 연구는 희귀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사례가 될 것이다.
1943년 최대 7만여 명이 화교 유입
오늘날 한국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교가 극히 드문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정희 선생이 쓴 『화교가 없는 나라』(동아시아, 2018)를 보면, 1880년대에 시작된 한반도로의 화교 유입은 1943년 최대 7만여 명에 달했었다. 그들은 익숙한 중화요리와 주단포목점(오죽하면 비단장수 왕서방이라고 노래가 나왔겠는가)을 위시하여, 양복점과 이발소, 솥을 제작하는 주물업, 양말제조업을 선도했다. 뿐만 아니라 명동성당을 건립한 건축기술자도 화교였고, 철도와 도로, 염전과 탄광에 투입된 화공(華工)이 있었고, 인천 최초의 채소시장을 연 농민들 역시 화교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들이 인구의 5%를 넘어선 오늘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1931년 평양 화교배척사건
문제는 여지없이 벌어진 ‘화교배척사건’이었다. 1927년 12월 7일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시작된 1차 배척사건은 전주, 군산으로 확산되어 사망자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후 화교습격사건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년 후인 1931년 7월에 재발한 2차 배척사건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른바 ‘만보산사건’(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발생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간의 충돌사건인데, 사실 조선일보의 오보였다)으로 격화된 민족 감정은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평양이었다. 공식적으로 96명이 사망한 평양을 필두로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차, 2차 모두 만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시작점이었지만, 기실 속을 파보면, 화교 경제력의 성장에 대한 경계와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식민권력의 의도적인 디바이드전술이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언어와 문화가 통하지 않는 소통 부재의 공간 속에서 조율되지 않은 경쟁은 반드시 화를 불러 일으킨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서 겪고 있는 혼란들.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 된 화교배척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적어도 거칠게나마 말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다. 앞으로 일어날 혼란과 정체성을 둘러싼 시비들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에 불과하지만. 시니컬한 얘기일 거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무슬림 공동체의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 무슬림 공동체의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 사실 우리는 독특한 종교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특이하게도 각각 30%를 넘는 기독교도와 불교도가 있는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그러면서도 세속국가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심지어 기독교 중에서도 복음주의적 성향의 개신교도가 강하고 한때는 단군상과 불상 훼손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신천지와 통일교와 같이 이단 혹은 사이비라는 혐의를 받는 종단이 많은 만물백화점인 한국에서 무슬림 공동체의 확대는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국가로부터의 유입은 통제되어야 한다.
다양한 아시아인들이 이주해 와야
둘째, 조선족 혹은 한족 노동력을 넘어서서 아시아로부터의 다양한 인력이 수급되어야 한다. 이미 대우조선소가 있는 거제도에서 싱할리어(스리랑카의 국어인)는 대세다. 우리와 인종적, 종교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국가들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고, 나아가 그들 국가에 친한파를 육성하고 한국과의 경제적 연결망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찍어서 말해 보자면, 우리에게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버마(미얀마), 스리랑카, 네팔, 필리핀(민다나오를 제외하고), 라오스는 중요하다. 좀 더 나아가자면,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의 세속화된 국가들까지.
더 젊은 고급 인력이 와야 한다
셋째, 저임금과 3D산업에 써먹기 위한 반숙련노동자 수입을 넘어설 것. 반드시 도래할 AI시대로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과학기술인력을 육성하고 초청할 것. 지금 논의되는 외국인 차등임금제와 같은 얘기는 정말 우스운 얘기일 뿐이다. 더 젊은, 고급의 인력을 수급해야 할 상황에서 매력적인 노동시장을 구축해도 모자랄 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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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문화가 통하지 않는 소통 부재의 공간 속에서 조율되지 않은 경쟁은 반드시 화를 불러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