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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⑥ 한 번만 한다더니, 하고 또 하고 — 유신의 징검다리가 된 삼선개헌

2025-07-04 박한용

박정희 삼선개헌 유신체제,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은 권력 연장을 위한 합법적 절차 위반이었으며, 이는 이후 유신독재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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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의 전가의 보도, 안보를 명분으로 개헌을 요구하다


1969년 10월 21일, 국회에서 강행 처리된 제6차 헌법 개정은 이른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다. 소위 '삼선개헌'으로 불리는 이 개헌은,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로 출마할 수 있도록 만든 정치적 목적의 개헌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에서 독재국가(이른바 유신체제)로 이행하는 결정적 이정표가 되었다.


당시 헌법(1962년 개정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단 한 차례만 허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67년 2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권력욕에 취한 박정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68년부터 정일권 당시 국회의장, 공화당 실세 김종필, 그리고 공화당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와 군부까지 동원해 '3선 개헌'이라는 플랜을 준비하고 개헌을 밀어붙였다. 이미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를 광범위한 선거 부정을 통해 집권 공화당은 개헌 의결 가능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명분과 힘이었다.

     

‘총력안보’는 삼선개헌으로?


1969년 1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올해를 총력안보의 해로 설정한다"고 선언하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1월부터 5월까지 집권 여당인 공화당은 “국가 안보와 경제 정책의 연속성”을 명분으로 개헌 논의를 띄웠다. 한국 수구세력의 전가보도인 ‘안보’와 박정희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 따위의 연속적 추진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박정희 개인의 권력 연장을 위한 노골적인 정치 공작이 숨어 있었다.


1969년의 정치 일정은 이 개헌을 둘러싸고 급물살을 탔다. 6월 12일, 공화당은 헌법 제47조의 중임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개헌안은 즉각 야당과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무려 6년 5개월 동안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던 70명의 해금 정치인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그리고 재야인사들과 합류해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에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3선반대범투위)를 조직했다. 3선반대범투위는 전국 각지에 조직을 결성하고 개헌저지 지방 순회 유세를 펼쳤다. 고등학교와 대학가에서도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와 경찰, 군 등을 앞세워 반대 정치인들과 재야인사 그리고 반대 시위를 무력화시켰다. 야당 및 반대 운동에 참여한 시민사회 인사들은 ‘용공’ 혐의 등으로 사법적 탄압 대상이 되었다.


날치기 부정표결로 개헌안 통과


이런 폭압 속에서 8월에는 국회 개헌특위가 구성되었다. 신민당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특위에 불참했다. 하지만 10월에 접어들며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야당은 의사일정 전면 보이콧으로 맞섰고, 10월 21일, 국회의장 정일권은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없는 상태에서 개헌안을 직권상정하고 표결에 부쳤다. 공화당 및 일부 무소속 의원의 찬성으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개헌이라는 엄중한 사안이 야당을 빼돌린 채 날치기 통과된 것이다.


날치기 통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재적 의원수 조작 의혹과 야당 의원 매수설이 제기되며 헌법적 정당성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무엇보다 삼선개헌의 국회 처리 과정은 헌법이 보장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을 정면으로 훼손한 사례였다. 당시 국회의원 총원 175명 중 개헌안 통과를 위한 법정 정족수는 117명이었으나, 본회의에 참석한 의원 수와 표결 결과는 애초부터 의심스러웠다. 개헌안 표결 당시 찬성표는 122표로 발표되었으나, 야당은 공화당이 의사록을 조작하고, 일부 무소속 및 야당 의원들에게 금전적 회유를 시도한 증거를 제시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언론은 이에 대해 '국회의원 매수 사건'으로 규정하고 집중 보도했으며, 당시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 등은 이를 '헌정사상 최악의 불법 개헌 시도'로 규탄했다.

1969년 3선개헌 헌법개정안을 국회에서 표결하고 있다.  사진_국가기록원
1969년 3선개헌 헌법개정안을 국회에서 표결하고 있다. 사진_국가기록원

그러거나 말거나 공화당은 10월 24일 개헌안을 정식 공포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 결과 약 65%의 찬성이 나왔지만, 야당과 시민단체는 불공정 선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로써 박정희는 1971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확보했고, 실제로 김대중 후보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3선에 성공한다.

     

유신독재체제의 징검다리가 된 삼선개헌


이 삼선개헌은 겉으로는 합법 절차를 따른 듯 보이지만, 실상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명백한 공격이었다. 헌법 절차는 최소한의 외형만 유지됐을 뿐,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과 야당의 배제, 국회의원 매수 의혹 등이 얽히며, 민주공화국의 기초인 입헌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는 단순히 한 차례의 정치적 술책이 아니라,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의 서막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의 정당성을 '안보 위기'와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했다. 베트남 전쟁, 닉슨 독트린 등 외부적 위협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학적으로 볼 때, 국가의 위기 상황을 명분 삼아 헌법 질서를 파괴하고 권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통치 전략이다. 실제로 삼선개헌은 이후 유신헌법과 종신집권 체제로 가는 결정적 디딤돌이 되었다.


또한 삼선개헌은 단순히 대통령의 장기집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는 입법부와 사법부 등 권력 분립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첫걸음이었다. 개헌 이후 공화당은 국회와 정당 체계를 박정희 정권에 종속시키는 구조를 강화했고, 이후 유신체제에서는 국회를 대통령이 임의로 해산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즉, 삼선개헌은 단순한 숫자의 개헌이 아니라, 헌정 체제 전반의 구조를 바꾸는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개헌 자체가 불법이었던 정치 공작


그날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단순한 법률 개정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근본을 흔든 위헌적 정치 행위였다. 물론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투표라는 후속 절차를 거쳤다는 점에서 일부에서는 일정 부분 형식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국민투표마저 자유롭고 공정한 환경에서 이뤄졌는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반대 여론은 탄압되었으며, 야당과 시민사회의 활동은 무력화되었다. 이는 곧 '형식은 갖추었으되 실질은 훼손된' 민주주의의 전형이다.


결과적으로 1969년의 삼선개헌은 박정희 개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 공작이었으며, 대한민국 헌정사에 뚜렷한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유신독재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열쇠였고, 민주주의의 후퇴를 상징하는 정치적 퇴보였다. "한 번만 더"를 외치며 시작된 개헌은 결국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연쇄 반응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3선 개헌 후인 1971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이후 박정희는 영구집권(종신독재)으로 갈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이 맥락을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


예춘호 등 공화당 내 일부 중진들은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으나, 강력한 집권세력과 당내 압박에 밀려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침묵을 강요당한 그들의 반대는 헌법 절차 위반과 민주주의 훼손을 경고하는 차원에 머물렀으며, 이로 인해 삼선개헌은 결국 강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사건을 다시 되짚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방식의 권력욕과 헌정질서 파괴 시도가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기억이 살아 있다면, 그 반복은 결코 똑같은 형태로 일어날 수 없다.

1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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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Jul 07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대한 재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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