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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⑤ 쿠데타와 계엄 아래 자행된 제5차 개헌과 제3공화국

2025-06-06 박한용

5·16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이 붕괴하고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제5차 헌법 개정이 강행되었다. 이로서 민주주의보다는 절대권력에 의한 통치를 내세운 박정희에 의해 9년간의 공포정치가 벌어졌다.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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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은 5·16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1960년 8월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으로 성립한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제2공화국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4월에 핀 민주의 꽃은 1년 만에 군인들의 총칼에 의해 잘려 나갔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주력들은 거의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괴뢰였던 만주국 장교 출신들이었다. 만주국은 1932년 만주에 주둔한 일본관동군이 독자적으로 만주를 침략하고(9·18사변) 이듬해 3월에 관동군이 주도해 만든,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만주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국가의 외양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관동군의 지휘와 감독 아래 운용되었다. 따라서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 아래서 성장하였고, 만주국이 관동군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실제 목격하고 체험했던 박정희 등 만주국의 조선인 장교들은 군의 정치 개입을 당연시했다.


일체의 정치 활동 정지, 기존 정당 해산


박정희 등 5·16쿠데타 세력들은 장면정권을 무너뜨린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혁명최고기구’로 설치하고, 계엄령 아래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모두 장악한 군정 최고기관으로 장면 내각을 해산시키고 정부 요직에 군 인사를 배치해 군에 의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군부 세력은 혁명재판소를 설치해 부패 정치인, 관료, 기업인들을 숙청하고 반국가행위자를 단죄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혁신계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일체의 정치 활동을 정지시키고, 기존 정당마저 해산시켰다.


쿠데타 세력이 5차 개헌을 강행하고, 시민사회는 '태아 살해'되다


이와 함께 군부 세력은 헌법을 자신들의 집권 도구로 만들기 위해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국회가 강제로 해산되고 헌정이 중단된 상태에서 이들은 절차적 하자를 은폐하기 위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재개정하고 국민투표로 헌법 개정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법을 제정했다. 계엄령 하인 1962년 11월 5일 개헌안을 공고하고 12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만장일치 의결을 거쳐(이날 계엄령을 1년 6개월 만에 해제) 17일 국민투표에 부쳤고, 26일 이를 공포했다. 제3공화국의 출범의 시작인 제5차 개헌은 계엄 아래 헌법적 개정 절차와 국민적 토론 절차가 일체 무시된 채 쿠데타 세력의 일방적 독주로 강행되었다.


4·19혁명 이후에 그나마 민의가 반영되었던 3·4차 개헌은 군부세력의 의해 폐기되었고, 그나마 싹트던 시민사회는 박정희군부정권에 의해 ‘태아 살해’된 것이다.


1962년 12월 26일 시민회관에서 5차개헌에 따른 새헌법공포식이 진행되었다. 사진_국가기록원
1962년 12월 26일 시민회관에서 5차개헌에 따른 새헌법공포식이 진행되었다. 사진_국가기록원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


5차 개헌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핵심으로 삼았다. 군부 쿠데타 세력들은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가 정쟁(政爭)과 사회혼란만을 불러왔다고 비판하고, 이를 강력한 대통령제로 개헌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일본의 천황절대주의,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히틀러를 높이 평가한, 박정희


그러나 박정희가 1963년 8월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예편하면서, 9월자로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민주주의는 사회 혼란과 북한의 적화통일을 가져올 ‘남한 자멸의 요소’로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파시스트 군장교 출신인 박정희는 일본의 천황절대주의나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히틀러를 높이 평가하면서, 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통치—즉 절대권력에 대한 의지—가 국가 운용에 효율적이라고 확신했다. 국가가 혼란할 때 군부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정당정치와 대중의 다양한 여론을 사회 혼란으로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방종 또는 국가의 ‘적’으로 돌리며, 강력한 반공정책과 국가개조를 내세운 박정희에게 애초부터 민주주의는 안중에도 없었다.


9년간의 공포정치, 국민 기본권 침해


따라서 강력한 대통령제를 내세운 5차 개헌은 정당정치를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조항들이 추가되는 등 일부 법리적 진보가 있었지만, 실제 정치상에서는 유신독재의 예행 연습에 지나지 않았다. 제3공화국 9년간 사법부의 독립성 훼선(사법파동), 국회에서의 빈번한 날치기 통과, 언론 검열, 야당정치인에 대한 사찰과 구속과 테러, 지식인과 대학생들에 바판에 대한 ‘용공’ 조작과 탄압, 무엇보다 중앙정보부(KCIA)를 새로 창설하여 정권 비판자를 감시, 고문, 도청, 체포하는 등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포정치를 반복했다.


이것도 모자라 박정희는 제3공화국 말기인 1969년 헌법상 2번까지만 가능했던 대통령 연임 제한을 없애고 3선 이상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개헌을 추진했다. 1인 영구집권의 예고라고 할 악명 높은 삼선개헌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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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10 jun

우리 역사의 주요한 굴곡에는 개헌이 함께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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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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