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④ 제2공화국과 두 번의 개헌, 내각제의 등장 그리고 지연된 정의와 소급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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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3 박한용
제2공화국 개헌 과정, 1960년 4·19혁명으로 무너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의원내각제로의 3차 개헌과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4차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곧이어 군사 쿠데타로 인해 좌절되었다.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부통령 선거의 부정으로 촉발된 학생과 시민의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의 12년 독재는 붕괴되었다. 제3차 개헌을 통해 내각제에 입각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고(제2공화국), 뒤이어 독재정권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또 한 번의 개헌이 이루어졌다(소급입법개헌).
1960년 6월 15일 재정 공포된 3차 개헌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라는 권력구조의 근본 변화를 가져왔다. 같은 해 11월 29일 공포된 4차 개헌은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부정선거에 항의한 시민들을 살상한 자들을 처벌할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개헌이다. 이 개헌은 헌법 부칙에 소급입법에 의한 처벌 근거를 마련해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등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했다.
제2공화국은 불과 1년도 못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군부세력의 쿠데타로 몰락했지만, 이 시기 이루어진 두 번의 개헌은 한국 헌정사에서 두 가지 쟁점을 제기하였다.
첫째로 3차 개헌과 관련해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각제(또는 이의 변형이라 할 이원집정제, 책임총리제)를 채택한다는 주장이 개헌 때마다 등장했다. 이번 개헌 논의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각에서는 내란사태의 본질적 원인을 윤석열 대통령의 권한 남용과 오용이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헌법상의 결함에서 찾고 그 대안으로 내각제, 이원집정제, 책임총리제 따위를 내세우기도 한다.
4차 개헌은 헌법 부칙에 소급입법 제정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소급입법금지(형벌불소급의 원칙)를 위반하고 나아가 정치 보복을 가능케 한다는 당대의 항변이 있었다. 그러나 소급입법마저 필요했던 당시의 상황이 더 중요하다. 개헌의 내용보다 개헌의 배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이재명 후보가 새 대통령에 당선되면 내란 종식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저항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4차 개헌의 배경과 과정이야말로 이러한 특별법 제정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줄 것이다.
제3차 개헌—의원내각제 개헌(1960. 6.15.)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였고, 수석 국무위원 허정(許政)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성립한 제2차 개정 헌법에 따르면, 헌법 개정의 제안 주체는 대통령, 재적 1/3 이상의 참의원·민의원 의원 혹은 50만 명 이상의 유권자여야 했다. 허정은 개헌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고 참의원은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헌은 민의원에서 주도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존의 제4대 국회에는 이승만의 여당인 자유당이 원내 과반을 점하고 있었다. 자유당은 국회 주도의 개헌을 최후의 기회로 삼아 생존과 재건의 여지를 모색하고자 했다. 민주당에서는 구파(윤보선 계열)와 신파(장면 계열)의 입장이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구파는 자유당과 함께 ‘先개헌 後총선’이라는 입장에서 개헌을 추진하고, 신파도 여기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회는 헌법개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로 변경하고 헌법재판소를 도입하는 개헌안을 마련한 후 국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했다. 본문 52개 조항과 부칙 15개 항목을 고쳤기 때문에, 사실상 제정에 가까운 수준의 개헌이었다.
3차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이 불법으로 밀어붙인 1·2차 개헌과 달리 헌법적 체계를 준수하고 민의를 나름 반영해 사실상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합헌적 개헌이었다. 개헌안이 통과된 6월 15일 국회의사당 밖에선 4백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개헌 과정에서 굴곡이 많았다. 먼저 민주당 내의 신·구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개헌 표결을 앞두고 부정자금이 유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국회 회의 도중 신·구파 사이에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회의원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자유당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자유당 일부 등 개헌 반대세력들의 지연 및 방해 작업도 계속됐다. 또 개헌안이 헌법에 정해진 무기명 비밀투표가 아니라 기립표결 형태의 공개투표로 이뤄진 것도 흠이 아닐 수 없다.
개헌 이후 4대 국회는 자진 해산되었다. 이어 총선을 거쳐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당인 5대 국회가 구성됐다. 여기서 윤보선이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장면이 국무총리로 국회의 동의를 받았다. ‘선개헌 후총선“이었기 때문에 5월 3일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으로 제6대 국무총리가 된 허정을 수반으로 한 과도내각은 8월 19일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면서 장면내각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하였다.
3차개헌은 민주당 구파와 자유당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 의원내각제로 결론이 났지만, 집권여당인 민주당 내부의 신·구파 간의 대립은 제2공화국 내내 내홍의 불씨가 됐다. 대통령 윤보선을 필두로 한 구파와 총리 장면을 앞세운 신파의 불편한 동거가 정권 내내 이어졌다.

반민주행위자를 헌법의 이름으로 처벌하라! 소급입법 개헌(1960.11.29.)
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당연히 혁명 완수를 위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이승만정권 시기 저질러진 수많은 의혹사건, 부정선거 책임자와 발포명령자 등 독재정권의 범죄와 그 잔재들을 청산하는 혁명적 후속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국회에는 자유당 의원들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4.19혁명의 과실을 거저먹다시피한 민주당은 혁명적 후속 조치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6월 15일 통과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는 당시 가장 큰 문제였던 부정축재자와 반민주행위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개헌으로 정부통령선거법이 실효(失效)되었기 때문에 부정선거 주범들에 대해서도 면소(免訴)가 마땅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3·15부정선거 관계자들을 법적 심판해야 할 의무가 있는 법조계도 문제투성이였다. 당시 현직 검사들 대다수는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인 자유당의 홍진기(洪璡基, 내무부장관), 장경근(張暻根, 자유당 정책위원장), 임철호(任哲鎬, 국회부의장) 등의 계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판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법원장 조용순(趙容淳)을 위시해서 모두 다 이승만 정권의 압력에 눌리어 양심과 지조를 팔고 재판의 독립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홍진기, 장경근, 조용순 등은 모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낸 친일법조인들이기도 했다. 이들 친일판사들이 해방 후 이승만 독재의 한 축이 된 것이다.
검찰들은 가급적 형량이 낮은 법조문을 찾아서 기소를 하였고, 재판부는 웬만하면 무죄를 선고했다. 10월 8일 이른바 6대사건 판결에서 이들 법꾸라지들의 사법농단은 절정에 달했다.
먼저 부정선거와 발포명령자에 대한 판결에서 최인규(전 내무장관)의 부정선거 혐의가 무죄가 났다. 또 발포명령사건 관련자 중 홍진기(내무부장관)·조인구(치안국장)·곽영주(경무대 비서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둘째 1956년 9월 28일 김상붕과 최훈이 실행한 장면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자 재판에서 임흥순(전 서울시장)·이익흥(전 내무부장관)·김종원(전 치안국장)·장영복(전 치안국 특정과장) 등은 모두 경형(輕刑) 내지 무죄를 받았다.
셋째 신도환(전 반공청년단장)·임화수(전 반공예술인 단장)·유지광(전 화랑동지회 대표) 등 정치깡패사건 관련자들도 모두 경형(輕刑) 내지 무죄를 받았다.
넷째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선거사범으로 기소된 등 최헌길(전 경기도지사)·최응복(전 서울특별시 부시장) 등도 모두 무죄 또는 공소 기각으로 처리되었다.
다섯째 1954년 당시 이정재(자유당 감찰부장)이 신익희 등을 제3세력으로 몰아 김동진에게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제3세력 제거 음모사건) 또한 관계자들에게 무죄 또는 경형 처리되었다.
여섯째로 신언한(전 법무부 차관)등이 민주당이 이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음모했다고 무고 교사한 사건(이대통령저격음모 조작사건)에서도 신언한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한 마디로 4월혁명으로 이승만은 권좌에서 쫓겨났지만, 이승만독재의 일파들은 사법기관의 비호 아래 대부분 무죄를 받으며 권력 일선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혁명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배신당하고 있었다.
이에 10월 8일 마산에서는 이 판결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9일에는 4월혁명부상자동지회가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엉터리 재판을 한 판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집에서도 도망쳐 숨어버렸다.
시위대의 분노와 시민들의 압력에 당황한 민주당은 10월 11일 민의원상임위를 열어 헌법개정을 전제한 특법안 제정을 결의했다. 같은 날 4월혁명 부상자들이 의사당을 점거한 가운데, 민의원 법사위는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안“을 합의하였다. 이와 함께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공판은 중지시키고 추후 특별처리하기로 했다.
혁명입법 4대 법률
4차개헌은 4월혁명 이후 민주당정권이 혁명의 완수를 방기한 것에 대한 혁명주체세력들(시민과 학생)의 책임 추궁의 결과물이었다. 11월 19일 헌법개정안 상정 제안이유서에는 그 배경으로 제2공화국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법선거를 감행한 범죄인들과 이승만 독재정부 밑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문에 걸쳐 가진 방법으로 선량한 국민들을 못살게 괴롭히고 또는 부정한 수단으로 국가재정과 공유재산을 좀먹은 수많은 반민주행위자들과 부정행위자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은 법의 불비로 말미암아 4월혁명 완수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에 대해 자아비판을 행하였다. 그리고 “헌법의 일반적 기본 원칙의 하나인 형벌불소급의 원칙과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에 일부 예외규정을 설정하여 4월 혁명 완수에 기여하고저” 부칙에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 4차 개정에 기반해 민주당은 “혁명입법 4대법률”이라고 하는 4가지 법을 제정하였다. 1) 3·15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2)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조직법, 3)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4)부정축재처리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658명의 공민권을 7년 혹은 5년간 일률적으로 제한하였으며, 1만4000명을 추가로 심사하게 하여, 총 16명의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 이를 포함한 666명의 공민권을 7년간 제한하였다. 그러나 <부정축재처리법>에 의해 출범한 부정축재 처리위원회(1961.5.4)는 민주당 정파 이해관계로 5.16쿠데타까지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다.
4차개헌은 부칙 조항에 4월혁명의 완수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해 중단된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개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혁명입법 4대 법률은 불과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권력은 시민에게서 군인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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