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고장의 특산 콩으로 전통 장을 담가 온 경북 영주의 만포농산은 기후변화와 일손 부족으로 인해, 10년 후에도 전통 장을 담글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우리 전통 발효장을 지키려는 노력을 정병우 대표에게 듣는다.
2024-12-19 정병우
정병우 / 만포농산 무량수 대표, 태평양조 공동창업자
15년 넘게 해외에서 여러 기업들의 신사업이나 사업 전략을 만드는 일을 하다 갑자기 가업을 물려받게 되어 경북 영주로 귀농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사업과 농촌의 어려움을 톡톡히 경험 중인 4년차 초보 사장입니다. 거창한 목표나 계획보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묵묵히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가려 노력 중입니다. 정말 끊임없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한정된 자원 안에서 해결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장과 전통식품을 만드는 무량수의 대표이자, 이런저런 술을 만드는 태평양조의 공동창업자입니다.
소백과 태백이 갈라지는 자락에 터잡은 무량수
저희 무량수가 위치한 이곳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남녘마을은 소백과 태백이 나뉘는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여름에 폭우나 태풍 피해가 적고, 가을 볕은 쨍하니 좋은지라 사과뿐만 아니라 콩이나 깨도 제법 실하기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덕분에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고 깨를 볶아 기름을 짜는 저희에게 지역의 좋은 콩과 깨는 큰 자랑거리입니다.
"매일 꼬쏘~혀유"
저희는 장을 주로 만들어 팔지만 직접 담근 장아찌도 팔고, 매일 주문 받은 만큼만 깨를 볶아 착유하는 참기름과 들기름도 고객들 반응이 꽤나 좋습니다. 저를 포함한 무량수 식구 중에는 명장, 명인 칭호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무량수가 만드는 먹을거리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전문가들입니다. 장은 저와 실장님, 장아찌는 척척박사 홍반장님, 그중 충청도에서 이곳에 시집와 1989년부터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현미 아주머니는 참기름, 들기름에 관해서는 솜씨 좋기로 호가 난 분입니다.
몇십 킬로씩이나 되는 깨포대를 나르고 물에 씻어 볶아내고, 착유기에 넣는 일은 젊은이들도 손사래를 치는 제법 피곤한 일입니다. 거기에 아무리 냉방시설을 잘 갖췄다 해도 더운 여름날 깨 볶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기름방 앞을 지나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창 깨를 볶고 있는 현미 아주머니를 만나 한마디 묻습니다.
“요새 일하는 거 좀 어떠시니껴(어떠세요)? 할 만하이껴 (할 만하세요)?”
그러면 그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보시는 것처럼 매일 꼬쏘~혀유.”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웃음과 여유만큼이나 기름을 잘 짭니다. 무엇보다 그는 그가 짜는 기름만큼이나 곱고 고소합니다.
기후변화로, '지역 산물을 쓴다'는 30년 원칙을 깰지도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그의 고소한 기름맛이 예년만 못하다는 소리가 간혹 들립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이가 정성껏 키운 깨를 구해, 똑같은 방식으로 만드는데 맛이 변했다니 이상합니다. 무량수 식구들이 다같이 모여 기름 맛을 보는데 진짜로 예전보다 고소한 맛과 향이 조금은 부족한 듯 느껴집니다.
깨를 구해 오는 실장님과 차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요즘 들어 여름에 비가 잦고, 가을에도 잔비가 내려 지역에서 나는 깨가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말씀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예전보다 알도 조금 작고, 색도 못한 듯 합니다. 실제 지역의 수확량은 꽤나 줄었고 가격은 크게 올랐습니다. 여기저기 여쭤보니 이제 깨는 경기도 또는 그 위쪽에서 나는 게 더 품질이 낫다고 합니다. 남쪽은 덥고 습해져서 깨 키우는 게 점점 어렵답니다. 저희도 이젠 양평이나 강원도 쪽의 깨를 알아 봐야 할 듯합니다. 지역에서 나는 산물로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을 만든다는 아버지 때부터 지켜온 원칙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기후변화는 30년 넘게 지킨 원칙을 스스로 깨야 할 정도로 빠르고 심각합니다.
12월인데, 메주 만들 콩이 시장에 안 나와
깨 뿐만이 아닙니다. 콩은 그 상황이 더합니다. 저희 장에는 영주 특산물인 부석태라는 콩을 사용합니다. 일반 백태보다 알이 1.5배 정도 크고 단맛과 감칠맛이 뛰어나 메주 만들라고 콩을 삶으면 모두들 집어먹기 바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작황을 떠나 부석태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마을 이장님의 말씀이 여름이 너무 뜨겁고 가물어 알이 제대로 여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가을까지 기온이 너무 높았던 탓에 12월 초인데 아직 콩을 털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11월 말에는 메주를 만들어야 설 지나고 장을 담글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월에 아직 메주를 만들 콩이 시장에 나오지도 못하였습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콩도, 깨도 타들어 가지만 제 속은 더더욱 타들어 갑니다.
일단 부석태가 아닌 일반 백태를 구해 메주를 만듭니다.12월인데도 기온이 워낙 높아 겉말림 끝내고 발효에 들어간 메주가 3일만에 쉬어 버렸습니다. 온도와 습도 관리에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썼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루 종일 고생해서 만든 메주 400여장을 전부 폐기하기로 결정합니다. 손해도 손해지만 이러다가 메주를 만들고 발효하는 과정 전체를 전부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메주를 만들고, 몇 달씩 메주를 발효하고 건조할 필요 없이 일주일, 보름이면 끝내서 장을 담그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걸 우리 전통 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단 올해 메주를 문제 없이 만들기도 벅찹니다.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하지만 어디 여쭤 볼 곳도, 고민을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다들 걱정은 많지만 해결 방안은 없습니다.
산지에서 얻은 부석태로 장을 담그는 과정. 사진_ 만포농산
농가 일손 부족으로 제품 원료를 구하기가 당장 어려워
사실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기후 문제보다 인력수급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곧 쉰이 되는 저도 이곳에선 아직 젊은이입니다. 저희가 위치한 이곳 남녘마을의 200여명 인구 중 베트남에서 시집온 뒷집 새댁과 그 집 아이들을 제외하면 저와 제 처가 가장 젊습니다. 만포농산 식구 대부분도 환갑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매년 업무효율은 떨어져만 갑니다. 젊은 사람 손이 급한데 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건 시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내에서 사업하시는 분께서 얼마전 30대 중반 남자직원 한 명 뽑았다고 자랑하십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사업은 커지는데 직원수는 당최 늘지를 않습니다. 이래서야 십년이나 버틸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젠 일손 부족한 게, 앞으로 이 사업이 십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제품을 만들 원료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한동안은 경기 북부나 강원도에서 원료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이 역시도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도 이제 참깨가 아니라 올리브 키워서 올리브기름 착유하자는 농 아닌 농을 제법 자주 듣습니다. 한동안 올리브라도 키울 수 있겠지만 언젠가 그 어떤 것도 키울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장 담그고 남은 염수 찌꺼기로 제초하고
얼마 전부터 작지만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꿔보려 노력 중입니다. 너른 마당에는 이제 더 이상 제초제와 비료를 치지 않습니다. 장을 담그고 남은 염수 찌꺼기로 제초제를 대신하고, 잘못된 메주나 음식물 찌꺼기, 건초, 반려견의 배설물 등을 섞어 퇴비를 만들어 비료로 사용합니다. 3년 전에는 모든 포장재를 재활용 가능한 재질로 바꿨습니다. 상자 및 완충재는 재활용 가능하거나 재활용한 종이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대포장을 피하기 위해 상자나 포장재 크기도 최소화했습니다.이렇게 혼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싶어 환경재단에서 진행하는 ESG 워크샵에 지원해 훌륭한 분들과 같이 두 달 넘게 교육도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환경재단에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나아간 것도 같지만 스마트팜 업체와 파트너쉽을 맺고 투자도 했습니다. 내년에는 경유보일러를 우드팰렛 보일러로 교체하고, 일부 시설에는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할 생각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단 생각이 듭니다.
마당에 벌레와 새들이 제법 늘었고, 삶도 조금씩 고소해지기를
그런데 사실 변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여전히 기온과 날씨는 제멋대로이며 작물들은 잘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희 집 마당에 벌레와 새들이 제법 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오래된 감나무에 후티새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남녘마을 구석은 조금이나마 깨끗해졌습니다. 저희 고객님들 댁에 쓰레기도 조금은 줄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들이 쌓여 천천히 나아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현미 아주머니가 짜시는 참기름이 고소하기를, 나아가 나이든 현미 아주머니의 일을 배우고 있는 베트남 출신 정희 씨의 삶도 조금은 고소해지기를, 그리고 모든 분들의 삶도 모두 조금은 고소해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경북 영주에서 30여년간 지역의 좋은 농축산물을 가지고 장류를 포함한 여러 전통식품을 만들고 있습니다.제품명인 '무량수'는 ‘다함이 없는 수명’, 조금 의역하자면 ‘끝이 없는 생명’이란 의미로 우리 제품을 드시는 고객들이 항상 건강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되, 새로운 시도와 혁신을 통해 한국 음식이 가진 즐거움을 모두에게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성재 쉐프의 미슐랭 3스타 모수, 뉴욕에 위치한 주옥 등 미슐랭 스타를 포함한 여러 유명 레스토랑과 기업들에 제품을 납품하고 있습니다.
인스타 무량수 만포농산
홈페이지 만포농산 무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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