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3 김사름 기자
토마스 베리가 주창한 지구법, ‘존재할 권리’, ‘서식할 권리’, ‘지구의 진화에 참가할 권리’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은 21세기 초 제안된, 법과 거버넌스의 전환이론이자 법철학이다. 이는 미국의 문명 사상가이자 생태신학자인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2001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지구법은 근대의 인간 중심적 법체계가 지금의 생태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베리는 저서 『위대한 과업』에서 현재의 법체계는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자연적 실체도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기본 권리는 “자연 체계 안에서 구성 요소들이 자신들의 기능과 역할을 실현할 수 있는 서식지와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그는 2001년 회의에서 ‘지구법학의 열 가지 원리’를 발표했다. 그중 핵심 원리는 ‘존재할 권리’, ‘서식할 권리’, ‘지구의 진화에 참가할 권리’다.
인간 중심에서 자연 중심으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지구법 관점에 보면 현재의 법 체계는 지구 전체가 아닌 지구의 일부분인 인간만을 위한 법이다. 예를 들어 산림 벌채를 한 사람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 벌채한 것이다. 하지만 '지구법' 관점에서 보면 산림 벌채는 위법이 될 수도 있다. 산림 벌채 행위는 인간법에 따라 허가를 받은 적법한 행위지만 그 행위로 인해 지구 전체의 안정성에 위해가 가해진다면, 지구법에서는 위법한 행위가 된다. 이것이 '지구법' 철학이다. '하천법'을 예로 들어 보자. 지금까지 하천은 치수(治水), 이수(利水)라는 개념으로 다뤄져 왔다. 어떻게 해야 물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통제해야 인간에게 유용할지만 고려되었다. 허나 '지구법' 관점으로 접근하면 ‘하천’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실체로서, 수량(水量)과 유수(流水), 즉 물의 양과 물의 흐름이 기본 권리다. 따라서 유수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수나 치수를 위해 '댐'을 건설한다면, 위법한 행위가 될 수 있다. 홍수 방지와 농업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을 위함이라 하더라도, 강 자체의 본질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여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게 지구법 철학이다.
자연이 가진 권리와 주체성
지구법은 자연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간법에 수용하자고 제안하는 법철학이다. 박태현 강원대 로스쿨 교수는 “지구법은 특별한 개별법을 만들자는 게 아닌, 접근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현재의 인간 중심적인 법이 변하지 않으면 기후위기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법은 인간 중심의 법이다. 이 근대법과 지구법의 가장 큰 차이는 인간의 역할과 자세다. 지구법에서 인간은 지배자가 아닌 ‘대변자’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지구 중심주의’로의 전환이다. '국가의 안보'는 '지구의 안보'로, '민주주의'는 '생명주의'로 전환된다. '국가연합'은 '종의 연합'으로, '세계평화'는 '지구평화'로 주체와 목표가 바뀐다. 지구법의 선례는 대표적으로 1972년 시에라클럽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더글러스 당시 대법관은 '자연물이 원고적격을 가지며, 환경단체가 자연물의 법적 후견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 한 바 있다. 일례로 영국의 페이스인네이처 (Faith In Nature)라는 화장품 회사는 2022년 ‘자연’을 사외이사로 임명했다. 후견인(Proxy)이 자연의 입장에서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자연의 관점에서 발언하고 투표한다. 이 사례는 '자연'을 법적 주체로 인정하고 그 권리를 보장하는 '지구법'의 핵심 철학이 구현된 것이다.
법이 자연을 품은 세상
에콰도르는 2008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세계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한 국가다. 에콰도르 헌법 제7장은 "자연의 권리(Rights of Nature)"를 주제로 한다. 법적 주체로 자연을 인정하고, 자연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고유한 존재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지구법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에콰도르는 법적 시스템 내에서 자연을 단순히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권리를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지구법의 원칙을 실현했다. 뉴질랜드 황거누이강(Whanganui River)은 세계 최초로 법적으로 인간과 같은 권리를 인정받은 강이다. 이 강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오랫동안 신성하게 여겨 온 강으로, 강 자체가 살아있는 조상으로 여겨졌다. 이를 반영해 뉴질랜드 정부와 마오리 부족은 황거누이강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적 인격 부여는 지구법(Earth Jurisprudence) 원칙을 법률에 반영한 사례로, 자연이 법적 주체로서 권리를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한 사례다. "황거누이강 법(The Te Awa Tupua (Whanganui River Claims
Settlement) Act 2017)"은 법에 따라 강을 "테 아와 투푸아(Te Awa Tupua)"라는 법적 주체로 간주하며, 인간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이는 "나와 강은 하나이다(I am the river and the river is me)"라는 마오리족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법에 따라 두 명의 법적 대리인(하나는 마오리 대표, 하나는 정부 대표)은 강의 이익을 대변하고, 강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강의 권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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