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농업 | 위험수위 넘은 식량 자급, 농업을 국가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해야
- Theo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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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5 최민욱 기자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OECD 최하위 수준으로, 주요 곡물의 80%를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다. 기후위기와 국제 공급망 불안정이 겹치면서 식량 안보 위기가 심화되고 있으며, 수입선 다변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

벼랑 끝에 선 한국의 식량 시스템
한국이 식량 안보 취약 국가라는 사실은 여야가 공감하는 위기다. 이재명 정부는 식량 안보 강화를 국정과제로 포함시키며 한국형 식량안보지표 개발에 착수했다. 식량 안보 개념을 명확히 하고, 한국의 식량 안보 수준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하자는 것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9.3%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고, 밀·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자급률은 2021~2023년 평균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체 농식품 수입액은 2022년에 501억 달러를 넘었고, 수입 식품의 주요 공급국은 미국과 중국, 브라질, 태국, 베트남 등 소수 국가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위기와 지정학적 충격이 겹치면 이 구조는 바로 취약해진다.
식량 안보 개념을 넓혀야 위기가 보인다
식량 안보는 단순한 생산량 문제가 아니다. 1996년, 세계식량안보정상회의는 식량 안보를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정의하였다. 가용성(Availability), 접근성(Access), 활용성(Utilization), 안정성(Stability)이다. 충분한 식량을 생산한다고 해도, 소득 수준이나 가격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면 식량 안보가 확보되지 않는다. 영양 구성과 위생 상태가 적절하지 않으면 활용성 차원에서 취약하다. 기후·전쟁·경기침체로 공급과 가격이 반복적으로 흔들리면 안정성도 확보되지 않는다.
한국의 식량 안보 담론은 여전히 생산량과 자급률에 치우쳐 있다. 쌀 자급률이 100%에 가깝다는 사실이 자주 언급되지만, 사료용 곡물과 밀·콩의 수입 의존 구조, 식품 가공 단계에서의 해외 의존도, 저소득층의 가격 접근성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뒷순위에 놓인다. 식량 안보를 생산 중심의 단일 지표로 이해할수록 구조적인 위험을 조기에 포착하기 어렵다.
위험이 집중된 한국의 식량 수입 구조

한국은 전형적인 식량 순수입국이다. 농식품 수입액은 2020년 360억 달러에서 2022년 501억 달러로 빠르게 증가했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곡물·육류·사료용 원료다. 세계은행 WITS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식품 수입 주요 파트너는 미국, 중국, 태국, 브라질, 베트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공급국 다변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구조다.
곡물만 놓고 보면 의존도는 더 크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이 소비하는 곡물의 약 80%는 수입에 의존해 왔고, 2023년 기준 곡물 전체(사료 포함) 자급률은 22.2%에 그친다. 사료용 옥수수와 밀은 대부분이 수입이다. 국내 축산업과 가공식품 산업이 사실상 해외 곡물에 기대어 돌아가는 구조다. 공급망 상단에는 소수의 곡물 메이저와 몇 개 국가가 놓여 있고, 한국은 그 말단에서 가격과 물량을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다.
해외발 식량 충격 흔드는 한국 밥상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의 식량 시스템이 해외 공급망에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러낸 첫 계기였다. 국제 해상 운임과 곡물 가격이 급등하자 국내 라면·빵·육류 가격이 몇 달 시차를 두고 상승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인도의 밀 수출 제한도 국제 곡물 가격을 다시 끌어올렸다. 국내 생산량이 크게 줄지 않았는데도 가격이 불안정해진 이유다.
PLOS ONE(2025) 게재된 연구논문에 따르면, 한국 농업이 겪는 기후위기의 위험은 단지 국내 생산량 감소에 있지 않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적용해 한국 농업을 분석한 결과, 국내 기후변화에 따른 수확량 변화보다 세계 농산물 교역 구조 변화가 한국의 농업·식품 가격에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해외 생산국의 가뭄·홍수·정책 변화가 국제 가격과 수출 제한으로 이어지고, 이 파동이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가격과 수급 불안정으로 증폭되는 구조다.
식량 안보를 생산이 아니라 시스템의 안정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 분석에서 나온다. 식량 접근 경로가 해외 공급망에 과도하게 집중된 상황에서는 국제 가격과 물류 변동성이 곧 국내 식탁의 변동성이 된다.
수입선 다변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위험
수입 의존 위험을 인식하면 자연스럽게 수입국을 늘리는 전략이 대안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수입선 다변화는 실제로 구조적 리스크를 충분히 분산하지 못한다.
곡물 시장은 일부 주요 수출국과 글로벌 곡물 기업이 지배하고 있어 국가 수를 늘린다고 해도 리스크가 실질적으로 분산되기 어렵다. 기후대가 유사한 국가들끼리는 기후 충격이 동시에 발생하기도 한다. 새로운 공급국을 확보해도 원료 품질, 물류 조건, 가격 협상 구조가 기존 공급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수입선 다변화는 필요하지만 핵심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해외 공급망 자체의 구조가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수입선 확대만으로 해외 의존 구조의 위험이 완화되지 않는다. 해결을 위해서는 국내 생산 기반과 비축 체계, 가공·사료 산업의 구조까지 함께 손봐야 한다.
일본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 위험의 구조
일본의 사례는 해외 의존 구조가 만들어 내는 위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일본은 쌀 자급률이 높고 농업 기술 수준도 높지만, 식량 시스템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 곡물에서는 한국과 유사한 취약성을 안고 있다. 일본 농림수산성 자료에 따르면 밀 자급률은 15% 내외, 콩 자급률은 6% 수준이며 사료용 곡물은 대부분 해외에서 조달한다. 이러한 구조는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외부 충격이 발생하면 전체 공급망이 흔들릴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 나타난 식품 가격 상승은 단일 품목의 문제가 아니라 해외 의존 구조의 연쇄 반응이었다. 기후위기로 수출국 생산량이 흔들리고 국제 가격이 상승하는 시점에 엔저가 겹치자 수입 단가가 급격히 상승했다. 일본산 쌀은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생산되지만,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원료가 해외에 묶여 있기 때문에 가공식품·축산·외식 부문 전체가 가격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주요 곡물의 높은 해외 의존률이 가격 전반으로 확산되는 구조가 확인된 것이다.
이 사례는 “쌀 자급률”처럼 일부 품목의 높은 국내 생산이 시스템 안정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식량 안보는 품목 단위가 아니라 시스템 단위에서 평가해야 한다. 일본의 구조적 취약성은 해외 공급망이 흔들릴 때 내부 조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에 있다. 한국 역시 동일한 구조에 있고, 국내 생산 기반이 더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격의 파급 속도는 일본보다 더 짧을 가능성이 크다. 해외 의존 구조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국가별 특수성이 아니라 공급망 구조에서 비롯되는 공통 문제다.
식량 안보 지표는 해외 의존 구조를 보여 줘야 한다
한국형 식량안보지표가 의미를 가지려면 단일 자급률 지표로는 포착할 수 없는 시스템적 위험을 정량화해야 한다. 자급률은 국내 생산과 소비의 비율만을 보여 주기 때문에 해외 공급망의 취약성, 수입선 집중도, 물류 리스크 같은 핵심 변수를 반영하지 못한다.
해외 의존 구조를 지표에 담으려면 최소한 네 가지 영역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별·기업별 수입 의존도. 특정 국가나 기업이 전체 수입량의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국제 가격과 물량 조정에서 수입국의 선택지가 얼마나 제한되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가 필요하다. △주요 곡물과 식품 원료의 비축 가능 물량과 회전율. 비축은 단순 편의 수단이 아니라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핵심 인프라다. △해외 공급망의 물류·환율·정책 변동성. 수출 제한이나 물류 지연이 국내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 환율 변화가 가격에 미치는 폭을 수치화할 필요가 있다. △국내 기반의 구조적 요소. 농지 면적과 집적 정도, 농업 인력의 연령 구조, 전략 품목 재배 기반, 사료 자급 능력 같은 요소는 해외 의존 구조를 완충할 수 있는 내부 여력을 보여 준다.
식량안보지표가 생산량 중심에서 시스템 안정성 중심으로 전환되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취약성이 드러난다. 해외 공급망 충격이 반복되는 시대에는 공급 경로의 구성과 변동성, 내부 완충 능력, 비축·대체 가능성이 식량 안보의 핵심 요소다. 한국형 지표는 이러한 구조적 리스크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전략 작물과 비축 체계를 재설계해야 한다
해외 의존 구조를 줄이는 현실적 방법은 국내 생산 기반과 비축 체계를 전략적으로 재편하는 일이다. 모든 곡물을 국내에서 조달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품목을 어느 수준까지 국내 생산해야 하고 어떤 품목은 비축 중심으로 운영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전략 작물은 단순히 재배 면적을 늘리는 정책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품종 개발과 재배지 선정, 수매 가격 체계, 가공 산업과의 연계를 포함한 산업적 설계가 필요하다. 전략 작물은 사료·가공·식품산업의 수요 구조와도 분리해 다룰 수 없다. 예를 들어 국내 밀을 늘리려면 제분 산업의 기술 표준과 가격 구조까지 조정해야 하며, 콩 생산을 확대하려면 가공용 콩과 식용 콩의 시장 수요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비축 체계 역시 재구성이 필요하다. 기존 비축은 품목별 비축량과 보관 기간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시스템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회전율, 민간 재고 연계, 대체 원료 사용 가능성, 비축 시설의 분산 구조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해외 공급망 중단을 전제로 비축 체계를 설계해야 하며, 공급 중단 기간별 대응 시나리오도 마련해야 한다.
이 전략은 자급률 목표를 높이기 위한 정책이 아니다. 해외 공급망의 변동을 국내 시스템이 흡수할 수 있도록 하는 완충 장치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구조에서 전략 작물과 비축 체계의 설계는 식량 안보의 핵심 축이다.
농업은 국가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
해외 의존 구조의 위험을 줄이려면 농업을 다시 국가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정의해야 한다. 현재 농업은 주로 농가 소득 보호와 지역 유지의 관점에서 접근되어 왔다. 생산 기반과 산업 구조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차적 위치에 놓였다. 이 관점에서는 식량 안보 체계가 요구하는 규모·구조·기술·데이터 기반을 확보하기 어렵다.
국가 시스템으로서의 농업은 생산량 확대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해외 공급망이 흔들릴 때 국내 시스템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농지 집적과 규모화, 기후 대응 설비, 품종 전환 속도, 데이터 기반 생산 관리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전문성을 갖춘 인력이 장기적으로 농업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구조도 필수적이다.
해외 공급망이 불안정한 시대에는 농업을 단순한 산업으로 다루기 어렵다. 농업은 외부 충격에 대응하는 국가적 완충 장치이며, 이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면 해외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시스템의 취약성은 악화된다. 농업을 국가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공급망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선을 만드는 작업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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