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재난리포트12 ⑧ 기후질병(2) | '기후불안', 정신건강이 기후 정책의 핵심 과제로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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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일 전
2025-08-14 최민욱 기자
기후위기는 폭염·홍수·산불 등 재난을 통해 신체 피해뿐 아니라 우울·불안·상실감 등 정신건강 악화를 유발한다. 전 세계 33~36억 명이 취약하며, 관련 사회경제적 비용은 2030년까지 연간 47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WHO와 국제사회는 정신건강을 기후 정책의 핵심 과제로 규정했으나, 대부분 국가의 대응은 미흡하다. 한국도 단기 사후 지원 중심으로 구조적 취약성이 크다. 대응 방안으로 자연 기반 치유, 지역사회 연결망, 정신건강 체계 강화가 제시되며, 다층적 통합 전략이 요구된다.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 축 "정신건강"
지구온난화로 인한 폭염,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신체적인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를 함께 남긴다. 2022년 발표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AR6, WGII)는 기후위기가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과 웰빙도 악화시킨다고 명시한다. 산불·폭풍·홍수 같은 기후 극단이 발생한 지역에서 정신질환 발생률이 상승한다는 평가에 “매우 높은 신뢰도”를 부여했다. 보고서는 재난 트라우마뿐 아니라 지속적 불안·상실감 같은 정서 악화를 함께 다룬다. 국가 적응 전략에 이를 선제적으로 통합하라고 권고했다.
국제 비영리단체 유나이티드 GMH(United for Global Mental Health)는 2024년 임팩트 리포트에서 전 세계 기후변화 취약 인구가 33~36억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한 정신건강 악화, 생산성 손실, 의료비 증가 등 사회적 비용이 2030년까지 연간 470억 달러(약 6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2024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기후변화와 정신건강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5월 제77차 세계보건총회에서 채택된 “기후변화와 보건” 결의안은 기후변화를 “전 지구적 공중보건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명시하고, 정신건강을 기후변화의 핵심 피해 영역으로 인정했으며 2024년 12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기후변화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건강 도전 중 하나”라며 각국 정부에 기후변화에 따른 정신건강 지원 체계 구축을 촉구했다. 기후위기 시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와 함께, 정신건강 위기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마음의 언어들

2017년 미국심리학회(APA)는기후변화가 우울·불안·분노·무력감을 복합적으로 유발한다고 보고했다. 이후 기후위기로 인한 복합적인 우울감과 불안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생태불안(eco-anxiety), 생태/기후 슬픔(ecological/climate grief), 솔라스탤지어(solastalgia), 외상 전 스트레스장애(Pre-traumatic stress disorder) 등이 대표적이다.
생태불안(Eco-anxiety)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 파괴에 대한 만성적인 두려움을 뜻한다.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 뉴스가 잦아지면서 생기는 막연한 불안감이다.
기후슬픔(Climate grief) 또는 생태슬픔(Ecological grief) 기후 변동으로 사랑하는 자연과 터전을 잃어가면서 느끼는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말한다.
솔라스탤지어(Solastalgia) 급격한 환경 변화로 고향이나 삶의 터전이 낯설게 변해버리면서 느끼는 상실감과 고뇌를 가리킨다. 호주의 환경철학자 글렌 앨브리치가 만든 용어로, 익숙했던 자연이 사라질 때 뿌리가 뽑힌 듯한 고향 상실의 감정을 담았다.
외상전 스트레스장애(Pre-traumatic stress disorder) 앞으로 닥칠 기후재앙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감과 공포로 인해 생기는 불안 증상이다.
학계는 이들 정서를 ‘생태 감정"(eco-emotion)’이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재난 경험 유무와 상관없이 환경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성 불안과 상실감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폭염과 재난이 남기는 보이지 않는 상처
극단적인 기상 현상은 직접적인 인명 피해뿐 아니라 장기적인 심리적 상처를 유발한다. 기록적인 폭염은 불쾌지수를 높여 분노와 공격성을 촉발하고 폭력, 범죄, 사고 발생률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고된다. 실제로 미국 연구에서 기온이 1℃ 오를 때 자살률이 증가하는 상관관계가 발견되었고, 수면장애 악화 등 정신건강 악화와의 연관성도 확인되었다. 2010~2019년 미국의 보험 청구 자료 분석에 따르면, 유난히 더운 날에는 우울증·불안장애·조현병 등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기후재난이 남긴 트라우마는 더욱 오래 지속된다. 산불, 홍수, 허리케인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은 사건 후 오랜 기간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문제는 이러한 재난이 기후변화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호주처럼 광범위한 산불을 겪은 지역에서는 잿더미로 변한 풍경을 보며 큰 상실감과 불안을 호소하는 사례가 보고됐다.
자연재해는 인간이 통제하기 어렵고 원인을 한 개인이나 집단에 돌리기도 힘들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더욱 깊은 무력감과 절망에 빠지기 쉽다. 인재와 달리 분노의 방향을 잃은 공허한 마음의 상처를 남기며, 일부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종말론적 불안을 겪는 등의 심리 반응을 보인다.
젊은 세대에 퍼지는 기후 불안과 우울
이러한 극단적 기후 현상의 증가와 더불어, 젊은 세대는 기후위기의 장기적 영향에 대한 두려움으로 새로운 종류의 불안을 겪고 있다. 국제학술지 '란셋(The Lancet Planetary Health)'에 2021년 발표된 전 세계 10개국 청년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기후 불안에 관한 대규모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16~25세 청년 1만 명 중 75%가 "미래가 두렵다", 절반 이상이 "인류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5%는 기후변화에 대한 걱정으로 일상생활(식사, 수면, 업무 등)에 지장이 있다고까지 호소했다.
기후 불안(climate anxiety)은 서구 선진국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당 조사에서 필리핀, 인도, 나이지리아 등 기후위기에 취약한 개발도상국 청년들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가장 심하게 호소해, 기후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 전 지구적 현상임을 보여 주었다.
전문가들은 기후 불안과 우울감 자체는 비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위기 상황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강조한다. 기후위기의 현실을 직면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두려움과 슬픔,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정서가 지나치게 심해질 경우 우울증, 범불안장애, 수면장애, 자살 생각 등으로 악화되어 일상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으며, 이 단계에 이르면 전문적인 심리 치료와 지원이 필요하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급증하는 기후 정신건강 문제에 사회가 대비되어 있는가이다.
더디기만 한 정부와 사회의 대응
기후위기로 인한 정신건강 악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와 국제적 우려는 빠르게 축적되고 있지만, 각국의 정책 대응은 여전히 미흡하다. 2025년 2월 네이처에 실린 논평은 “기후변화와 정신건강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와 증거가 늘고 있음에도, 대부분 국가의 기후 정책에서 정신건강은 여전히 부차적 취급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21년 회원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국가 보건·기후변화 계획에 정신건강 및 심리 지원 대책을 포함한 국가는 95개국 중 9개국에 불과했다. 심지어 선진국에서도 기후변화로 인한 우울증 치료나 심리 지원을 공식 정책에 반영한 사례는 극히 드문 실정이다. 이러한 정책적 공백은 기후위기 시대의 보건 대응 체계를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국 역시 기후위기로 인한 정신건강 대응 체계에서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산불·홍수 등 급성 자연 재난이 발생하면 심리 상담 인력을 파견해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지원하는 사후 대응 중심의 체계를 운용해 왔다. 이러한 조치는 최근의 대형 산불과 수해 현장에서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으며, 재난 직후 단기 상담과 심리지원팀 운영 등 긍정적 성과도 있었다.
폭염, 가뭄, 해수면 상승처럼 느리고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기후위기 특유의 장기적 위기에는 이 같은 단기 사후 지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후변화와 정신건강을 연계한 선제적·종합적 전략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학계 논의도 본격화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2023년 12월 발표된 ‘제3차 국가기후위기적응대책’에서 기후재난으로 인한 정신질환 증가 등 정신건강 영향이 정책 문건에 처음으로 언급되었고, 내년 평가 예정인 제2차 기후보건영향평가 보고서에는 정신건강 분야를 포함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이는 기후위기가 초래할 심리·정서적 피해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된다.
교육과 인식의 격차가 만든 무방비 상태
정부 차원의 미흡한 기후 대응과 더불어, 기후위기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도 국가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인식 격차에는 어릴 때부터 받은 환경교육의 정도뿐 아니라, 기후위기 관련 정책·미디어 보도 빈도, 재난 경험의 강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호주에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대형 산불 이후 불안을 호소하며 상담을 받는 청소년이 적지 않다. 반복되는 산불과 이상 기후를 직접 겪은 경험이 안전과 이주 문제에 대한 불안을 심화시킨 결과다.

반면 한국에서는 기후위기로 정신건강 치료를 받는 사례가 드물고, 특히 성인 중에는 병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는 개인의 정신적 강인함 때문이 아니라,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정책적 인식 자체가 낮아 위기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재생에너지 비중과 감축 정책 실효성 부족 등 구조적 한계로 인해 2025년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평가에서 67개국 중 63위를 기록했다. 산유국을 제외하면 사실상 꼴지다.
이러한 ‘둔감한 사회 분위기’는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취약한 기반이 된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의 심리적 영향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교육과 미디어를 통한 공감대 형성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국민이 위기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대응 역량도 함께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우울에 맞서는 치유와 적응 방안
이러한 정책적·사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가 몰고 온 정신건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적응 전략이 국내외에서 모색되고 있다. 특히 자연을 활용한 치유법이 주목받고 있다.
영국의 국립보건서비스(NHS)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자연과 접촉하는 활동을 처방하는 이른바 "자연 처방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의사가 우울·불안 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 공원 산책, 정원 가꾸기, 숲속 걷기 같은 야외 활동을 권유하고 그 실천을 돕는 것으로, 자연의 긍정적 효과로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는 시도다. 예컨대 영국 처방전에는 "매일 새소리를 들으며 3분간 눈을 감고 있기" 같은 구체적인 행동들을 월별로 제시한다.
미국 일부 지역도 비슷한 접근을 도입했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등급별로 마련된 산책로를 "처방"하여 야외 신체활동을 늘리도록 유도한다. 자연 기반 치유법들은 우울과 불안을 완화시킴과 동시에 탄소 없는 건강 증진 활동이라는 점에서 지속가능한 치료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 치유와 함께 커뮤니티와 연결망 구축이 또 다른 대응 방향으로 제시된다. 기후위기로 인한 불안은 혼자 앓을수록 증폭되기 쉽다. 반대로 타인과 함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해결 행동에 나설 때 심리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기후행동에 참여하는 청년들은 무력감이 희망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보고하기도 한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기후우울의 해법은 공동체에 있다고 말한다. 지역사회에서 또래 집단이나 이웃들과 기후변화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후 카페' 모임, 심리상담가와 환경활동가가 협력해 토론 워크숍을 여는 등의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의료계 내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어, 미국 정신과의사들은 기후정신건강 동맹을 결성하고 의사들 스스로 탄소중립 실천을 다짐하거나 청소년 기후소송을 지원하는 등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마음 건강을 지키다
기후위기로부터 마음 건강을 지키는 일은 단순한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다. 극단적인 기후 충격이 반복되면 개인의 심리적 안정이 무너지고, 이는 곧 공동체의 회복력(resilience)과 대응 역량을 약화시킨다. 반대로, 사람들이 정신적 안녕과 희망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위기에 맞서 적응하고 혁신하는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기후위기 속에서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다섯 가지 행동 지침을 제시했다. △안정적이고 접근 가능한 정신건강 지원체계 구축, △지역사회 기반 심리 지원 강화, △기후 적응 정책에 정신건강 요소를 통합하는 방안, △다부문적·협력적 거버넌스 메커니즘 수립, △기후위기와 정신건강 연구·데이터 강화이다. 이는 기후 정책과 보건정책을 분리된 영역으로 취급하는 기존 관행을 넘어, 기후위기의 심리·사회적 영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결국 필요한 것은 기후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면역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구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정부의 제도적 지원, 의료계의 전문 개입, 교육계를 통한 인식 확산, 지역사회의 상호돌봄 네트워크 등 다층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기후 과학이 보내는 경고의 목소리만큼이나,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보는 목소리에도 힘을 실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상처까지 살피고 치유하는 사회적 노력이 지속될 때, 비로소 우리는 기후위기 속에서도 지속가능한 삶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건강도 자연에 답이 있는 것 같군요. 몸과 마음의 치유를 위해서는 공동체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는 데 우리 지역 공동체가 점점 해체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