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흔들리며 균형을 잡는, 춘분
- hpiri2
- 3월 20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21일
2025-03-20 배이슬
하루만에 많은 눈이 녹았다. 꽃은 매년 더 일찍 피고, 기온은 매년 더 큰 폭으로 변한다. 때 아닌 추위를 만나니 꽃이 지거나 상처를 입는다. 벌들이 깨어날 땐 먹을 게 없고, 꽃은 안정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게, 봄을 가른다는 춘분에 맹렬한 기후위기를 마주한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봄을 가르는 춘분
춘분은 봄을 세우는 입춘과 여름을 세우는 입하 사이 가운데에 자리한다. 그래서 춘분이라는 말은 봄의 가운데서 봄을 나눈다는 뜻이다. 또한, 조화와 균형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지’(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에서 ‘하지’(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로 가는 길목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춘분으로부터는 점점 낮이 길어지니 게으름을 피워 봐야 일찍 날이 밝아 좀이 쑤시고, 부지런을 떨어 봐야 매일 빨라지는 해보다 늦어 허덕이는 때가 시작된다.

가득 쌓인 눈을 보며 과연 봄이 오는가 싶더니, 바람 끝 시샘하는 추위가 들어도 논밭의 눈은 녹아 흔적이 없다. 설에 내린 눈이 거의 허벅지만큼이라, 음지에 얼음덩이 같은 눈들을 어찌 녹일까 했더니 게눈감추듯 사라졌다. 날이 펄펄 풀리다가 자박자박 눈이 내리니 동짓달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그렇게 춘분쯤 펑펑 내린 눈에 걱정했는데 튤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싹을 올렸다. 덧없는 걱정이 들어 봐야 정작 날은 끝없이 봄에게로 내달리고 있다. 하루 만에 그 많은 눈이 녹았다.

하 수상한 봄날
추위와 더위가 같은 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라는 춘분이 전 같지 않다. 조화와 균형을 떠올리기에는 극단적으로 흐르는 것 같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어른들은 날이 풀려 좋다면서도 그전 초여름 날이라 해도 믿겠다며 절기가 하 수상하긴 수상하다고 혀를 내두르시기도 한다. 기후위기는 이렇게 변화의 폭을 가늠하기 어렵게 크고 급변하는 모양으로 오고 있다. 계절과 절기를 기점으로 반복되어 온 일정한 변화의 형태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양새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풀렸다 어는 폭이 전보다 한참 넓으니 정신없긴 꽃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한가지다. 꽃눈, 잎눈이 피는 것을 시샘하여 온다는 꽃샘추위가 번쩍하고 온다. 작년,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온이 차곡차곡 쌓여 일찍 꽃눈을 봉긋하게 채웠다가 돌풍 같은 바람까지 대동한 꽃샘추위에 꽃눈이 얼었다.
매년 더 일찍 피고, 매년 더 큰 기온 폭으로 추위를 만나니 꽃이 지거나 상처를 입어 벌들이 깨어날 땐 먹을 게 없고, 꽃은 안정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게, 봄을 가른다는 춘분에 맹렬한 기후위기를 마주한다.

꽃 피는 게 부러워 질투야 날 수도 있다지만 시샘이 짙어도 너무 짙다. 꽃이 하는 말을 들으러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르게 피는 것이 반갑기보다 겁이 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버들강아지 꽃이 예년보다 2주는 일찍 피었지만, 그나마 운장산 자락 추위에는 이제 한껏 노랗게 피어올랐다. 급변하는 기후위기에도 절기에 기대 사는 것이 아직 가능한 것은 아주 높은 진안의 미기후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봄물에 방개 기어나오듯
밭이고 논이고 녹아난 물들이 고이고 흘러온 땅이 촉촉해졌다. 논물고랑에는 발걸음을 딛기 무섭게 물속에서 파다다다닥 흩어진는 방개를 만난다. 옛말에 ‘봄물에 방개 나오듯’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이른 것 같은 눈 녹은 찬물인데도 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방개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렇게 사람들이 봄물 방개마냥 쏟아져 밭에서 날래게 움직인다.

겨울 동안의 논과 밭은 주인이 따로 있다. 숲 밭에 나무둥치를 뭍어 쌓아 만든 후글컬처 둔덕에는 맷돼지들이 신나게 파헤치고 벌레를 잡아먹은 흔적이 있다. 남아있던 볍씨와 볏집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먹이 삼아 논에 들렀던 새와 고라니의 흔적이 가득이다. 같은 논밭에서 먹고사는 이들이다. 겨울 동안 잘 일궈 주셨으니 나도 이 땅에 기대어 살기 위해 방개가 된다. 봄을 알아챈 쑥이며 꽃다지, 냉이며 돌미나리가 쓱쓱 붓질하듯 은빛과 초록빛으로 땅을 칠한다. 봄은 물방개 같이 요란한 색과 온도, 소리로 온다.


작년에 꽃피운 흰당근덕에 밭 가득 당근이 가득 있다.(왼쪽 위) 쑥이 제법 자랐다. 그 눈 속에서 이미 은빛을 준비했다.(오른쪽 위) 이때가 제일 맛있는 돌미나리, 논물고랑에 던져 둔 것이 이제 제법 고랑을 채운다.(아래 왼쪽) 꽃다지가 꽃을 피웠다.(아래 오른쪽) 사진_배이슬
진짜 농부는 풀이 나기 전에 맨다
할머니는 이맘때면 밭을 이미 서너 번 맸다. 게으른 농부는 풀이 다 자라 밭을 매고, 중간 농부는 풀이 보이면 매고, 진짜 농부는 풀이 나기 전에 밭을 매는 거라고 했다. 땅이 얼어 뾰족뾰족 풀이 싹 틔우는 2월부터 부지런히 밭을 매던 할머니는 이맘때 풀을 매면서는 거듭 ‘오사랄놈의 풀’이라며 덕덕 호미질을 했다.
‘이봐라 봄풀은 이렇게 흙이 더글더글하니 쩔어. 그래도 흙이 촉촉하니 보드러우니까 이때 매야 매지지.’
‘아니, 얼마 크도 안 했는데 꼭 기어이 매야 되?! 나는 풀 키워 먹을 건데?’
‘호랭이 물어가네, 조금만 더 있어 봐라. 더글더글해서 뽑히도 안 혀. 풀 나는 디서 먹을 것이 있는가 봐라’
그래 놓고도 그전 얘기를 물어대는 손지딸한테 할머니는 죽일 놈의 풀이라면서도, 툭! 던지며 풀 이야기를 해 주시고는 했다.
‘아나. 이것이 양푼쟁이여. 요때 먹을 것 없을 때 이놈 뜯어다 밥 비벼 먹으면 맛나.’
아버지 때부터는 일절 약도 비료도 안 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풀을 기르는 것은 게으른 사람의 징표 같은 것이라. 할머니는 풀을 지긋지긋하다 하면서도 풀약은 안 된다면서 일일이 맸다. 그렇게 풀을 죽이면서 풀에 기대 산 세월을 전해 주고는 했다. 쪼그리고 앉아 풀을 매는 시간은 할머니 어릴 적부터 살아온 이야기부터 할아버지와 농사지으시던 때까지 진안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농지혜를 들려 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풀을 매고 나면 무심하게 씨를 뿌리셨다. 하나하나 포트에 씨 뿌리는 것을 답답해 하셨던 할머니는 고춧모 외에는 따로 모종 내는 법이 없었다. 깨끗이 맨 밭 귀퉁이에 훌훌 상추씨앗을 흩어뿌리고는 호미로 무심하게 덕덕 긁었다. 무심한 것 같지만 아주 섬세한 호미질이었다. 얕은 깊이로 씨앗이 고루 덮이고 퍼지게 긁어댔다. 아주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그런 호미질이었다. 그렇게 한두 개씩 귀하게 넣어 하우스에서 키운 내 상추보다 막뿌린 할머니의 상추가 훨씬 짱짱하게 자랐다.
어느 만큼 상추가 자라면 다른 밭 매고 오는 길에 상추 새싹 뭉텅이를 툭하고 캐다 밭 가상에 척척 나눠 심었다. 채소밭을 따로 두지 않고 모종도 내지 않고 채소를 길러 먹는 것이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 해가 길어지면 꽃피우는 작물을 심는다
진안의 만상일은 5월 7일이다. 마지막 서리를 내리는 때를 기준으로 따뜻한 시간을 사는 작물을 내다 심을 수 있다. 다르게는 된서리도 제법 견디는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은 3월이면 밭에 심을 수 있다.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은 더워지면 자랄 수 없다. 대표적으로 상추와 감자다. 그 외에도 제법 추위를 견디거나 긴 시간 자라야 하는 것들은 밭에 내다 심거나 씨앗을 직접 뿌릴 수 있다. 키 작은 강낭콩, 상추, 대파, 완두콩, 근대, 시금치(사계절시금치) 등이다.
또한 장일 조건 즉, 낮의 길이가 길어질 때 꽃을 피우는 작물들은 씨앗을 받기 위해 이르게 심는 게 좋다. 작년 가을에 뿌린 시금치와 완두콩을 포함해 상추, 당근, 무 등이 있다. 추위를 견디기 힘든 작물 중에도 부러 이맘때 밭에 심는 것도 있다. 그중 하나는 호박이다. 밭비탈을 타고 자라게 밭언덕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두엄더미를 흙과 섞어 주고 나면 대가리파랑 동부, 호박씨앗을 한 데 심고 작은 온실을 만들어 준다. 대나무를 십자로 박아 비늴 씌웠다. 추위가 가실 때쯤이면 그 속에서 한참 자란 호박이 긴 시간 자라 실하게 큰다.

결국 심는 시기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따라 다르다. 부지런히 힘써서 모종을 일찍 내기도 하고, 씨앗을 받아야 하니 덜 섞이게 한참 늦되게 심기도 하는 것이다. 지역마다, 마을마다, 밭마다 기후가 다르고 농부마다 중하게 여기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올해는 질퍽한 밭을 부러 뒤엎지 않고 찬찬히 씨앗농사를 지으려고 마음먹었다. 덜 먹더라도 폭이 넓어지는 기후를 대비해 풀도 키우고, 늦게 심을 요량이다. 할머니가 보면 아나 지 입에 들어갈 것 뭐나겠냐며 등짝을 맞았겠지. 다행히 지구는 모두를 먹이느라 풀을 길러 주고 있으니 때 맞춰 풀 뜯어먹고 살아야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