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전력계통 | 밀양에서 제주까지, 반복된 갈등의 이름은 ‘님비’가 아니라 ‘거버넌스 실패’

2025-11-27 김복연 기자

한국의 에너지 전환 갈등은 흔히 ‘님비’로 불리지만, 실제 원인은 주민이 결정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거버넌스 실패에 있다. 밀양 송전탑과 제주 해상 풍력 등 반복된 갈등은 정보 비대칭, 사후 통보, 지역 불균형이 누적되며 신뢰를 잃은 결과다. 해외에서 주민 지분참여·공동소유·전기요금 혜택을 통해 수용성을 높였다면, 한국은 여전히 보상 중심에 머물러 있다. 에너지 전환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기술보다 먼저 신뢰를 구축하는 절차적·참여적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24일 국회의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이하 기후노동위, 위원장 안호영) 소속 의원 14명이 서남권해상풍력단지 시찰을 위해 부안 격포항을 찾았다. 사진 부안독립신문
지난 24일 국회의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이하 기후노동위, 위원장 안호영) 소속 의원 14명이 서남권해상풍력단지 시찰을 위해 부안 격포항을 찾았다. 사진 부안독립신문

한국 에너지 전환을 가로막는 주민수용성의 구조


한국의 에너지 전환은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풍력도, 태양광도, 송전선도 계획은 빠르게 세워지지만, 실제 착공 단계에 이르면 시간은 이상하게 느려진다. 거의 모든 갈등의 표면에는 ‘주민 반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말은 현실을 절반만 설명한다. 반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지역에 남겨진 부담과 배제의 기억, 그리고 정부가 결코 공유하지 않았던 정보들이 만든 감정의 응축체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이 매번 같은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의 부재다.


결정은 중앙에서, 부담은 지역에 남는 구조


밀양 송전탑 갈등은 신고리 원전 등에서 생산된 고압 전력을 수송하기 위해 경남 밀양에 송전선로를 건설하려는 한전과, 이를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 간의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었다. 사진 연합뉴스
밀양 송전탑 갈등은 신고리 원전 등에서 생산된 고압 전력을 수송하기 위해 경남 밀양에 송전선로를 건설하려는 한전과, 이를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 간의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었다. 사진 연합뉴스

한국에서 에너지 인프라의 입지는 대개 결정된 뒤 ‘설명회’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통보된다. 참여가 아니라 승인 절차에 가깝다. 입지의 장단점, 기술적 안전성, 지역 리스크에 대한 정보는 전문 용어로만 제공되고, 주민이 설계 과정에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한번 만들어지면 수십 년을 사용하는 시설인데, 지역은 처음부터 배제된 채 결과만 받아들어야 하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왜 우리가 수도권 전기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느냐”는 정서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전력의 생산–소비 구조가 이미 수도권 편중인데, 송전선·풍력·ESS 등 부담은 지방에 몰리는 현실은 갈등을 확산시키는 핵심 요인이다. 주민수용성 문제는 언제나 지역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권한의 부재가 낳은 정당한 반응으로 드러난다.


보상 중심 접근의 한계


갈등이 생기면 정부와 사업자는 대개 지원금이나 지역개발기금을 제시한다. 하지만 보조금 방식은 오히려 불신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주민에게는 “위험을 돈으로 사려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통제권이다.


해외에서는 재생에너지의 핵심 원칙으로 ‘지분 참여’가 자리 잡았다. 덴마크는 풍력 발전기 인근 주민에게 20% 이상의 지분을 의무적으로 제공한다. 독일은 지역 전기요금 할인과 마을 협동조합을 통해 재생에너지의 수익을 지역 내부에 남긴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마이크로그리드와 지역 ESS를 연계해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전력안정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단기 보상 중심에 머무르고 있다. 장기적 수익 구조와 주민 참여 모델이 부재한 한, 수용성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갈등을 반복시키는 기억들


제주 한림 해상 풍력에서는 어민과 주민이 “우리는 결정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에 나섰다. 사진 연합뉴스
제주 한림 해상 풍력에서는 어민과 주민이 “우리는 결정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에 나섰다. 사진 연합뉴스

한국의 주민수용성 위기는 사건의 누적이다. 밀양 송전탑 갈등은 중앙집중형 전력정책이 농촌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보여 준 대표 사례다. 신한울 원전의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초고압 송전선 건설은 주민들에게 ‘타인의 편익을 위해 자신의 고장을 희생시키는 구조’로 각인됐다. 사전 협의는 요식적이었고, 갈등은 장기화됐으며, 갈등이 남긴 상처는 다른 지역에도 전염되었다.


제주 한림 해상 풍력에서는 어민과 주민이 “우리는 결정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에 나섰다. 환경성보다 절차적 정의가 핵심 쟁점이었다.


청도 LNG 기지, 군산 ESS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사업 정보 비공개, 안전성 자료 부족, 사후 통보 구조가 공통적으로 지적됐다. 주민들은 “정부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동일한 갈등이 다른 지역에서 반복될 가능성을 높였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 사회에 하나의 부정적 학습 효과를 만들어냈다. “중앙의 결정은 지역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인식은 새로운 에너지 인프라 사업이 시작될 때마다 가장 먼저 작동하는 정서적 토대가 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다


한국은 재생에너지 기술력, 계통 운영 기술, 예측 기술 모두 세계적 수준에 가깝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앞서 있어도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않으면 전환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주민수용성 문제의 본질은 정보 비대칭, 사전 참여 부재, 지역 권한의 부족, 그리고 신뢰의 부재다.


특히 초기 설계 단계에서 주민이 배제되는 구조는 갈등의 원인을 사업이 아니라 절차에서 찾게 만든다. 주민은 기술적 안전성보다 “왜 우리는 몰랐는가”, “왜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확한 설명을 내놓아도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필요한 것은 ‘한국형 수용성 패러다임’의 전환


이제는 주민수용성을 보조금 처리 방식이 아니라 거버넌스 혁신의 과제로 바라봐야 한다. 다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주민 지분 참여가 제도화돼야 한다. 장기 수익을 공유하는 방식은 갈등을 경제적 이해의 충돌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으로 바꾼다. 둘째, 사전 협력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입지 선정, 계통 검토, 영향 평가 단계에서 주민과 전문가, 지자체가 공동으로 설계에 참여해야 한다. 셋째, 지역 혜택을 눈에 보이는 전력 편익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기요금 할인, 마이크로그리드, 정전 예방 시스템, 지역 에너지 자립도 향상 같은 직접적 혜택이 필요하다. 넷째, 갈등이 발생했을 때 뒤늦게 문제를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상설된 갈등조정기구가 초기 단계부터 함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장기적으로는 지역이 전력계통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적 권한 이양도 검토해야 한다. 지역이 의사결정 구조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때 에너지 전환은 비로소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는다.


에너지 전환은 결국 사회적 계약이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은 더 많은 기술과 더 큰 예산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신뢰를 쌓아갈 구조다. 지금까지의 방식은 지역을 “이해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취급해 왔다. 그러나 전환의 시대에 지역은 이해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결정할 주체다. 한국의 주민수용성 문제는 단지 갈등 관리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의 전력 체제를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에너지 전환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계약의 문제다. 신뢰를 회복하는 순간, 한국의 에너지 전환은 비로소 속도를 얻는다.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ㅇㅇㅇ

회원님을 위한 AI 추천 기사

loading.jpg

AI가 추천 기사를
선별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추천 기사를
선별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추천 기사를
선별중입니다...

유저별 AI 맞춤 기사 추천 서비스

로그인한 유저분들께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이 기사를 읽은 회원

​로그인한 유저들에게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로그인 후에 이용 가능합니다.

이 기사를 읽은 회원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로그인한 유저분들께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유저별 AI 맞춤
기사 추천 서비스

로그인한 유저분들께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ㅇㅇㅇ

회원님을 위한 AI 추천 기사

loading.jpg

AI가 기사를 선별하는 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기사를 선별하는 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기사를 선별하는 중입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