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도 고통을 느끼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으며 얼굴이 다 다르다
김용만 대표 편집인
38억 년이나 되는 생명의 역사에서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 한 건 고작 30만 년 전이다. 육체적으로 내세울 게 거의 없는 인간은 사냥을 하기보다는 사냥을 당하기 일쑤였다. 인류가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배고프고 비참했다. 1만 년 전, 기후변화로 농업이 가능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작물을 수확한 후 남은 잉여는 극소수의 몫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수렵 채집인보다 영양상태가 좋지 못했다. 먹이사슬 최상위에 올랐다고는 하나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는 쉽지 않았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어깨에 힘주게 된 건 산업혁명 이후다. 250년 남짓 된 거다.
인간이란 존재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우주 안에서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어서 그 출현은 필연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주는 이유와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건 없다. 무수한 우연만 있을 뿐이다. 생명의 탄생조차도 우연이다. 지구에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하는 이유 같은 건 없다. 인간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지구를 위해 꼭 필요하니 있는 게 아니라 도도한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건의 산물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우연이 바퀴벌레나 개, 소, 돼지, 닭에게 일어났다면 지금 인간의 자리는 그들이 차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종 우월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학자들은 말한다.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가 아니었으면 계몽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페스트는 반드시 일어나야 할 신의 저주가 아니었다. 계몽주의에 뒤따라온 산업문명은 지구 생태 역학관계를 송두리째 바꾸었다. 그 이전에는 자연과의 균형과 조화가 어느 정도는 지켜지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가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연의 구성원인 동물과 식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계몽주의는 자연에서 인간을 분리시켰고 더 이상 자연은 동반자가 아니고 낱낱이 해부되어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는 산업혁명의 엔진이었다.
가축사육은 작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노동력을 보완하고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는 용도였지 주식은 아니었다. 산업문명이 가져온 도시화와 인구 증가는 가축사육의 형태를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소규모 가내농장은 대규모 기업형 농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추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이후 가속을 하게 된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80억의 인간을 부양하기 위해 사육되는 소 10억 마리, 돼지 7억7천만 마리와 닭 250억 마리가 있다. 이들은 전체 탄소배출량의 12%를 차지한다. 특히 이중 62%는 소가 배출한다. 이제는 주식을 사육되는 가축이 제공하는 고기라고 봐야 한다.
그동안 사람들은 '동물들은 감정이 없으며 당연히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와 유전자를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침팬지나 오랑우탄 등 영장류 정도만 제한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 봤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고통이 없는 무생물로 간주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얄팍한 이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학의 최근 결과물은 반대되는 증거를 내놓고 있다. 증거들이 쌓여서 과학계에서는 합의를 상당히 이룬 듯하다. 영장류뿐 아니라 대부분 동물들이 감정을 갖고 있으며 고통을 느낀다고 말이다. 심지어 벌레와 식물도 감정을 갖고 있다는 연구 사례들도 나온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은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인종 차별을 하는 대표적인 언문이 있다. 유럽이나 북미사회에서 왕왕 회자되는 발언인데, “흑인과 아시아인들은 비슷해서 구별하기 힘들다”고 한다. 인종이나 피부색과 무관하게 80억 세계인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가 아니라면 당연한 이야기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은 각기 제 모습을 갖고 있다. 농장에서 사육되는 가축도 마찬가지다. 10억 마리 소, 7억7천만 마리 돼지, 250억 마리 닭들도 얼굴이 다르다. 다른 모습은 개별성을 의미한다. 개별성을 갖는다는 건 그 자체로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함을 말한다.
과학이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걸 밝혀 냄으로써 ‘동물복지’의 개념이 대두되었다. ‘동물복지’는 동물의 고통 감소라는 범위를 넘어서 확장되고 있다. 동물의 권리, 즉 ‘동물권’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서 ‘동물권’을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People for Nonhuman Rights)’에 속한 젊은 변호사들의 활동은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 헌법은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명시하고 있다. PNR 변호사들의 최종 목표는 ‘동물법’이 헌법으로 규정되는 거라고 한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갈 길은 멀다. ‘종 차별주의’는 아직 우리 사회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동물이 감정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인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물의 고통을 덜어 주는 주된 목적도 결국 스트레스를 받은 동물이 인간을 위해하거나 그 고기를 먹게 되면 자칫 건강에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이 필요하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근대 계몽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계몽이 요구된다. 근대의 오만함이 빚어낸 기후위기 앞에서 자연과 인간을 통합하는 21세기의 계몽을 기대한다. 어쩔 수 없이 기댈 건 인간의 의지와 인식이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PNR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