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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의 노동과 정치 | 번역이라는 노동 ― 한 연구자의 언어를 옮기며

2025-10-24 윤효원

번역 노동의 윤리적 의미, 한 연구자가 가톨릭 의료사업 박사논문을 번역하며 겪은 경험을 통해 종교와 자본, 신앙과 노동통제의 복합적 관계를 탐구하고 번역 노동의 윤리적 의미를 성찰한다. "번역은 ‘언어의 이동’이 아니라 ‘윤리의 이주’다."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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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구자의 세계를 다시 읽는 일


나는 지금 한 편의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하고 있다. 저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는 오랫동안 병원 현장에서 일한 간호사이자 노동조합 간부였고, 의료노동과 종교, 자본의 관계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연구자였다. 그의 논문은 한국 가톨릭 의료사업의 변천,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된 종교 권력의 작동 방식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처음 원고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단순히 신학과 사회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역이 진행될수록 이 작업은 점점 더 ‘노동의 기록’을 옮기는 일로 변해갔다. 언어를 옮긴다는 것은 단지 단어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구조, 한 조직의 공기, 한 시대의 정서를 다시 읽는 일이다. 나는 매 페이지를 넘기며 의료기관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신앙’이 ‘노동’으로, ‘봉헌’이 ‘성과’로, ‘영성’이 ‘경영’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이 세계를 영어로 옮긴다는 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종교의 언어와 노동의 언어 사이에서


번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용어였다. ‘보직자회의’, ‘라운딩’, ‘ACE 활동’, ‘영명축일’, ‘영적 예물’—이 단어들은 표면적으로는 병원의 행정 용어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신앙의 위계, 권위의 질서, 그리고 통제의 장치가 깔려 있었다.


“행정부원장님 라운딩 가십니다”라는 단순한 안내 문구조차, 병원의 일상이 어떻게 종교적 의례와 행정적 감시의 결합으로 운영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표현을 영어로 옮기는 일은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질감’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rounding'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의사의 회진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성직자 경영진이 병동을 순회하며 영적 권위와 행정 권한을 동시에 행사하는 의례적 행위에 가까웠다.


나는 이 단어를 그대로 둘 것인가, 설명을 덧붙일 것인가 사이에서 오랫동안 망설였다. 이 과정에서 번역이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맥락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는다. 논문은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려 “가톨릭 의료사업은 반(反)경제적 경제를 구현한다”라고 분석한다. 경제적 이익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상징적 신뢰와 도덕적 권위를 축적하는 구조, 이른바 ‘종교경제’의 이중성이다.


수녀와 노동자, 의사와 관리자, 신앙과 이윤이 교차하는 이 세계에서, 병원은 “비영리”를 표방하면서 동시에 “신앙적 신뢰”를 경제적 자산으로 전환한다. 그것은 종교조직의 특수성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도덕성을 경제적 가치로 변환해 온 한 방식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노동 통제


이 연구가 특히 의미 있는 것은, 종교적 언어가 어떻게 노동통제의 장치로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이다.


논문은 병원 내부 문건과 회의 기록, 직원 진술을 분석해, ‘기도’와 ‘순명’의 언어가 조직 운영과 인사관리의 원리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신앙 공동체 내부의 갈등은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해석되고, 노조의 비판적 문제 제기는 “공동체의 평화를 해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담론 구조는 종교적 권위와 경영권이 결합한 특유의 지배 형태를 보여 준다. 순명과 복종은 신앙적 덕목으로 강조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했다.


조직 내부의 통제는 노골적인 탄압보다 훨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신앙의 언어’를 통해 형성된 자발적 자기검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침묵의 질서. 노조 파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연구는 그 구조적 효과를 명확히 보여 준다.


종교적 공동체의 윤리가 어떻게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잠식했는지, 그 현실를 통해 한국 의료노동의 복합적 권력 관계가 어떠한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대목을 번역하며 나는 ‘노동의 자유’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제약될 수 있는지를 절감했다. 종교적 윤리가 자본의 논리와 만날 때, 그것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기술로 변한다. 번역자는 그 미묘한 층위를 언어 속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윤리적 과제를 마주한다.


번역은 '지적 노동'이자 '윤리적 노동'으로 느낀다. 원문을 충실히 옮기면서도 그 안의 침묵과 긴장을 함께 드러내야 한다. 사진_제미나이 이미지
번역은 '지적 노동'이자 '윤리적 노동'으로 느낀다. 원문을 충실히 옮기면서도 그 안의 침묵과 긴장을 함께 드러내야 한다. 사진_제미나이 이미지

번역은 또 하나의 노동이다


논문에는 의료기관의 일상과 종교적 의례가 한 몸처럼 얽혀 있는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기도’, ‘홍보’, ‘의료’가 분리되지 않는 공간, 그리고 신앙과 서비스, 돌봄과 경영이 한 체계로 작동하는 병원의 모습. 이 세계를 옮기는 번역자의 작업은, 단순한 문장 해석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를 옮기는 일이었다.


나는 번역을 ‘지적 노동’이자 ‘윤리적 노동’으로 느낀다. 번역자는 원문을 충실히 옮기면서도 그 안의 침묵과 긴장을 함께 드러내야 한다. 그 과정은 끝없는 해석의 연속이며, 동시에 자신을 되묻는 행위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충실히 옮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현실을 덧칠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번역자로서, 그리고 노동활동가로서 나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언어를 넘어, 윤리로


번역을 마치며 나는 다시 묻는다. 이것은 단지 한 연구를 영어로 옮기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질문—“이윤과 돌봄은 공존할 수 있는가?”—을 다시 제기하는 일이었을까?


언어를 옮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윤리 체계를 다른 윤리 체계로 옮기는 일이다. 번역은 ‘언어의 이동’이 아니라 ‘윤리의 이주’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한 연구자의 세계를 옮겼고, 동시에 내 안의 세계를 다시 구성했다. 종교경제를 분석한 한 노동자 출신 연구자의 시선을 통해 나는 노동의 의미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번역 또한 ‘괜찮은 일자리’를 향한 또 하나의 실천일 수 있다는 것을.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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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5일 전

번역은 또 하나의 노동이고 또 다른 창작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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