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재난리포트12 ⑧ 기후질병(2) | 기후 트라우마는 '집단 트라우마'로 번질 수 있어
- Dhandhan Kim
-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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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8월 15일
2025-08-13 김복연 기자
기후재난 피해자의 30%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위험군으로 나타나며, 기후 트라우마가 개인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PTSD는 심각한 사건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전쟁, 사고, 폭력, 재난 등)을 겪거나 목격한 뒤, 그 충격이 장기간 지속되어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신건강 상태를 말한다. 기후재난은 공동체 전체를 뒤흔드는 집단 트라우마로 번질 수 있다. 체계적인 심리 지원과 사회적 연대를 통한 회복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기후재난이 남긴 상처

재난이 끝난 자리, 마음은 아직 비상 대기 중이다. 기록적인 폭우가 할퀴고 간 마을에서 “이제 비 소리만 나면 가슴이 철렁인다”는 주민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낯선 하소연이 아니다. 장대비가 멎고 연기가 걷힌 뒤에도 악몽과 불면, 찰나의 소음에도 온몸이 굳는 과각성이 이어진다.
이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닌 기후변화가 남긴 깊은 사회적 상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명백한 신호다. 이 보이지 않는 재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우리 사회의 회복력을 가늠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30%"라는 숫자의 무게
2023년에 발생한 강릉 산불의 이재민 200명 중에서 30%가 PTSD 고위험군이라는 보고가 있다. 트라우마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스트레스나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을 때, 마음과 몸이 받는 깊은 상처다. 전쟁, 폭력, 성폭력, 사고, 학대 등이 원인이지만 최근 '기후재난'이 '트라우마'가 되고 있다.
트라우마는 반드시 ‘외부에서 큰 사건이 발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상황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PTSD는 트라우마에서 시작된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심각한 사건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전쟁, 사고, 폭력, 재난 등)을 겪거나 목격한 뒤, 그 충격이 장기간 지속되어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신건강 상태를 말한다.
물론 모든 트라우마가 PTSD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 후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회복되지만, 일부는 뇌와 신경계가 충격 상태에 머물러 PTSD로 발전한다. '기후 트라우마'가 PTSD로 발전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회복되려면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2025년 산청의 산불과 극한호우를 연이어 겪은 주민들은 지자체의 발 빠른 심리 지원에도 불구하고, 장기화된 주거 불안 속에서 트라우마가 고착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더 이상 몇몇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기후재난이 공동체 전체를 뒤흔드는 ‘집단 트라우마’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데이터다.
PTSD는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겪은 뇌가 부리는 필사적인 생존 반응이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정의에 따르면, 참혹한 기억이 불쑥 침입하는 ‘재경험’, 고통을 피하려는 ‘회피’, 세상이 위험하다고만 느끼는 ‘부정적 인지’, 항상 날이 서 있는 ‘과각성’이 한 달 이상 지속되는 상태다.
문제는 기후위기가 이 PTSD의 방아쇠를 일상적으로 당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고음은 이미 한국 사회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왜 상처의 깊이는 다른가?
같은 재난을 겪어도 상처의 깊이는 다르다. 연구는 그 차이를 만드는 변수들을 명확히 지목한다. 국내 ‘재난피해자패널조사’ 분석 결과는 세 가지 핵심 요인을 꼽는다. 재난 이전의 정신건강 상태, 재난 당시 겪은 인명피해 경험, 그리고 재난 이후의 자산 감소와 경제적 곤란이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빗줄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비에 쓸려나간 삶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우울, 불안, 음주 문제 등 다른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아 PTSD라는 단일 질환으로만 접근해서는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상처는 복합적이고, 따라서 치유도 입체적이어야 한다.
지지의 힘이 가장 확실한 해법

절망적인 숫자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근거 또한 발견한다. 2022년 울진·삼척 산불 피해자 연구는 ‘정부의 지지’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구조방정식 모델로 증명했다. 즉 재난 이후 국가와 사회가 제공하는 심리·사회적 지원이 탄탄할수록 피해자의 PTSD 증상은 눈에 띄게 완화된다. 스스로 일어설 힘(회복탄력성)은 강해지고 삶의 질 전체가 향상된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닌 통계적으로 검증된 ‘치료적 개입’이다. 금전 보상을 넘어선 체계적인 심리 지원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대응을 넘어 시스템으로 마음의 안전망 구축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내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재난의 골든타임, 구조와 심리상담을 동시에
이제 심리적 응급처치(PFA)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구조대원과 함께 심리지원팀이 동시 투입되는 것을 표준 절차로 삼아야 한다. 거창한 진단보다 당장의 안전감, 편안한 잠자리, 정확한 정보 제공이 우선이다. 현장 실무자들이 즉시 쓸 수 있는 안내서와 연계 시스템이 필요하다.
복구와 치유의 원스톱 연동
주거 수리비 신청 창구에서 심리상담을 함께 신청하게 해야 한다. 복구 예산과 심리 지원 예산을 연동해 피해자가 여러 곳을 전전하지 않도록 ‘원스톱 서비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특히 고령자, 아동, 장애인 등 고위험군을 위한 별도 트랙을 마련하고, 이동상담과 집단상담으로 심리치료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추적과 책임의 제도화
지원은 복구비 지급에서 끝나선 안 된다. 재난 유형과 연령, 소득별로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과 중단 사유 같은 위험 신호 데이터를 추적하고 축적해야 한다. 지자체 성과지표에 ‘정신건강 회복률’을 포함시켜 책임을 부여하고, 보건복지포럼의 제언처럼 기후 적응 대책에 정신건강 축을 공식적으로 편입해 상설 컨트롤타워가 지휘해야 한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회복으로
상처는 함께 아물 때 더 빨리 낫는다. 개인 상담을 넘어,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돌보는 모임, 학교 등의 공공장소 기반의 집단 회복 프로그램을 활성화해야 한다. 언론과 지역사회는 자극적인 장면의 반복 노출을 자제하고, ‘낙인 없는 도움 요청’이 당연한 문화로 자리 잡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의 최전선에 있는 재난 대응 인력의 소진(2차 외상)을 막기 위한 보호 장치도 의무화돼야 한다.
기후재난은 더 잦고, 더 강하게 우리를 덮칠 것이다. 이 거대한 위협 앞에서 남겨진 마음의 상처를 오롯이 개인의 회복력에만 맡겨 둔다면 공동체는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대응으로 함께 맞선다면, 연구가 보여 준 선순환 ‘지지, PTSD 완화, 회복탄력성 강화,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 수 있다. 빗소리에 잠 못 들던 우리의 이웃이 다시 비 예보를 내일의 날씨 정보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후변화에 진정으로 적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적응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잘 지적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