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원의 지구와 정치ㅣ동학은 한국 노동운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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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8일
- 3분 분량
2025-3-28 윤효원
1920~193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뿌리는 동학이며,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 사상과, 민중 스스로 일군 조직적 연대가 한국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1920~193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뿌리, 동학(東學)
한국 노동운동의 기원을 논할 때, 보통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펼쳐진 1920~193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동학(東學)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만나게 된다.
동학은 1860년 경주 출신의 최제우(1824~1864)가 창시했으며, 그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편찬하면서 사상이 구체화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신분제와 봉건적 억압을 비판하며, 민중이 ‘하늘과 같은 귀한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의 위계적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 사상이었으며, 조선 민중에게 새로운 사회적 자각을 심어 주었다. 동학의 핵심 교리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최제우보다 세 살 어렸으나 기꺼이 제자가 되어 그의 사상을 계승한 최시형(1827~1898)도 경주 사람이었다. 최시형은 동학운동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는 데 집중했으며, 1880년대 후반에는 동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최보따리’라 불릴 정도로 전국을 떠돌며 동학을 조직했고, 민중이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조직적 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동학이 1894년 농민항쟁으로 폭발하는 기반이 되었다.

동학농민항쟁의 경험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통
1894년 동학농민항쟁은 동학사상이 조직적으로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동학농민군은 1차 봉기(전봉준 중심)와 2차 봉기(우금치 전투)로 나뉘며,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는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기치로 내걸고, 부패한 봉건 지배층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이는 단순한 반봉건 운동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사회 개혁의 주체로 나선 대중운동이었다.
일본군을 등에 업은 조선왕조군의 탄압으로 동학농민항쟁은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이 단순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경험을 축적했다. 이 경험은 이후 1919년 3.1운동, 1920~1930년대 노동자 및 농민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며 한국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이 곧 하늘'은 노동자의 권리를 정당하게 인식하는 기초
동학의 사상과 실천은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학이 강조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 사상은 노동운동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동학농민군이 조직적 연대를 통해 봉건 지배층과 맞섰듯이, 노동운동 역시 조직적 단결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특히, 동학이 강조한 자주적 실천의 정신은 노동운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서구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산업혁명을 계기로 발전했다면,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봉건질서와 식민지 지배에 맞선 민중운동의 연장선에서 노동운동이 성장했다. 1920~193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동학농민항쟁의 경험을 간직한 민중을 바탕으로 성장했으며,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보여준 조직적 저항 또한 동학에서 시작된 민중 실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학은 노동운동이 계승할 자산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서구의 이론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길, 즉 최제우가 열었던 민중해방의 길, 최시형이 이어간 조직과 실천의 고투,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항쟁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은 한국 노동운동이 계승해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동학의 사상가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대구 관아(현 대구 경상감영공원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동학의 조직가 최시형은 1898년 4월 5일 한성에서 체포된 후 4월 23일 좌포도청(현 서울 종로 3가)에서 사형당했다. 죄목은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 즉 국가 체제를 흔든다는 것이었으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국가보안법 위반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 중 하나가 1894년 동학농민항쟁의 발단이 되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그러나 동학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중의 각성과 실천이라는 정신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동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해방 후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으로, 그리고 현대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한국 노동운동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구 모델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독자적인 노동운동의 비전을 정립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