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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온 세상이 가득해지는, 소만

2025-05-23 배이슬

소만, 자연에 생명력이 가득하다. 꽃들 저마다 피우는 색들로 가득하고, 기세 좋은 풀들이 빈틈없이 대지를 덮는다. 제 좋아하는 풀마다 벌레가 꼬이고, 개구리와 새들도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논에 물을 들여 써레질을 한다. 소만부터 작물과 식물들이 제 밥벌이를 제대로 한다. 제 각각의 꼴과 속도로 땅 맛, 하늘 맛을 담아 자란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세상이 가득해지는, 소만


소만은 입하가 지나 여름이 들어서는 때다. 잘 드는 볕 덕분에 세상의 많은 생명이 부지런히 자란다. 그래서 소만은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뜻으로 찰 만(滿)을 쓴다. 입하가 지날 무렵 수백 수천의 초록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모든 초록이 더 짙어질 무렵 소만에 숲은 온갖 색으로 가득해지는 때다.

 특히 이팝나무와 아카시나무의 흰색 꽃이 가득 피고, 연보라색 오동나무꽃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름을 실감하게 하는 이때가 아니면 그 숲에 아카시나무가 그리 많은지, 오동나무가 그리 커다란지 모르고 지날 일이다. 아카시아와 오동나무 덕분에 이제 진짜 여름인가보다 하고 힘찬 기운을 느낀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세상이 가득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밭과 논 풍경. 사진_배이슬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세상이 가득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밭과 논 풍경. 사진_배이슬

여름인가 싶은데 제법 찬 기운도 나서 당황한다. 소만은 봄에서 여름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시기라 기후가 급변하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더운 것 같아 반팔을 입었는데 외려 낮 시간에 바람 끝이 차서 당황스럽고, 해 저물 때 춥겠지? 하고 남방을 주워 입고 나서면 저녁쯤에도 후덥지근해서 결국 남방을 벗어 던진다.

그래서 소만에는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같은 속담이 있다. 내내 추운 한겨울에는 익숙해진 몸이 추위를 잘 견디지만 오히려 풀린 따순 날 사이로 부는 찬바람은 몇 배로 춥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만에 가득해지는 것 첫 번째, 색


입하의 초록이 지나기 무섭게 논과 밭에 색이 물들어 간다. 논물 잡은 자리에 하늘빛이 물들 듯이 매년 절로 자라 들을 채우는 꽃들도 그렇다. 지칭개가 연보라색으로, 수레국화가 쨍한 여름의 파랑으로, 토끼풀이 하얗게, 살갈퀴꽃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맛도 좋지만 밭을 수채화처럼 만드는 차이브도 제 색을 밭에 뿌렸다.

애기똥풀이 하늘하늘 노랑색꽃을 피웠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야로우와 당근, 베르가못도 빽빽하게 밭을 덮었다. 하얀꽃을 피우던 밭의 딸기가 빨갛게 익었다. 연못가에 심어둔 창포와 붓꽃도 노랑과 파랑으로 앞다퉈 꽃이 핀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초록을 도화지 삼아 그리는 색색의 가득함을 만날 수 있는 때다. 절로 따라 그림을 그려지고 싶은 때다.

꽃마리꽃, 차이브, 맛있는데 잘 안 죽고 수채화까지 잘 그려 내는 차이브, 살갈퀴꽃, 샤스타데이지꽃(위 왼쪽부터). 수레국화꽃, 애기똥풀꽃, 야로우드 밭을 덮어 자란다, 지고 있는 골담초는 샐러드로 먹는다, 챠빌꽃(아래 왼쪽부터). 사진_ 배이슬


소만에 가득해지는 것 두 번째, 풀


그래서 이맘때 농삿일 중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대부분 풀과의 전쟁, 김매기일 것이다. 봄과 여름의 햇빛과 가을 햇빛은 확연한 차이를 가지는데, 한 여름 만큼 뜨겁지 않아도 봄볕이 가을볕보다 훨씬 힘이 쎄다. 이때쯤 할머니와 밭 가상을 메다 보면 할머니는 ‘장갑 껴라,’ ‘수건 덮어써라’ 할머니처럼 까매지면 어쩌냐고 걱정하셨다.

“할머니 닮아서 긍가, 장갑끼면 답답해서 일을 못하겠는데 어째”하고 훌러덩 장갑이고 토시고 벗어던졌다.

“봄볕에 타는게 무서운 거여, 긍게 봄 김매기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 내보낸다고 허는 거여”

함께 나와 둘 다 맨손으로 밭 가상을 메면서도 할머니는 손지딸 목 뒤며 손등과 귀가 까매지는 것을 속 아파 하시곤했다.

희한하게 날이 뜨겁지 않아 밭에 가기 좋은 이때가 햇볕에 더 쉽게 탔는데, 겨울 동안 못쬐다가 쬐어서도 있지만 만물을 그렇게 쑥쑥 키우는 ‘좋은 볕’이라서 쎈가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볕 좋은 덕에 땅속 온도도 오르니 작물들만큼 기세 좋은 ‘풀’들이 빈틈없이 대지를 가득 채울 때다. 할머니의 밭에는 이때쯤에는 이미 김매기를 해 두어 덜했지만, 늘 내 밭에는 허리만큼 자란 풀이 가득했다. 덕분에 동생이 논둑을 베며 내 밭 일부도 베는 탓에 종종 나무며 꽃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때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작물이 아닌 풀로 가득해지는 내 밭을 보며 혼도 내시고, 푸념도 하시고, 화도 내시곤했다.

“그 밭이 얼마나 땅심이 좋은데, 풀씨 날려 어쩔래, 느 할애비랑 그 밭에서 주워 낸 독짝(돌덩이)이 얼만디 아까운 땅에 저라고 풀 키울래?! 풀 키울라면 농사짓지 말어!”


벽돌을 쌓아 올린 달팽이 텃밭이다. 텃밭에 풀과 허브가 가득 자라서 커다란 덩치가 되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저것이 무엇이여 한다. 사진_배이슬


그러나 할머니 때는 이미 풍족해서 필요 없었을지 모를 풀들이 내게는 귀하고 감사한 것이었다. 내내 심기만 하고 먹잘 것 없는 때 밥상을 다채롭게 채워 주고, 덕분에 밭이 건강해지는 것이 보이는 때다. 절로 자란 지칭개 덕에 어린 모종보다 지칭개에 진딧물이 가득해지고, 잘 차려진 밥상이라고 칠성무당벌레가 식사를 한다. 밭에 있는 딜보다 풀 속에 자란 미나리에 자리를 잡은 호랑나비 애벌레와 일일 세기 어려울 만큼 피어난 토끼풀, 애기똥풀, 주름꽃, 긴병풀꽃, 꽃마리 덕분에 밭에는 벌들이 자주 오고 간다. 벌레들이 각자 좋아하는 풀에 자리를 잡으니, 새들도 개구리들도 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들 덕에 올해도 나는 한 끼 밥을 먹겠다.


절로 자란 지칭개 덕에 진짓물은 토마토 모종보다 지칭개에게로 가고, 덕분에 무당벌레도 배불리 식사를 한다(왼쪽 두 사진). 미나리를 먹는 호랑나비 애벌레(오른쪽 사진). 사진_배이슬


소만이 되면 몇몇 풀들은 벌써 쇠기 시작한다. 지난 여름 씨를 뿌려 이미 싹이 튼 채로 겨울을 낫거나, 다년생이라 제법 힘 있게 일찍 꽃 피울 준비를 하는 풀들이다. 대표적으로 이제 냉이와 쑥은 먹기에는 질겨졌다. 할머니는 ”그래서 오뉴월 쑥은 불쏘시개라고 하는 거여“라고 했다. 쑥이 질겨져 떡을 하기도 차를 덖기도 어려워지는데 키가 제법 커서 잘 마르면 불쏘시개나 한다는 이야기다. 조금 쇠긴 했어도 마지막으로 부지런히 먹기에 좋은 것은 개망초다. 개망초가 키는 자랐지만 꽃을 맺기 전이라 이맘때 뚝뚝 우등지를 끊어다 장아찌를 담궈 두면 외려 굵어진 대공(줄기)이 아삭하고 향도 짙어 맛이 좋다.

쑥이 너무 자라 허리까지 온다. 오뉴월 쑥은 불쏘시개라고 했다. 사진_배이슬
쑥이 너무 자라 허리까지 온다. 오뉴월 쑥은 불쏘시개라고 했다. 사진_배이슬

지금부터 부지런히 보이는 족족 먹어버려야 하는 풀도 있다. 바로 환삼덩쿨이다. 뾰족뾰족 나는갑다 싶더니 그새 넝쿨을 뻗기 시작하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온 밭을 점령한다. 이맘때가 잎이 연하고 향도 좋으니 밭에 많이 뻗지 못하게 되도록 뽑아 잎을 다듬어 전도 부치고 페스토도하고 여름을 대비한 술도 담는다. 뿌리도 향이 좋아서 잘 말려 차로 먹기도 한다. 미나리는 이른 봄만 못하지만 향이 짙어 아 부지런히 먹는다. 골담초는 꽃이 지기 시작해 한번이라도 부지런히 따다가 샐러드 해 먹고 아카시아 꽃은 효소도 담고 튀겨도 먹는다.

환삼덩굴을 따다가 부침개도 차도 먹는다. 여름을 대비한 환삼덩굴 맥주도 담아야디! 사진_배이슬
환삼덩굴을 따다가 부침개도 차도 먹는다. 여름을 대비한 환삼덩굴 맥주도 담아야디! 사진_배이슬

소만에 농사와 작물들


논에는 벼를 심기 위해 물을 들여 써레질을 한다. 그래서 밭에 갈 때는 부러 논둑으로 걸어간다. 논둑으로 거닐며 논에 물든 하늘과 풍경은 아침, 저녁 모두 아름답다. 물 생태계가 자리 잡으며 논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가득해진다. 소만에 가득해짐이 색과 풀과 더불어 그곳에 사는 생명들까지 포함하는 말이구나 깨닫는다.

소만에는 곧 있을 모내기를 준비한다. 마지막 물못자리 때 역시 초록으로 가득해진 모판이다. 사진_배이슬
소만에는 곧 있을 모내기를 준비한다. 마지막 물못자리 때 역시 초록으로 가득해진 모판이다. 사진_배이슬

소만부터는 대부분의 식물들이 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한다. 씨앗으로 심은 것들은 씨앗에 저장했던 영양으로 자라다가 본잎이 3~5장 사이가 되니 그제야 스스로 밥을 만드는 광합성을 한다. 모종으로 옮겨 심은 작물들도 뿌리내리느라 몸살을 하다가 이제 땅 맛을 들이고 하늘 맛도 가득 담아 자란다.

토마토와 고추 뿌리가 자리를 잡았고, 이르게 뿌린 상추는 제법 뜯어먹을 만큼 자랐다. 지난해 떨어져 절로 자란 상추는 소박하니 곧 키를 키울 준비를 한다. 배추와 무씨 꼬투리가 갈색빛으로 여물기 시작하고, 시금치 씨도 마르기 시작한다. 마늘과 양파도 밑이 들기 시작하는 게 보이고, 이르게 심은 감자는 꽃봉오리가 올라왔다.

대가리파 꽃이 볕들 덕분에 씨앗을 맺었다(왼쪽). 땅 맛, 하늘 맛 든 상추가 제법 속이 찼다(가운데). 마늘과 양파는 추운 시간을 산다. 더워지니 슬슬 밑이 든 것이 보인다. 사진_배이슬


감자꽃이 피기 전에 김을 매며 북을 준다. 북주기는 고랑에 흙을 긁어 작물 뿌리에 흙을 보태어 주는 일이다. 땅속 줄기인 감자는 땅속에 묻힌 부분이 많을수록 감자를 많이 맺는다. 감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영양을 저장하는 때 자칫 해를 입힐 수 있어 감자 북주기는 감자꽃 피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 망종이 오기 전 꽃이 필 테니 마지막 감자 북주기를 하는 때다.

감자꽃 이른 것은 활짝 피기 시작하고, 늦은 것은 모우리를 맺었다. 사진_배이슬


 보릿고개과 논감자


 할머니는 보릿고개 논감자 이야기를 했다. ’논감자‘는 눈이 많아 눈감자 눈감자 하다 ’논감자‘라고 불렀다. 겉은 보라색, 속은 흰색이고 감자밥을 지어먹었다. 흰감자를 심으면서 한켠에는 조금이지만 꼭 심었다. 그 이유는 흰감자는 감자가 늦게 달리는데 논감자는 일찍 들어 보릿고개에 부족하니 쌀과 섞어 감자밥을 해 먹었단다.

그래서 이맘때 김매기를 부지런히 하며 감자 북을 주면, 논감자 심은 곳은 흙이 갈라지며 감자 든 것이 보인다. 이때 손가락을 흙 속에 넣어 똑똑 땅속 감자를 땄다. 풋것일 때 소쿠리에 놓고 벅벅 문질러 씻으면 껍질이 벗겨지고 아린 맛이 드는 눈도 제법 나갔다. 눈이 많이 몰린 끄트머리를 자르고 감자밥을 지으면 쫀득하면서도 부드럽고, 흰감자와는 다르게 향이 도는 감자 밥이 된다.


여러 가지 감자 중에서 보릿고개에 먹는 논감자. 사진_배이슬


논감자로 밥을 지어 먹으며 그 맛과 지혜로움에 거듭 감탄하며 생각했다. 보릿고개라는 위기에 안전한 먹을거리를 위한 할머니들의 지혜가 얼마나 멋진가. 아일랜드 대기근 이야기에서 보듯이 안전함과 지속가능성은 다양성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량과 효율만을 놓고 아일랜드는 주식인 감자를 한 품종 계열만 심었다가 전염병에 의해 주식을 잃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란 법이 없다.

가득해진다는 소만, 가득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득해지는 것이 넘쳐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움으로 읽히는 것은, 각각의 색과 속도로 꼴과 맛으로 채워질 때가 아닐까.

할머니가 이맘때 밭에 있으면, 밭으로 가던 할머니들이 한숨 돌리며 날씨와 농사, 자식과 어제 먹은 밥까지 이야기하곤 했다. 도란도란 그 옆에서 주워 배운 것이 그립다. 사진_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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