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계통 | 전력 계통 비상, 에너지 전환도 산업발전도 빨간불
- Theo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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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7 최민욱 기자
지난 10년간 한국의 재생에너지 설비 용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재생에너지 총 설비용량은 495% 확대됐지만, 같은 기간 실제 발전량 증가는 230%에 그쳤다. 설비의 양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발전량이 비례해 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잦은 출력제한에 있다. 송전망의 용량이 전력 수요에 비해 부족해지면서, 발전기를 인위적으로 멈추는 사례가 반복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여건임에도 실제 발전이 이뤄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2025년 상반기에만 제주도를 제외한 본토 지역에서 약 164GWh의 전력이 송전망 부족으로 인해 생산되지 못했다. 이는 4인 가구 약 9만7000세대가 반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에 해당하며, 재생에너지 확대가 기존 전력망의 물리적 제약에 가로막히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송·배전 인프라 투자 정체와 ‘계통 포화’ 현상
재생에너지 발전의 병목은 구조적인 인프라 부족에서 비롯된다. 지난 10년 동안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급증했지만, 전국의 송·배전망 증설은 이에 한참 못 미쳤다.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송전설비는 14%, 배전설비는 22% 증가하는 데 그쳐, 설비 증가율과 큰 격차를 보인다. 이처럼 인프라 투자가 정체되면서 전력망의 수용능력이 한계에 도달하는 ‘계통 포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설비가 집중된 남해안 지역에서는 계통 연계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2031년까지 계통 보강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신규 설비가 조건부 또는 지연 인허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전남·전북 지역에서는 송전선 부족으로 인해 계획된 발전량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서, 출력제한 발생일 수가 급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수의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은 실질적으로 계통 연계를 대기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 같은 지역적 병목 현상은 전국 단위의 재생에너지 발전 효율을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구조적 해결이 요구된다.
거듭 지연되는 송전 프로젝트들

전력망을 확충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지만, 핵심 송전선 건설사업은 만성적인 지연에 시달려 왔다. 대표 사례는 동해안-신가평 500kV 초고압직류송전(HVDC) 사업과 신가평-동서울 구간 송전망 프로젝트다. 이들 사업은 애초 2019년 완공을 목표로 시작됐으나, 잇단 일정 변경으로 현재까지 최대 8년 이상 지연된 상태다.
동해안-신가평 HVDC 사업은 착수 후 15년이 지나서야 완공되었고, 345kV 당진화력-신송산 송전선도 10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처럼 ‘십년 공사’가 반복되는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송전선 건설 자체에만도 평균 5~10년이 소요되며, 여기에 노선 인근 주민들의 반대, 보상 협의 지연, 인허가·환경영향평가 장기화, 부지 확보 난항 등이 겹치면서 일정이 지속적으로 밀린다.
실제로 동해안 HVDC 사업에서는 일부 주민들이 송전탑 설치를 반대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현장에서 공사를 물리적으로 막는 일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동해안에 위치한 발전소들, 예컨대 신한울 원전은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송전하지 못하고, 가동률을 낮춘 채 운용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처럼 송전망 지연은 한국 전력 인프라의 구조적 한계로 반복되어 왔다. 전문가들은 “전력설비가 주민에게 피해를 준다는 인식이 강해 필수 인프라도 적기에 건설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25년 3월, 인허가 간소화와 보상 강화를 담은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제정했지만, 뿌리 깊은 주민 수용성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결국 송전 인프라 확충의 지연은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원자력·화력 등 모든 발전사업의 병목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기술 외적 요인들이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중앙 집중·독점 구조가 만든 전력망 한계
한국 전력망의 구조적 특성 또한 재생에너지 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국내 송·배전망은 한전이 독점 운영하는 중앙 집중형 구조로, 민간이나 지역 차원의 자율적 망투자가 거의 없다. 이는 투자 효율성과 유연성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한전이 재정난으로 대규모 투자를 제때 집행하지 못하면 전력망 확충은 곧바로 지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한전이 도맡은 전력망 확충 사업들은 평균 4년 이상 준공이 지연되고 있는 실정인데,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송전망 기술 수준은 글로벌 추세에 한참 뒤처져 있다. 장거리 대용량 전력 송전에 필수적인 초고압 직류(HVDC) 기술 도입률은 전체 송전선의 1% 남짓에 불과하며, 송전선 지중화율도 13%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전력망 운영에 정보통신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그리드 관리 시스템도 충분히 구축되지 못했다.
한국 전력망은 여전히 20세기형 중앙 집중식 설비에 머물러 있어, 지역 간 전력 수송이나 실시간 계통 제어에서 유연성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태양광·풍력처럼 출력 변동이 큰 분산전원을 대규모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계통 불안정을 우려해 발전출력을 제한하거나 접속을 지연시키는 사례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
폭증하는 수도권 전력 수요, 발목 잡힌 첨단산업
한편 수도권의 전력 수요 급증과 이에 대비한 전력망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이 경기·서울권에 속속 들어서면서 막대한 추가 전력 수요가 예상되지만, 이를 감당할 송배전 인프라 용량 증설은 제자리걸음이다.

그 결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는 산업 입지가 전력망 때문에 좌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2024년 전력계통 영향평가 제도가 시행된 이후, 인천시에 접수된 대규모 전력 사용 데이터센터 24곳이 모두 “전력망 여유 부족”을 이유로 전력 공급 불가 판정을 받았다. 수도권 전력계통이 이미 포화 상태여서 신규 대용량 수요를 연결해 줄 여력이 없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전력을 나르는 도로는 그대로인데 차(전력 수요)만 두 배로 늘어난 상황”이라는 자조가 터져 나온다. 일례로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 AWS와 SK그룹은 수도권에 계획했던 대형 데이터센터를 발전소가 많은 울산 지역으로 방향을 틀어 건설을 추진 중이다. 전력 인프라 병목이 수도권에서 가장 먼저 현실화되면서, 첨단 산업의 입지마저 제약받는 딜레마가 이중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산업계의 RE100(재생에너지 100%) 달성 노력과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도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수도권에 밀집한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장들은 RE100을 위해 막대한 청정전력을 필요로 하지만, 정작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부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전달할 송전 인프라가 부족하다.
결국 일부 기업은 비용이 높더라도 자체 태양광 설비 구축이나 해외 재생에너지 조달을 고려하고 있지만, 이것은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 산업 전반의 탈탄소화를 위해서는 지역 간 전력망을 대폭 증설하고, 분산에너지원을 유연하게 연결·조정할 수 있는 스마트 에너지 인프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독일·일본에 비해 부족한 분산·스마트 그리드 투자
한국 전력망의 구조적 한계는 비슷한 산업 구조를 가진 독일, 일본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해 진다. 독일의 경우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이 40%를 넘어서면서, 북해 연안의 풍력을 남부 공업지대로 실어 나를 초고압 송전 고속도로 구축을 국가 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수천만 가구에 스마트 전력계를 보급하고, 지역별 송전망 운영사업자(TSO) 간 광역 전력망을 연계해 출력 변동성을 관리하고 있다. 중앙독점형보다는 지역 분권형 전력망 모델을 지향하면서, 소규모 전력 생산자도 쉽게 계통에 참여하고 판매할 수 있는 시장제도를 마련했다.
일본 역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전력망 혁신에 나섰다. 도쿄전력을 비롯해 송배전망의 소유·운영을 분리하고, 전국에 스마트미터 8500만 개 이상을 설치하여 전력 수요변동을 정교하게 파악하고 있다. 아울러 섬나라 특성에 맞춰 마이크로그리드 실증 사업을 추진, 도서 지역과 산업단지 등에 1200개 이상의 소규모 자급자족형 전력망을 도입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독일과 일본은 재생에너지 증가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계통 운영을 유지하고, 분산자원을 활용한 수요 대응력도 향상되고 있다. 특히 독일은 전력 도매시장에 수요반응을 활성화하여 전력 피크 시 소비를 줄이거나 분산전원의 출력을 실시간 조절하는 체계를 갖췄다.
반면 한국은 최근에서야 자동 수요반응 시범사업을 시작하는 등 수요측 대응이 걸음마 단계이고, 전력시장 구조도 중앙 집중식으로 경직돼 유연한 분산에너지 활용이 미흡한 실정이다. 분산형·스마트 그리드로의 이행 속도에서 한국이 뒤처지면서 재생에너지 확대의 비용과 제약이 가중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2035 NDC·RE100 달성의 열쇠는 전력망
결국 전력망 확충과 현대화가 재생에너지 전환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고리가 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35년까지 전체 전력 생산의 3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2035 NDC를 내놓았다. 또한 국내 주요 제조업·IT 기업들도 2040~2050년까지 사용 전력을 100% 청정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RE100 목표를 속속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 공약과 산업계 약속이 현실화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바로 지역 간 송전망 용량 증설과 스마트 그리드 투자를 통한 계통 유연성 확보이다.
정부는 지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2030년대까지 수십조 원 규모의 송·변전 설비 투자를 예고했지만, 계획된 54건의 주요 전력망 사업 중 절반 이상이 벌써 지연을 겪고 있다. ‘탈탄소 전환’의 시간표를 맞추기 위해서는 전력망 구축의 사회적 지연 요인을 줄이고 민간 자본과 기술을 적극 유치하는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
전력망 없이 에너지 전환 없다는 말처럼, 재생에너지의 발전 잠재력을 온전히 활용하려면 뒷받침할 그릇부터 갖춰야 한다. 탄소중립을 향한 10년 남짓의 시간 동안, 한국 전력망이 병목을 해소하고 미래형 그리드로 거듭날 수 있을지가 에너지 전환의 성패를 결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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