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⑦ 폭력과 공포, 종신독재의 문이 열리다—7차 개헌(유신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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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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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박한용
1972년 10월 유신개헌으로 시작된 박정희의 종신독재 체제와 그에 따른 폭력, 공포를 다룬다.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 언론 통제 등을 통해 정권은 초헌법적 권력을 장악했다.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형식만을 유지한 채 실질을 완전히 무너뜨린 독재 시스템이었다.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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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과 함께 찾아 온 개헌
1972년 10월 17일,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대한 분수령이자 헌정 질서를 뿌리째 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새벽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제7차 헌법 개정, 이른바 '시월유신'의 서막이 열렸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탱크가 배치되고, 국회의사당은 사실상 군부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국회는 해산되었다. 정치인들은 체포되거나 연금되었고, 언론은 통제되었으며, 시민들의 일상의 삶마저 공포에 휩싸였다. 제7차 개헌(유신헌법 제정)은 군화발과 총구를 동원한 일종의 친위쿠데타로 시작되었다.
체포·연금된 인사들은 야당 의원뿐 아니라 학자, 언론인, 대학 교수 등도 포함되었고, 이후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사상 전향'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망에 올렸다. 학생 운동가와 시민 활동가들은 자정 무렵 자택에서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계엄령 위반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등 주요 대학은 계엄군이 상주하며 강제 휴교 조치되었고, 신문사는 계엄사령부의 직접 명령으로 보도 내용을 사전 승인받아야 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장갑차와 군 병력이 배치되어 시민들의 이동을 감시했으며, 시위 징후가 보이면 즉각 연행과 구타가 자행되었다. 당시 계엄군은 민간인과 학생을 불심검문하고, 신분증이 없거나 외출 이유가 불분명할 경우 군부대로 연행한 뒤 구타와 강압 조사를 벌였다. 비상계엄령 하에서는 기본권이 거의 정지되었고, 일상의 삶은 공포와 감시 속에 짓눌렸다.
불과 한 달 뒤인 11월 21일,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라는 요식 절차를 거쳐 통과되었고, 12월 23일 박정희는 단독 입후보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을 거쳐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이 취임은 대통령이라기보다, 초법적 총통에 가까운 절대 권력자의 등장이었다. 이로써 한국형(또는 분단 버전) 파시즘 체제, 유신독재가 시작되었다.

유신독재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유신이 남긴 상처는 단지 7년의 통치로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군부세력이 그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하면서, 유신체제는 실질적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한국사회를 짓눌렀다. 유신헌법은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독재를 제도화한 정권의 정치 교범이자 후속 권위주의 정권의 밑그림이었다.
유신체제의 배경, 장기집권을 위한 권력구조 개편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정권에게 위기의 신호탄이었다. 민주공화당은 노골적인 선거 개입과 행정 동원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승리를 도왔지만,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게 불과 94만 표 차이로 신승했다. 게다가 같은 해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이 112석을 확보했지만,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특히 서울, 부산 등 도시 지역에서의 참패는 민심이 이미 정권을 떠났음을 보여 주었다. 이른바 '여촌야도(與村野都)'의 민심 구도가 명확해지며 박정희 정권은 위기 의식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내 권력 갈등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박정희는 1971년 6월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외형상 후계자 구도로 김종필을 내세운 듯했으나, 10월에 야당(신민당)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을 여당인 공화당 일부 의원들이 찬성해 가결시키는 '항명 파동'이 발생했다. 이는 공화당 내부조차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분노한 박정희는 이들을 강하게 탄압했고, 이후 공화당은 철저히 정권에 종속되는 구조로 개편되었다.
유신개헌을 위한 국면 전환과 법적 장치들
박정희는 종신독재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련의 법적·경제적·안보적 명분을 사전에 구축해 나갔다. 우선 1971년 말,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여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은 물가, 임금, 언론, 집회, 출판, 이주까지 통제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다. 사실상 계엄령 수준의 사회 통제권을 법제화한 조치였다.
이와 동시에 1972년 8월 3일에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되었다. 이는 기업들이 빚더미에서 도산하지 않도록 정부가 사채를 동결해 주는 조치였다. 당시 사채 이자율 3.84%를 강제로 1.35%로 낮추고,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는 기업과 재벌을 살리기 위한 이례적인 조치였고, 그 대가로 재벌은 정권의 경제적 후견 세력이 되었다. 당시 야당은 이를 “재벌특혜”이자 “정권유지를 위한 자금동원책”이라 비판했다.
남북 화해 무드를 이용한 정치적 전환
박정희 정권은 종신독재를 보장하는 개헌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북관계도 활용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72년 7월 4일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합의해 발표된 이 성명은 남북 간의 첫 공식 합의였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3대 원칙은 민족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고, 많은 국민들은 전쟁 공포의 완화와 대화의 시작에 환영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권 비판 세력과 일부 언론, 지식인들은 이 성명을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 간주했다. 실제로 이 성명은 박정희 정권에게 통일이라는 미명 아래 초헌법적 권한을 강화할 명분을 제공했다. '다가올 통일에 대비한 비상체제'라는 논리는 유신헌법 도입의 핵심 논거로 활용되었다.
비상계엄의 명분과 개헌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기존 헌법을 폐기했다. 박정희는 "국가 안보 위기와 사회 혼란의 예방"을 개헌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또 베트남 전쟁의 격화,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 북한의 도발 등 외부적 위기를 과장하며 강력한 통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야당과 시민사회의 저항, 정치 갈등과 국론 분열을 이유로 삼아 기존 헌정 질서를 '국가적 위기 초래의 근원'으로 몰아붙였다. 심지어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통일 대비를 위한 체제 정비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내세웠다. 결국 앞서 수많은 조치들은 영구집권을 위한 빌드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10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표되었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약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 투표는 언론이 통제되고 반대 운동이 철저히 억압된 상태에서 치러졌다.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 모든 권력을 1인에게!
유신헌법의 핵심은 권력의 전면 집중이었다. 대통령은 국민 직접선거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간선기구에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6년, 연임 제한이 없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 긴급조치권, 법관 임명권, 헌법개정 제안권까지 갖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모든 권력의 원천이 대통령이라는, 초헌법적 존재로 만들었다.
또한 국회는 입법기관이 아니라 대통령의 입법 보조기구로 전락했다. 사법부도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면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이 양산되었다. 실제로 이후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한 재판은 대부분 유죄였고, 형량도 가혹했다. 언론은 폐간 또는 정간 조치되었고, 야당과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철저히 탄압당했다.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을 파괴한' 유신개헌
유신개헌은 한국 현대사에서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을 파괴한 대표적 사례이다. 국민투표, 입법기관, 언론 등 민주주의의 형식만 유지한 채, 실질을 완전히 무너뜨린 독재 시스템이었다. 법을 수단으로 독재를 제도화하고, 국민을 통제하며, 반대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갔다.
김대중 납치사건(1973),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한 재야인사들의 선언 등 반독재 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긴급조치권과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공안기구의 총체적 감시와 탄압 속에서 대중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학가에서 일어난 반유신 시위는 대대적인 강제징집, 구속, 고문 등으로 억눌렸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일부 중진들이 유신헌법에 반대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억눌렸다. 예춘호 등의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거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유신은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라, 정당 체계와 시민사회까지 완전히 장악한 전면적인 권력 재편이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며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았지만, 유신이 남긴 독재의 유산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신체제는 단순한 개인 박정희의 독재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가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전체주의로 기능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더 큰 비극은 유신의 종말 이후에 다시 일어났다. 전두환·노태우와 같은 신군부가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이듬해 5월 광주에서 ‘피의 살육’을 벌이며 신군부 독재가 등장했다. 자옥문이 두 번 열린 것이다.
친위쿠데타에 의한 유신독재같은 망국적 사건은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2024년 12.3 내란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은 역사의 소명 입니다. 3대특검에게 주어진 책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