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대표 편집인
우리는 스스로를 개인이 아니라 ‘종(種)’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근대’라는 말에는 찬사와 오욕이 교차한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그저 그런 종에서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멸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종이 되었다. 인간의 뇌 크기는 그대로 인데, 이 시기 과학과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역사가들은 저마다 이야기하지만, 이 느닷없는 ‘괄목상대’의 원인에 대해 하나로 꿰는 설명은 아직까진 없다. 그중 신빙성이 높은 설명은 ‘공포’다.
유럽 인구 절반 가까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지식으론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이 전염병은 신이 내리는 저주였다. 그전까지 친밀하고 자애로운 자연은 낯설고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진화는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를 품고 있다. 극단적인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급성장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부수적으로 물질적 풍요도 뒤따랐다. 지금의 문명은 인류가 작정하고 기획한 게 아니라 다분히 우연의 산물이라 봐야 한다.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라면 부작용에 대한 대책도 염두에 두었을 터이다.
문명이 가속되는 만큼 자연과 인간은 더 빨리, 더 멀리 분리되어 갔다. 자연은 주변부로 밀려났고 중심에는 인간만 남게 되었다. 인간에게 자연은 개발하고 이용하는 자원이 되었다. 대등한 관계에서 종속 관계로 변했다.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가 되어 갔다. 근대는 이를 위해 장치들이 필요했다. 시민, 국가, 이데올로기, 법체계 등이 과학과 기술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특히 근대 국가와 근대 법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근대 국가는 개인의 권리 위에 세워져 있다. 권리가 없으면 보호받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처음엔 주로 백인 남성을 의미했다. 당연히 근대 법은 백인 남성만을 권리 주체로 인정했다. 피부색이 다른 남성과 여성은 보호망 밖에 있었다. 다행히 인류는 권리 주체 범위를 계속 확대해 왔다. 현재 법체계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남성과 여성도 권리 주체로 인정하고 있다. 각 주체의 권리 행사 수준과 내용은 차치하고 말이다.
자연의 시대, 신의 시대, 인간의 시대를 넘어 우리는 지구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지구의 시대에는 이에 걸맞은 문명이 필요하다. 인간의 시대 문명은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시대에 작동했던 국가와 법도 전환이 요구된다. 오직 인간만을 위한 법체계는 이제 당위성을 잃어 가고 있다. 지구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문명이 초래한 위기와 극복이다. 그 위기는 산업문명이 인간만을 지구의 주인으로 보고 자연을 자원과 물건 취급을 함으로써 발생했다.
지구의 시대에 적합한 지구법은 권리 주체를 인간과 자연으로 확장한다. 지구법이 말하는 권리는 지구 전체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모든 생명이 고유한 영역에서 그답게 살다 갈 자격이다. 권리는 존재와 함께 오고, 존재가 있는 곳에 권리가 있다. 그래서 지구 법의 핵심은 ‘존재할 권리’, ‘살아갈 권리’, ‘지구의 진화에 참여할 권리’다. 새로운 문명에는 새로운 거버넌스가 존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상상이 필요하다.
미흡하지만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하늘과 바람, 나무와 강이 권리를 갖는 건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생각해보면 그리 낯설 일도 아니다. 피부색이 다른 남성과 여성이 권리를 갖는 게 백인 남성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법인이 인격을 갖는 것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필요하면 적응하고 안착하기 마련이다. 진화의 위대함이다. 자연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도 진화를 한다. 반려동물의 친밀함 때문인지 동물을 물건으로 보지 않는 인식이 넓어지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2050년까지 우리는 탄소 배출량과 흡수량의 균형을 맞춰 ‘넷 제로’를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온실가스 감축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어쩌면 ‘최후의 전장’은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생물권의 권리 보장’일지 모른다. 제로로 만들어야 하는 건 이산화탄소 배출량뿐 아니라 생물 다양성 감소를 막기 위해 ‘종 상실률’도 제로에 가야 한다. 모든 살아있는 종들의 서식지를 위해 ‘농토 확대율’도 제로가 되어야 한다.
신이 모든 사유를 지배하던 중세를 벗어나 ‘찬란한 개인’을 옹립한 건 확실한 진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개인은 오만해졌고 자신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인이 아니라 “종(種)‘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종으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지구 생태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임을 각성해야 한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180년 전 종으로서 사유를 했던 ’시애틀 추장‘을 기억하자.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이다.
공감하고 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