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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동아시아 종과 횡 | 국적이냐, 국민이냐, 시민이냐

 

2024-09-20



송병권 / 상지대학교 교수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텔레그램 CEO 파벨 두로프는 국적이 4개

최근에 프랑스에서 체포된 텔레그램 CEO 파벨 두로프는 러시아, 세인트키츠 네비스, 아랍에미리트, 프랑스 등 무려 네 개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두로프를 둘러싸고 각 국가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른 모양이다. 만약 두로프가 그중 한 곳에 특별한(?) 충성을 했다면 다른 세 곳에서는 반역을 한 셈이 되는지와 같은, 나와는 무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식민지 시기 살았던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

역시 최근 들어 뉴라이트 역사관에 기초하여 식민지 시기에 살았던 조선인이 일본 국적이었다는 주장을 둘러싸고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그 당시의 현실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자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현실적 상황에 대한 인식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는 점이 함정이면 함정이다. 식민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들의 무지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도대체 국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 백성들은 대한제국 신민이 되었고, 참정권은 없었다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면 당연히 그 나라의 국민이 되고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영화의 무대인 건지섬은 영국보다는 프랑스 코 앞에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곳은 엄밀하게 말해 영국의 영토가 아니라 영국 왕실의 속령일 뿐이다. 따라서 영국 시민권을 별도로 취득하지 않는다면 이곳 주민들은 영국 의회에 투표권이 없어, 영국 국민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렇듯 국적을 국민의 자격으로 생각한다면, 국민은 먼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정치적 의미에서 참정권(선거권과 피선거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개항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의회 개설에 관련한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한 조선 국왕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때, 조선 백성들은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국민이 아니라 신민이 되었고, 대한제국 신민에게 참정권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창졸지간에 병합되며, 대한제국의 국호는 ‘조선’으로 변경되었고, 한국인은 조선인이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야기하면 대한제국의 신민은 일본제국의 국민이 아니라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조선인이 되었다. 병합조약의 조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은 더욱 참담하다. 대부분의 조문은 황제와 그의 가족, 그의 귀족들에 대한 처우를 보장하는 내용이었고, 마지막 조문에 일반 민중에게 법을 잘 지키라는 내용이 훈화조로 들어 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참정권은 마지막까지도 식민지 조선에 실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법마저도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제국’에 ‘내지’라 불렸던 일본 열도와 ‘외지’라고 불렀던 식민지 사이에는 ’법역‘의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일본의 메이지 헌법과 일본에서 제정된 법률이 ‘외지’인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신민에 적용되는 일본 천황의 칙령이나, 총독부의 제령으로 이를 보완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국민이 향유하게 되었던 점진적인 참정권의 확대는 식민지 땅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니, 조선인들은 신민으로서의 의무만 있고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없는 상태로 존재할 뿐이었다. 심지어 식민지 시기 한반도에 거주했던 재조일본인도 선거권과 피선거권, 즉 참정권이 없었다. 이 시기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존재했다. 조선인이 참정권을 가지려면 일본으로 이주해서 위의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일본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친일파 박춘금처럼 말이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가던 1940년대 중반에 가서야 일본 의회는 전시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에 선거구를 설치하고 일본 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이미 보통선거제가 실시되었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을 납세한 성인 남성으로 제한하는 차별적인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결과적으로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나 실시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고, 일부 친일파를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임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최종적으로 참정권은 마지막까지도 식민지 조선에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결국 식민지 시기에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논쟁일 수도 있다. 국적 문제는 국민의 정치참여 문제를 제외하고는 논의하기 곤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에 대항한 독립전쟁 과정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소리 높여 외쳤던 것처럼 ‘과세 없이 대표 없다’는 모토처럼 말이다.

쿄토국제중고등학교 야구부가 106년 역사를 자랑하는 코시엔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하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쿄토국제중고등학교 페이스북


쿄토국제고의 야구 우승, 트랜스내셔널한 시민 사회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일본 쿄토국제고등학교에서 코시엔 우승을 보며 시민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국계 학교의 우승을 보면서, 국뽕이 차오른 분들도 있겠지만, 이 학교가 사실은 일본 정부의 문부과학성에서 인가한 정규학교로,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이 모두 통학하고 있으며, 야구부에도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했으면 좋겠다. 일본 내에서 쿄토국제고등학교의 우승을 두고 혐한 논란도 일어났지만, 순수하게 이 학교의 우승을 축하하는 모습도 역시 살펴볼 수 있었다. 국적과 국민 문제를 넘어서서 트랜스내셔널한 시민 사회의 미래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 거리를 안겨 준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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