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외래종 유입 원인은 '인간', 박멸만이 답은 아니다
- Dhandhan Kim
- 9월 18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9월 19일
2025-09-18 김복연 기자
외래종/토종 구분은 과학의 문제라기보다, 도시 질서와 인간의 감정(불쾌·혐오)이 만든 경계다. 인천 대벌레처럼 토종도 불편하면 ‘퇴치’ 대상이 되는 순간, 이분법은 사실상 무력화된다. ‘침입·유해’ 같은 공적 언어는 박멸을 정당화하지만, 유입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활동과 도시화·기후변화다. 이제는 박멸이 아니라 생태적 기능과 상호작용을 기준으로 한 공존의 원칙과 도시 생태감수성 재설계가 필요하다.
대벌레 사례로 드러난 ‘박멸의 본능’
헤드라인이 먼저 외친다
“뉴트리아 퇴치 10년, 박멸 한계 드러내”(KNN·2024)
“한라산 장악한 외래종 꽃사슴… 토종 노루 서식지서 밀려나”(TV조선·2024)
“인천항 야적장서 붉은불개미 또 발견… 긴급 방제”(KBS·2024)
“아산시, 생태계교란종 황소개구리 퇴치작업 실시”(아산신문·2020)
“괴물쥐 ‘뉴트리아’ 제주 서식… 퇴치사업 늑장 논란”(헤드라인제주·2013)

외래종 유입이 확인되는 즉시, 언론과 행정의 언어는 대체로 ‘퇴치·박멸·긴급 방제’로 수렴한다. 그리고 그 동일한 목소리가 지난 여름 인천 문학산·천마산·원적산 등지에서 대벌레가 대량으로 목격됐을 때도 거침없이 작동했다. 등산객 민원과 지역 보도가 이어지고, 시민들의 SNS에는 “징그럽다, 치워 달라”는 글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런데 이 곤충은 외래종이 아니었다. 한국 전역에 서식하는 토종 대벌레다. 우리 곁에 오래 살아왔지만,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퇴치해야 할 것’으로 호명되는 순간, 외래와 토종의 구분은 사실상 무력해진다.
이분법의 무력화: 기준은 과학이 아니라 감정

외래종과 토종의 이분법은 종의 기원이라는 과학적 표지로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도시의 경제 질서와 인간의 감정이 결정권을 쥔 경우가 많다. 대벌레는 산림이나 생활권에서 간헐적으로 대발생하는 ‘돌발성’ 곤충으로 오래전부터 기록돼 왔고, 잎을 갉아먹어 미관상 불편을 주더라도 피해목이 대규모로 고사하진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의 반응은 대체로 단순하다. 보기 싫고 불편하면 제거 대상이 된다. 이 논리는 외래종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멧돼지·까치·고라니 같은 토종도 ‘유해동물’로 지정되어 포획과 사살의 대상이 된다. 기준은 생물학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에 침범한 데 따른 불쾌·혐오·불편이라는 감정이다.
기후위기와 도시화가 만든 ‘출현의 일상화’
문제는 이 감정의 기준이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자주 작동한다는 점이다. 따뜻해진 겨울, 건조한 봄, 도시 확장과 녹지 파편화, 무역과 관광의 일상화는 생물의 이동과 개체수 급증을 촉발한다. 외래종 유입은 물론, 토종의 도시 출현 또한 빈번해진다. 우리는 그때마다 ‘쫓아낼 것’과 ‘남겨둘 것’을 나누는 경계선을 다시 긋는다. 하지만 그 경계는 생태적 기능이나 상호작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인간 중심의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감정의 선으로 수렴하기 쉽다.
‘침입’과 ‘유해’의 언어가 만드는 제거의 정당화
외래종 문제를 다루는 공적 언어는 경계 강화에 기여한다. ‘침입’, ‘교란’, ‘유해’라는 단어는 방제의 긴급성과 필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지만 생명의 존재 자체를 ‘제거 가능’한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효과도 낳는다. 그러나 외래성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다. 고추·감자·옥수수처럼 한때 외래였던 생명은 지금 ‘한국적’ 식탁의 일부가 되었다. 반면 수십 년 전 도입되어 자연화된 생물 중 여전히 ‘외래’라는 꼬리표를 달고 관리되는 것도 있다. 인간이 부여한 시간성과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정체성이 변하는 생명을 또 얼마나 쉽게 선과 악으로 나누어 왔는가.
원인은 인간 활동, 그러나 결과만 처벌한다
질문을 바꾸어 보자. 우리에게 어떤 생명은 환영하고, 어떤 생명은 제거할 권리가 있는가. 그 기준은 누구의 감정을, 무엇의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가. 외래종 유입을 둘러싼 진짜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활동에 있다. 도시화와 토지이용 변화, 국제 물류의 가속,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생물의 분포를 바꾸고 이동을 촉진한다. 그럼에도 결과만을 ‘퇴치’ 대상으로 삼는다면, 원인을 만든 인간 사회의 책임은 보이지 않게 된다.
박멸에서 공존으로: 도시의 생태감수성 재설계
이제 필요한 것은 박멸의 기술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외래/토종의 경계를 절대화하기보다, 기후위기 시대에 서로 낯선 존재들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인정하고, 도시의 생태 감수성을 재설계해야 한다. ‘유해성’ 판단을 불쾌·혐오의 감정에서 생태적 기능과 상호작용의 관점으로 옮기고, 개체수 조절이 필요한 경우에도 최소 피해 원칙과 과학적 근거를 명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생명을 기능으로만 보지 않고 존재로 보려는 태도와 우리 곁의 생명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떤 생명과 함께 살 것인가
외래종은 박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거울이다. 우리가 어떤 생명과 함께 살 수 있다고 믿는지, 어떤 생명은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지, 어떤 생명에게까지 도시의 규칙을 강요하려 하는지.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곧 우리의 문명을 규정할 것이다.








"외래종은 박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거울이다. 우리가 어떤 생명과 함께 살 수 있다고 믿는지, 어떤 생명은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지, 어떤 생명에게까지 도시의 규칙을 강요하려 하는지.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곧 우리의 문명을 규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