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산림치유포럼 | 리즈 오브라이언, 영국 국가보건서비스로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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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0 최민욱 기자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는 ‘녹색 사회 처방’이라는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을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약물이나 수술이 아닌, 자연과의 접촉을 치료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비의료적 접근 방식이다. 정신 건강과 웰빙을 증진하고, 건강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체계적이고 증거 기반의 정책이기도 하다. 이제 녹색 사회 처방은 소수의 대안적 시도를 넘어, 측정 가능한 성과를 내는 구조화된 공중 보건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리즈 오브라이언(Liz O’Brien) 박사는 영국 산림청 소속의 수석 사회과학자로, ‘사회와 환경 연구 그룹(Society and Environment Research Group)’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연구는 인간과 숲의 관계를 중심으로, 특히 나무와 산림이 제공하는 문화적 생태계 혜택(cultural ecosystem benefits)과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건강 및 웰빙(health and wellbeing) 효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숲과의 접촉이 개인의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를 탐구하며, 이러한 경험이 공동체의 사회적 결속과 문화적 가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오브라이언 박사는 나무의 사회적·문화적 가치 평가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과 행동적 변화를 측정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영국 내외 여러 국가 프로젝트와 국제 공동연구, 전문가 그룹에 활발히 참여하며, 산림의 사회적 기능을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책과 실천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약 대신 숲을 처방하는 사회
'녹색 사회 처방(Green Social Prescribing, GSP)'의 도입은 공중 보건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전환을 상징한다. 질병의 생물학적 원인에 집중하던 기존 의료 모델에서 벗어나, 이제 건강을 결정짓는 사회·경제·환경 요인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이에 개입한 것이다. 이 개념은 ‘사회 처방(Social Prescribing)’이라는 보다 넓은 틀에서 파생되었다. '사회 처방'이란 신뢰받는 전문가가 개인의 비의료적 건강 문제와 사회적 필요를 파악하고, 지역사회 내의 비임상적 지원이나 서비스를 연결해 주는 방식을 말한다.
녹색 사회 처방은 이 중 연결 대상을 자연 기반 활동으로 특정한 하위 개념이다. 지역 걷기 모임, 공동체 정원 가꾸기, 자연보전 자원봉사, 야외 수영, 숲속 예술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치료 선택지를 확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건 시스템의 범위를 지역사회와 자연환경으로 확장하며, 이들을 건강 증진의 적극적인 파트너로 통합하려는 전략적 시도다.
영국에서는 이 원칙이 각 지역의 보건 체계 특성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되고 있다. 잉글랜드는 일차의료기관 중심의 의뢰 모델을, 스코틀랜드는 지역사회 연결 담당자 중심의 전달 체계를 채택했다. 웨일스는 의료 중심 접근보다 지역사회 기반 통합 모델을, 북아일랜드는 30개 보건 단체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 처방을 운영한다. 이는 녹색 사회 처방이 중앙정부의 경직된 지침이 아니라, 지역 상황에 맞춰 변용 가능한 정책 프레임워크임을 보여 준다.
국가 보건 시스템에 뿌리내린 녹색 처방
영국에서 녹색 사회 처방은 더 이상 실험적 접근이 아니다. 이제는 '영국 국가 보건 서비스(NHS)'의 공식 보건 서비스 체계 안에 통합된 제도다. 2019년 발표된 ‘NHS 장기 계획(NHS Long Term Plan)’을 통해, 사회 처방은 잉글랜드 보건 시스템의 정식 구성 요소로 채택되었다. 이어 2022년에는 모든 일차 의료 네트워크가 사회 처방을 필수 서비스로 포함하도록 의무화됐다. 2019년부터 2023년 말까지 총 940만 건의 사회 처방 관련 상담이 이뤄졌고, 이 중 550만 건에는 실제 의뢰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코드가 부여되었다.
이처럼 녹색 사회 처방이 제도화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링크 워커(Link Worker, 연계 담당자)’라는 새로운 직군의 등장이다.
잉글랜드의 운영 체계는 다음과 같다. 일반의(GP)나 일차 의료기관이 환자를 링크 워커에게 의뢰하면, 링크 워커는 심층 상담을 통해 환자의 사회적 필요를 파악하고, 가장 적합한 자연 기반 활동 단체와 연결한다.
이를 위해 잉글랜드에는 3200명의 링크 워커가 활동 중이며, 2019년에는 사회 처방의 표준화와 연구를 전담할 ‘국립 사회 처방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for Social Prescribing)’도 설립되었다.
링크 워커는 NHS와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보건 시스템 안에서 녹색 사회 처방을 확장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장치다. 이들은 공공의료 체계와 지역사회의 자원봉사·비임상적 서비스 제공자 사이에서 연결자 역할을 수행한다. 의사는 지역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파악하기 어렵지만, 링크 워커는 그 연결망과 지식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며, 진단이나 처방이 아닌 ‘맞춤형 연계’에 집중하는 새로운 유형의 보건 인력이다. 영국 정부가 이 직군을 대규모로 창출한 것은, 녹색 사회 처방을 단순한 권고가 아닌 정규 서비스로 정착시키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숫자로 증명된 자연의 치유 효과
영국의 녹색 사회 처방은 이제 단순한 실험적 시도를 넘어, 실제 정책 효과와 경제적 타당성을 수치로 입증하고 있다. 정부는 2년간 577만 파운드(약 100억 원)를 투입해 녹색 사회 처방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에는 정신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8339명의 참여자가 활동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사업이 건강 불평등 완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참여자의 57%는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했고, 21%는 소수 민족 출신이었다. 이는 기존의 의료 서비스가 닿기 어려웠던 집단에게 녹색 사회 처방이 효과적인 접근 통로로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프로그램 참여자의 웰빙 지수 또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개선되었다. 영국 통계청(ONS)이 개발한 4대 웰빙 지표(ONS4: 행복, 삶의 만족도, 삶의 가치, 불안)를 기준으로 측정한 결과, 모든 항목에서 참여 전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초기 평균값이 전국 평균보다 현저히 낮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 개선 폭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참여 이후에는 대부분의 지표가 영국 평균 수준에 도달했으며, ‘불안’ 항목은 평균보다 더 낮아졌다. 녹색 사회 처방이 단기간 내에 회복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정신 건강 회복 전략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경제적 평가 지표인 사회적 투자수익률(SROI) 또한 이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분석에 따르면 정부가 1파운드를 투자할 때, 2.42파운드의 사회적 가치가 회수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녹색 사회 처방이 보건 재정을 압박하는 비용 항목이 아니라, 미래의 의료비 절감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투자임을 의미한다.
숲에서 좋은 기분을 느끼다
데이터로 입증된 녹색 사회 처방의 효과는 ‘필굿 인 더 포레스트(Feel Good in the Forest)’와 같은 구체적 프로그램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드러난다. 잉글랜드 산림청(Forestry England)과 스포츠청(Sport England)의 파트너십으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녹색 사회 처방의 대표적 모델로 평가받는다.
핵심은 참여자 중심 설계다. 단순히 숲을 개방하는 것을 넘어, 특정 집단의 요구에 맞춘 맞춤형 활동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숲속에서 함께 노래하는 ‘우드랜드 워블러스’, 응급 구조대원 등 남성 참여자를 위한 대화형 걷기 모임 ‘워크 앤 토크 999’, 노숙인을 위한 그룹 활동,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좌식 운동’ 등이 포함된다. 이 활동들은 각 대상의 심리적·신체적 장벽을 낮추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프로그램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참여자들의 실제 경험은 녹색 사회 처방의 구조적 효과를 입증한다. 한 참여자는 숲속 환경이 “머리를 맑게 해준다”고 말하며 정신적 안정감을 강조했고, 또 다른 이는 “사람들을 만나며 불안 수준이 낮아졌다”고 언급했다. 특히 남성 참여자들은 또래와의 공동 활동 속에서 평소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을 했고,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가진 이들은 신체 활동을 꾸준히 지속할 동기를 얻었다.
이러한 복합적 효과는 세 가지 요소—자연 환경, 의미 있는 활동, 사회적 연결—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프로그램은 단지 자연이라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화된 경험을 설계한다.
프로그램의 성공은 환대적이고 중립적인 공간으로서의 숲, 참여자의 선택권을 존중한 활동 구성,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헌신적인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결과다. 숲은 병원이나 상담실이 제공하지 못하는 비판단적 회복 공간으로 작용하며, 이곳에서 참여자들은 ‘환자’가 아닌 한 명의 개인으로 존중받으며 회복을 경험한다. 이는 녹색 사회 처방이 단순히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관계·자율성·정서 안정이 작동하도록 설계된 복합적 치료 체계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지속가능성을 가로막는 현실의 장벽
녹색 사회 처방은 괄목할 만한 정책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한 제도로 정착하기 위한 여러 구조적 제약이 남아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는 녹색 사회 처방에 대한 인식과 정보의 간극이다. 의료 전문가들과 일반 대중 모두 녹색 사회 처방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사회적 처방’이라는 상위 개념에 비해 ‘녹색 사회 처방’이라는 구체적 접근 방식에 대한 인지도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의료진들은 다수의 환자들이 전통적인 약물 치료를 더 선호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처방을 내리는 의료진 당사자와 함께하는 링크 워커가 없을 경우, 지역 내 자연 기반 활동에 대해 안내하기 어렵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정책의 확산 가능성에 제약을 거는 장벽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구조적 제약은 공급 기반에 있다. 현재 녹색 사회 처방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 단체들은 대부분 단기·경쟁 사업 기반의 재정 구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서비스의 지속성 확보와 장기 계획 수립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공급자들은 복합적인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참여자들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전문 인력과 자원이 부족하고, 예방 중심 참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공식 의뢰 시스템(NHS–링크 워커)에서 생성되는 안정적 수요와, 그것을 뒷받침할 지역 공급 기반의 불안정성 간의 명백한 구조적 불일치를 드러낸다.
이러한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제도 전체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NHS는 제도화를 통해 정규 인력을 배치하고 구조적인 ‘의뢰 경로’를 구축했지만, 그 하부를 떠받치는 지역 서비스 공급자는 여전히 취약한 상태다. 수요는 구조화되었으나 공급은 임시적이라는 이 단절 구조가 지속된다면, 결국 신뢰받는 공공 시스템으로서의 지속성은 담보될 수 없다.
더 푸른 미래를 위하여
영국의 녹색 사회 처방 경험은 제도를 성숙시키고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교훈을 도출해 냈다.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녹색 사회 처방을 개별 ‘프로젝트’의 차원에서 벗어나, 보건 시스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인식하도록 정책과 예산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옹호 활동이 필요하다.
성공적인 미래는 견고한 파트너십에 달려 있다. 보건 부문, 정부 그리고 지역사회 단체와 자원봉사 부문을 아우르는 범사회적 협력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협력은 자원과 지식을 공유하고, 각 부문 간의 단절을 해소해 시너지를 창출하는 기반이 된다. 특히, 단기 경쟁 입찰 방식의 불안정한 자금 지원 구조에서 벗어나, 서비스 제공자들이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장기적인 재정 지원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
동시에 현장의 역량을 강화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도 계속되어야 한다. 일반의, 링크 워커, 그리고 잠재적 서비스 이용자 모두에게 녹색 사회 처방의 혜택과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또한, 장기적인 건강 영향과 비용 효율성에 대한 증거를 축적하여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녹색 활동 제공자들이 복합적인 정신 건강 문제보다 예방 및 초기 개입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만큼, 이들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과 임상적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궁극적으로 영국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성공적인 녹색 사회 처방이 단선적인 ‘의뢰 경로’를 넘어, 상호 연결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이다. 환자를 의뢰하는 과정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 제공자, 지역사회 파트너, 연구 기관, 정책 결정자 등 모든 구성원의 역량과 안정성, 그리고 통합에 투자해야 한다. 자연이 신뢰할 수 있는 처방전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둘러싼 보건 및 환경 생태계 전체가 건강하게 육성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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