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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뒷날 풍경ㅣ가정법이 있는 역사

2025-08-08 최은

휴가철에 읽는 역사 백일몽. 역사가 만일 ‘이랬다면’ 현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 세상을 바꾼 역사 사건들을 찾아 만약을 이야기해 본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팔지 않았다면, 히틀러가 빈의 예술학교에 합격했다면, 장제스를 감금했던 서안사변이 실패했다면 ...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7말8초에 휴가 시즌에 읽는 백일몽


당연히 역사에는 가정법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흔히 ‘~라면’이라고 이야기하는 주제들은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시중의 서점가에서 인기 있는 역사 분야 책들 중 이런 부제를 단 게 꽤 있다. 그러니까, 미스터리나 전설, 신화의 영역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인 책(에리히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 혹은 제카리아 시친의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같은 부류들)이나, 현대 음모론(외계인과 유대인과 로스웰 사건이 뒤범벅된) 다음으로 이런 가정법이 있는 역사의 풍경을 다룬 책들이 인기 있다.


흥미롭게도 필자와 같은 일반적인 역사 애호가들(딜레탕트) 뿐만 아니라, 전문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 역시 이런 식의 논쟁에 재미를 느낀다.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과 같이 이름 있는(물론 니얼은 학문적 성과와 함께 개또라이 같은 짓으로도 유명하지만) 학자들 말고도 인기 있는 유튜브 채널인 ‘역사를 보다’(역사 분야 베스트셀러가 된 컨텐츠) 출연진들 역시 이런 식의 논의를 즐겨 한다.


그래서 이번 글은 그냥 재미로 보는 역사 이야기 한 토막. 7말8초 휴가 시즌에 할 만한 백일몽 정도의 이야기다.


역사에 법칙이 있을까?


이런 얘기들 앞에 먼저 떠오르는 질문 하나. 역사에 법칙이 있는가? 어쩌면 그 많은 역사가들이나 애호가들이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려고 했던 게 우리가 아는 역사일지도 모른다. 종교가 하나의 거대한 시나리오를 제공한다면, 과학은 증명 가능한, 재현 가능한(물론 아닌 경우도 많지만) 법칙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너무나 당연히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역사가도 이런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다.(발견했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더러 있었지만) 또 다른 질문 하나. 절대 불변의 역사적 근거는 존재하는가? 사서나 사료와 같은 문서 혹은 고고학적 성과들이 과연 '절대적 사실(事實)로서 사실(史實)이 되는가?'라는 질문 역시 그렇다고 하기 힘들다. 거의 대부분의 사서가 승자의 기록이거나, 지배종족의 기록이라는 점. 일기를 써보면 알겠지만, 순전히 개인이 볼 목적으로 일기를 쓰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자기 입장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기술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왕이 서동요를 유행시켜 선화 공주와 혼인?


그래서 역사는 끊임없이 그의(He) 혹은 그녀의(Her) 스토리(History)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쓰여지고 고쳐질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만 꼽자면, 서동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백제 무왕이 청년 시절에 신라의 경주에서 서동요(薯童謠)를 유행시켜서 선화 공주와 혼인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도 있고. 하지만 2009년,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양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부인은 사택적덕이라는 백제 귀족의 딸이라는 사실. 이 증거 앞에서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당황했다. 우리가 역사를 지겨운 사실들의 총합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이 자유로운 사고실험을 해 봐도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대체역사라는 환상을 실제와 혼동하면 곤란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먼저, 유럽이나 미국 이야기. 가장 흔히 드는 가정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사실 클레오파트라가 고대 이집트인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코가 낮을 리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 역할로 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전형적인 유럽인은 아닐 것이고, 기록상으로도 그녀의 미모보다는 유려한 화술과 품위 있는 자태가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꼬시건(?) 아니건, 이집트가 로마제국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지 않았다면


하지만 때때로 이런 가정이 역사적 분수령이 되는 경우도 있다. 만약 1803년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 양안을 통틀어 현재 미국 본토의 삼분지 일쯤 되는 땅이다)를 미국에 판매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만약 러시아가 1867년 지금의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지 않았다면, 그래서 북미대륙 위쪽에 러시아령 영토가 존재했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나폴레옹이 재정적인 곤란에 처했고, 원거리의 식민지를 운영하는 데 따른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러시아 역시 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대의 미국 정부 역시 비용 부담을 둘러싼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모든 일련의 역사가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도자가 역사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단순히 역시 부동산(땅)이 최고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히틀러가 빈의 예술학교 시험에 합격했다면


현대사로 들어서면, 가장 흥미로운 가정은 아돌프 히틀러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아직 가난한 미술학도였을 때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학교 시험에 합격했더라면. 그랬다면 그저 풍경화가로 일생을 보냈을지.(물론 그의 개성 없는 그림들은 신나치에겐 성배와 같이 여겨지지만) 혹은 그가 전쟁 초기의 성과에 만족하고, 러시아와의 일전을 위해 바르바로사 작전에 돌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역사는 어떤 진로로 갔을 것인가. 확실한 것은 그랬다면,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는 출판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면서 벌어진 서안사변이 실패했다면


한중일로 시선을 돌려봐도 이런 가정법은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가정은 1936년 2.26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흔히 황도파-통제파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도조 히데키류의 광신적인 군국주의가 전면화되지 않았다면. 우리 입장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인 인물들이 벌인 헛짓거리인 듯 한데 일본인들은 꽤 진지하다.

스케일 큰 중국인들이 흔히 드는 가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 첫째 게빈 멘지스가 쓴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와 같은 시각에서, 영락제의 명으로 이루어진 정화의 대원정이 멈추지 않았더라면. 둘째, 1936년,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면서 벌어진 서안사변이 실패했더라면. 첫째는 모르겠지만, 서안사변이 없었더라면,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상대적으로 장제스와 가까웠던 임정과 김구 세력이 종전 후 새 정부 수립의 주축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서안사변이 있기 전 화청지 연회석에 참여한 장제스(왼쪽)와 장쉐량. 사진_80年前的双十二:西安事变重要人物图谱
서안사변이 있기 전 화청지 연회석에 참여한 장제스(왼쪽)와 장쉐량. 사진_80年前的双十二:西安事变重要人物图谱

광개토대왕이 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에서 그런 가정 중 대표적인 것이 ‘만약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일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 영토가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확장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충분히 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412년에 죽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있었을 법한 가정이다(그는 4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죽었다). 어쩌면 대역사가 신채호가 ‘일천년래 제 일사건’이라 칭한 ‘묘청의 난(1135년, 서경천도와 칭제건원을 명분으로 일어난)이 성공했더라면’과 같은 가정 역시 한반도를 넘어선 확장이라는 욕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에겐 어쩔 수 없이 ‘원념(怨念)으로서의 역사’라는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휴양지 한갓진 카페에서 오랜만의 역사책 읽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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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8월 14일

역사를보다...챙겨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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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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