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또 빈손으로 끝난 플라스틱 국제협약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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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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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에는 각국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율하여 합의점을 도출하는 힘을 가진 새로운 국제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김용만 대표 편집인
인류에게 플라스틱만큼 극적인 물질이 또 있을까 싶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플라스틱은 ‘꿈의 물질’이었다. 가볍고 튼튼했고 가공과 대량생산이 쉬웠다. 부족한 천연자원을 대체하고 다양한 물성을 설계 할 수 있는 만능 재료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저렴했다.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에서 추출한 화합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고분자 물질이어서 석유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 같았다. 얼마나 강력한 생활 혁신이었는지 플라스틱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랬던 플라스틱이 ‘악몽의 물질’이 되어 가고 있다.
플라스틱은 쉽게 썩지 않는다. 수백 년 이상 분해되지 않은 상태로 바다와 토양에 축적된다. 플라스틱에 포함 된 화학물질과 잘게 쪼개진 미세 플라스틱은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체에 가시적인 위험이 되고 있다. 석유와 가스 같은 화석연료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제조, 폐기 과정에서 대규모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현재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4%를 차지한다. 이대로라면 2050년에는 15%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재활용률도 9%가 채 안 되니 생산을 감소시키는 것 말고는 악몽에서 벗어날 길은 달리 없는 실정이다.
국제사회는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목표로 법적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을 추진 중이다. 2022년 3월 제5차 유엔환경총회 2차 회의는 175개국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024년까지 다섯 차례의 정부간협상위원회를 거쳐 2025년 중순 전권외교회의에서 확정될 예정이었다. 2024년 11월 25일 부산에서 마지막 제5차 협상위원회가 열렸다. 당연히 최종안이 나오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이었다. 올해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 속개회의로 미루는 것으로 봉합되고 말았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5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 속개회의 역시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작년 부산회의에서 노출된 한계점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플라스틱 생산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의 이견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협상위원회는 앞으로도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다음 협상 일정과 방식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국가 간 근본적인 이해관계 충돌을 조율하지 않고서는 협상위원회 차원에서 합의에 도달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합의를 어렵게 하는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원료 물질인 1차 플라스틱 폴리머와 플라스틱 생산 감축, 유해 화학물질 퇴출, 재원 마련이다. 플라스틱의 유해성을 부정하는 나라는 없다. 쟁점들을 들여다보면 결국 ‘돈’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과 산업문명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가능했다. 산업화 단계로 접어든 시기가 국가별로 달랐고, 현재의 나라별 상이한 산업구조를 만들었다. 산업구조는 돈을 만드는 방식을 결정하며 이에 따라 플라스틱에 대한 국가별 입장이 달라진다. 산유국을 포함하여 경제 규모가 크고 신흥강자인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플라스틱 협약 협상을 기피하는 이유다.
지금 지구상에는 195개의 독립국가가 있다. 국제연합(UN)이 인정하는 기준이다. 이들 국가 간에는 산업화 진입 시기별로 다양한 경제적 층위가 존재한다. 산업화가 미처 시작도 못한 나라도 있다. 플라스틱 국제협약에 적극적인 쪽은 주로 유럽연합과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반면 소극적인 쪽은 주로 신흥 개발도상국들이다. 유럽에 위치한 나라들은 이른 산업화 때문인지 ‘탈 화석연료 산업구조 개편’에도 빨랐다. 비유럽 지역에 위치한 신흥 개발도상국들에게 중화학 공업은 여전히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이다. 구조 개편까지는 시간이 좀 더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플라스틱 협약 협상이 공전하는 진짜 이유는 나라별 역사적 경험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른 탓이다. 당위성과 자발성에만 의존해서는 대타협에 이르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선은 ‘각개격파’가 답일 듯하다. 플라스틱의 유해함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인정하는 만큼 각국이 형편껏 노력하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위한 저마다 다른 계획과 일정을 세울 것이고 각국 정부 책임하에 추진하는 수밖에 뾰족한 묘수는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그렇다.
경제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움직인다. 수요가 줄면 공급도 준다.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겠지만 현실적인 대안으로 수요를 줄이는 노력에 주목해 보자. 전 세계 평균 재활용률은 9%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기껏해야 25% 남짓이다. 먼저 각국은 낮은 재활용률을 현저하게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를 반대하는 나라는 없다. 찾아서 할 일은 생각보다 많다. 불필요한 일회용품 사용을 삼가하고 우리나라에서만 매년 56억 병씩 생산되는 플라스틱 생수병을 줄이면 된다. 재활용률 통계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정부가 발표하는 재활용률은 70%가 넘는데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20%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각개격파식으로 각국이 알아서 노력한다고 해서 제대로 기후위기 대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기후 이상 변화는 지구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이고 일국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안다. 플라스틱 협상위원회가 만장일치 결의안을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개의 기후 관련 국제협약들도 만장일치의 의사결정 방식을 따른다. 국가 간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국제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회원국의 분담금에 의존하는 지금의 국제연합(UN)은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구조상 어렵다. 기후위기 시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국제기구가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우리 건강은 당신 손에 달려 있다. 플라스틱 속 유해 화학물질을 금지하라." 2025년 8월 5일~1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플라스틱 오염 대응 국제협약 성안을 위한 '제5차 정부간 협상위원회(Intergovernmental Negotiating Committee, INC) 제2부 회기(INC-5.2)'가 열렸다. 회의에는 전 세계 180여 개 유엔회원국 정부대표단과 국제기구, 산업계와 시민단체와 학계 등 관계자 37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은 회의장에 입장하는 각국 대표들을 향해 IPEN이 시위하는 장면. IPEN은 주로 저소득 및 중간 소득 국가인 120개 이상의 국가 600개 이상의 NGO가 참여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로 독성 화학 물질의 생산, 사용, 폐기로 인해 사람과 환경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는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사진_copyright: Florian Fussstetter / UNEP
언제 플라스틱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