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 | '교체' 권유 사회에서 '수리' 제안 사회로
- Dhandhan Kim
-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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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9월 26일
2025-09-26 김복연 기자
기업의 친환경 마케팅이 포장에 집중되는 동안, 본체 수명과 수리성은 방치되어 전자폐기물과 자원 낭비를 초래한다. 자동차 아반떼의 주간주행등과 이어폰 수리 사례는 작은 고장이 통째 교체로 이어지는 설계와 서비스 구조를 보여 준다. 수리 전제 설계, 부품·정보 공개, 수리용이성 지수, 공공조달 가점 등 정책·제도 개선과,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이 필요하다. 지속가능성은 교체 대신 수리 가능한 제품 구조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전구 하나 고장에 범퍼까지? 자동차 수리의 불투명 견적

김포의 김모씨는 세차 후 아반떼 주간주행등(DRL)이 꺼져 있는 걸 뒤늦게 알았다. 정비소의 진단은 간단했다. 전구 수명이 다했다는 것. 그러나 견적서는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램프 어셈블리–헤드(우측)’, ‘프론트 범퍼 어셈블리’ 교체 항목이 찍혀 있었고, 금액은 4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어떤 부품이 정확히 교체되는지, 왜 범퍼까지 묶이는지 소비자가 알 수 없었다. 세부 내역은 빠지고 ‘어셈블리 단위’만 남은 견적서 앞에서, 김씨는 통째 교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렌즈·하우징·방열판까지 폐기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고장이 아니라, 설계의 일체화와 견적의 불투명성이 소비자 선택권을 가로막는 구조였다.
이어폰 한쪽 고장도 교체 권유… 서비스 정책이 수명을 결정한다

연남동 전모씨는 최근 무선 이어폰을 들고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한쪽 이어폰에서만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잡음이 심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쪽은 멀쩡했지만, 직원의 설명은 단순했다. “한쪽만 고장이 맞지만, 사용하신 지 4~5년 되셨죠? 곧 다른 쪽도 고장 날 수 있으니 차라리 새 제품을 사는 게 낫습니다. 수리비가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전씨는 결국 수리를 포기했다. 이어폰의 배터리나 스피커 같은 소모품은 공식 교체 대상에서 빠져 있고, 교체가 합리적이라는 말만 남았다. 작은 고장이 곧 전체 폐기로 이어지는 구조, 그리고 반복되는 “오래 쓰셨네요”라는 말은 제품의 수명이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서비스 정책에 의해 단축됨을 드러낸다.
친환경 로고는 포장에, 진짜 문제는 본체에
기업은 재활용 포장재와 재생에너지 전환을 내세워 친환경 이미지를 구축한다. 물론 의미 있는 진전이다. 그러나 제품의 전체 환경 부담은 포장보다 본체의 수명·수리성·업그레이드 가능성에서 결정된다. 작은 고장에도 전체를 갈아끼우는 설계가 유지되는 한, 포장재에 붙은 친환경 로고는 늘어나는 전자폐기물 앞에서 무력하다. 친환경은 포장지가 아니라 제품 본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에코 디자인의 최소 요건 “수리를 전제로 설계하라”

에코 디자인은 얇은 두께나 세련된 외형이 아니라, 수리를 전제로 한 구조와 정보 접근에서 시작한다. 업계는 “밀봉을 풀면 방수가 깨진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해법은 있다. 처음부터 수리 후에도 방수·안전을 유지하는 표준을 설계하고 검증하면 된다. 자동차라면 주간등 모듈을 30분 안에 교체 가능하도록 분리 설계할 수 있고, 전자제품이라면 배터리·포트·스피커 같은 고장 빈도 높은 부품을 나사 체결과 표준 커넥터로 설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사업모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해외는 어떻게? 수리권 보장 흐름

EU는 2021년부터 가전제품에 ‘수리 가능성 지수’를 도입해 소비자가 분해 난이도·부품 가격·공급 기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는 스마트폰·노트북까지 확대해 점수를 의무 표시한다. 미국 여러 주에서도 ‘Right to Repair(수리권)’ 법안이 논의 중이다. 소비자는 기업 이미지 재고용 친환경 제품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쓸 수 있고, 수리할 수 있는 제품인가를 비교할 수 있다.
한국이 넘어야 할 과제: 포장에서 본체로
한국의 생산자책임재활용(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제도와 친환경 표시제는 포장 개선을 이끌어왔지만, 본체의 수리성·내구성은 여전히 사각지대다. 이제 정책으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수리용이성 지수 라벨 제도를 통해 분해 난이도, 부품 가격·공급기간, 소프트웨어 지원 연한을 소비자가 확인할 수 있게 표시하고, 부품·모듈 단위의 EPR(에코 모듈레이션) 정책을 통해 일체형·접착 구조에는 부담금을 높이고, 모듈 교체형·표준 설계에는 감면 혜택을 줘야 한다. 또 공공조달 가점제를 통해 관공서·공기업이 구매할 때 수리성·내구성·부품 보장을 기준에 반영하고, 정보 비대칭 해소를 위해 모델별 분해 가이드, 부품 호환성, 리퍼 전환율을 공개하는 공적 레지스트리를 구축해야 한다.
소비자가 지금 바꿀 수 있는 것들
제도가 완비되기 전이라도 소비자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차량·가전·모바일을 구매할 때 예비부품 공급 연한이 몇 년인지, 배터리·모듈을 공식 교체할 수 있는지, 수리 후 보증이 유지되는지를 먼저 묻자. 견적서에서는 통교환 외에 수리·리퍼·단품 교체 선택지가 있는지 확인하자. 질문은 곧 고객의 요구로 반영될 가능성을 높인다. 또 품질과 보증이 있는 리퍼·재제조 제품은 합리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체 권유 사회에서 수리 제안 사회로
김포 김모씨의 주간등 통교체 사례와 연남동 전모씨의 이어폰 수리 불가 사례는 묻는다. 진짜 친환경은 어디에 붙어야 하는가. 포장지가 아니라 제품 본체의 수명과 수리에 붙어야 한다. 지속가능성은 ‘오래 쓰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오래’를 가능하게 하는 건 개인의 성실함이 아니라 설계와 규칙이다. 작은 고장에도 전체를 버리지 않도록 하는 구조, 수리 후에도 안전·품질을 보장하는 표준, 그리고 부품과 정보에 접근할 권리. 이것이 갖춰질 때, 교체 권유 사회는 비로소 수리 제안 사회로 바뀐다.







교체 권유 사회가 수리 권유 사회로 바뀐 다는 건 선형경제에서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