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 이유정 해녀 | 세계에 바다의 변화를 알리다
- planetssong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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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3 김성희 기자

해녀 이유정은 인터뷰 당시 '하고 싶은 건 다 하자'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커다란 눈망울만큼 솔직하고 당당한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진짜 원하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청년 해녀다. 제주 이호마을의 막내 해녀 이유정 씨는 6년 차 물질 경력을 자랑하며 오늘도 제주 바다로 출근 중이다.
물속과 해안, 하천을 오가며 쓰레기를 줍는 일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그 꾸준한 실천으로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와 다큐멘터리 전문제작사 보더레스랩이 공동 제작한 해양 다큐멘터리 〈씨그널〉의 주인공으로 출연해 전 세계에 바다 환경오염 실상을 전했다. 이후, ‘아워 오션 컨퍼런스(Our Ocean Conference) 2025’ 국제회의 무대에까지 섰다.
최근 제주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수학하며, 바다의 풍경과 해녀 삼춘들의 숨비소리를 그림으로 남기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비젠빌리지 갤러리에서 열린 기획전 〈나에게 부는 바람, 제주〉에 참여했고, 현재는 제주 아쿠아플라넷 '제주 해녀의 바당' 특별전시에도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주, 바다가 불러낸 삶의 자리
내 인생은 해녀가 되기 위해 크로와상처럼 겹겹이 쌓인 과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워 관악부에 들어갔고, 선배들의 권유로 큰 금관악기인 튜바를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폐활량이 길러졌다. 대학에서는 우연히 중국어에 매력을 느꼈고, “13억 인구의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여 중국어 전공을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제주의 청춘들처럼 육지를 동경하며 서울로 향했다. 드라마 속 호텔리어나 항공사 직원처럼 멋진 직업을 꿈꿨지만 현실은 달랐다. 중국어 학원에서 일하며 아이들에게 단어 시험을 보게 했고, 붕어빵 장사와 액세서리 판매까지 했다. 주말도 명절도 없이 일했지만, 결국 나는 그저 서울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명랑소녀 성공기는 끝나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날 많이 울었지만, 빌딩 숲에서 지친 나를 품어준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고 위로가 되었다.
막연한 동경에서 현실의 바다로, 해녀가 되기까지
어릴 적 어촌마을에서 해녀 삼춘들을 보며 언젠가 나도 해녀가 되겠다고 막연히 꿈꾸곤 했다. 제주로 돌아온 뒤 외국인을 담당하는 회사에 다녔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다시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해녀 삼춘들을 마주쳤는데, 그 모습에서 광채가 나왔고 BTS처럼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고, 잊고 지냈던 해녀의 꿈이 다시 떠올랐다.
부모님의 반대는 거셌다. 아버지는 “맨몸으로 바다에 드는 건 위험하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이 훨씬 낫다”고 만류하셨다.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튜바로 다진 폐활량 덕분에 숨을 오래 참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고, 서툴렀던 수영은 스킨스쿠버를 배우며 물에 익숙해졌다. 해녀가 되기 위해서는 해녀 학교 졸업뿐 아니라 해녀회와 어촌계, 어업 경영체, 수협 조합원 가입과 인턴 해녀과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히 해녀회 가입은 기존 해녀 전원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 하기에 장벽이 높다. 여기에 60일간의 견습 생활과 120만 원의 위탁판매 실적도 채워야 했다. 직장 생활과 부모님 설득, 해녀 학교와 견습 생활을 병행하며 조금씩 단련해 나갔다. 그렇게 2020년, 드디어 해녀가 되었다.
바다의 리듬이 무너지고 있다

바다 생물이 살아가려면 계절에 맞춰 수온이 서서히 변해야 하는데, 그 리듬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우뭇가사리는 예전보다 크게 줄었고, 미역은 해마다 들쭉날쭉하다. 예를 들어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은 2023년 약 1000kg이었으나, 2024년에는 절반 수준인 500kg에 그쳤다. 그런데 올해는 무려 3000kg이 나왔다.
봄철 바닷물이 차갑게 오래 머물면서 평소보다 더 자라난 것이다. 원래라면 수온이 점차 오르며 미역이 성게의 먹이가 되고, 그 순환 속에서 생태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올해는 냉수 현상이 길어져 미역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졌다. 덕분에 해녀들은 한 달이면 끝나는 미역 작업을 두 달 넘게 이어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불과 닷새 만에 수온이 27~28도까지 치솟으면서 성게가 알을 다 배출해 버렸다. 6월은 성게철로 보통 20~21도에서 성게가 알을 채우지만, 올해는 18도에 머물다 갑자기 고수온이 찾아왔다. 위협을 느낀 성게는 미처 알을 키우지 못한 채 배출했고, 해녀들이 성게를 까보면 알이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체 수 자체도 급격히 줄어들어 작업은 한 달 만에 끝났다. 실제로 도의원도 “올해 성게는 작년의 3분의 1 수준”이라고 했고, 다른 해녀들도 같은 상황을 이야기했다.
고수온은 해녀들의 작업 환경도 힘들게 한다. 고무옷을 입고 물속에서 일하다 보면 더위와 답답함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한때 제주 바다에 흔하던 한치나 방어도 이제는 줄어들어 다른 지역에서 잡히고 있다. 제주에서는 오히려 애플망고 같은 새로운 작물이 더 잘 맞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기후변화가 해녀의 삶뿐 아니라 제주의 자연과 산업 전반을 뒤흔들고 있음을 매일 체감한다.
외래종에게 점령 당한 바닷속
기후변화와 해류 변화가 제주 바다 생태계에 직접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어 예전과 확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가장 먼저 꼽는 변화는 외래종인 ‘롱핀 성게’다. 필리핀 등 열대 해역에 서식하던 종인데 이제는 물질하다 보면 쉽게 마주칠 정도로 흔해졌다. 성게는 암반에 붙은 해조류의 밑동까지 갉아 먹어 바다 생태계를 황폐화시킨다. 특히 롱핀 성게는 알이 거의 없어 까보면 빈 껍데기뿐이라 상품성이 낮다. 사람 가까이 가면 가시를 길게 뻗어 위협적이며, 가늘고 잘 끊어지는 가시에 찔리면 칼이나 바늘로 파내야 할 만큼 고통이 심하다. 먹을 수도 없고, 생태계까지 무너뜨리는 존재인 셈이다.
열대성 물고기들의 출현도 잦아졌다. 알록달록한 어종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고, 최근에는 범고래 세 마리가 제주 바다에 나타나 맴도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범고래는 대체로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물속에서 마주치는 상황이라 완전히 안심할 수 없다.
해녀의 눈에 비친 바다, 끝없이 쏟아지는 쓰레기

해녀들이 물질을 하러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늘 쓰레기다. 고기들이 폐그물에 걸려 죽어 있거나, 플라스틱 조각들이 물속을 떠다니는 모습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쌈장 통, 세제 용기, 포장된 상태 그대로의 김치가 바다를 떠다녔고, 아버지는 예전에 바다에서 식당에서 쓰던 대형 냉장고를 끌고 들어오신 적도 있었다.

플로빙을 할 때 웃으며 쓰레기를 주우려 애쓰지만, 속으로는 늘 울고 있다. 올해 8월에는 우럭 떼가 통째로 그물에 걸려 전부 죽은 장면을 보기도 했다. 열흘 동안 청소를 해서 5톤의 쓰레기를 수거한 적도 있었는데, 트럭이 더 있었다면 훨씬 더 많이 가져올 수도 있었다. 스티로폼은 부서질수록 작은 가루가 끝없이 퍼져 나와 ‘바다 속 뻥튀기’라고 부를 정도다. 테트라포드 안쪽은 위험해 전문 구조대와 함께 청소를 한다. 가스통, 자동차 의자, 심지어 상괭이 사체까지 봤다. 그런 것을 마주친 해녀들이 얼마나 놀랄지 생각해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쓰레기를 치우는 ‘제주 좀녀’, 사람들과 함께하는 힘
한번은 고무신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물질을 하다가 유리 파편에 발이 찔려 살이 벌어진 상태로 세 시간이나 바다에 들어가 있었던 적이 있다. 젊었기에 금방 나았지만, 연세 많은 해녀 삼춘들이었다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한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물질할 때 초반 절반쯤은 쓰레기를 주우며 작업을 했다.


해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내 바다 내가 치우자’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내가 사는 이호동 바다는 우리가 책임지자는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삼춘들이 “너나 치워라”라며 거절했지만, 결국 트럭을 몰고 나타나 “어디부터 치우면 되냐”고 나섰다.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해녀 생활을 하면서 늘 바다 청소를 해 왔다. 물질하다 눈에 보이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며 그냥 주웠다. 그러다 사람들이 “저 해녀가 청소한다”며 사진을 찍어 알리기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게 된 것 같다. 이 일을 계기로 함께 청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한 명, 두 명씩 뒤따라오더니, 많을 때는 50명이 함께 바다를 청소했다. 지금은 삼춘들도 함께 쓰레기를 줍는다. 내가 하니 곁에서 함께 나선 것이다. 그 순간마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작은 시작이 공동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해양 쓰레기, 개인의 선의로는 지킬 수 없는 바다
바다에서 쓰레기를 건져 올리는 일보다 더 큰 문제는 이후 처리다. 항구의 임시 보관소는 용량이 작아 금세 가득 차고, 결국 쓰레기를 바닷가에 쌓아두거나 지인에게 부탁해 처리한다. 자동차 의자, 대형 가스통, 수 톤의 폐그물과 같은 대형 폐기물은 해경이나 군이 협력하는 특별 청소일에 크레인 같은 장비 투입으로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지만, 해녀 혼자라면 수 일 이상 걸린다.
그러나 지자체는 “예산이 없다”,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시 지원을 꺼린다. 체계가 부재하다 보니 애써 주운 쓰레기가 방치되기 일쑤이며, 이 과정에서 민원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매일같이 바다를 청소하면서도 “내 손으로 다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빠진다.
행사나 대회가 있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해양수산부 산하기관이나 지자체가 주관하는 해양 폐기물 수거 행사에 참여하면 쓰레기가 공식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폐어구 수거 경진대회에서 모아둔 쓰레기 약 4톤 정도가 전량 처리되었다. 이러한 일회성 행사에 의존하지 않고는 처리가 어려운 현실은 분명한 한계다.
바다는 개인의 선의만으로 지켜낼 수 없다. 제도적 지원과 구조적 변화가 뒤따라야만 해녀도, 해양 생태계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
환경 활동은 보상이 아니라 책임 구조로 이어져야
좀 더 체계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해 보자는 생각으로 ‘제주 좀녀’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다. 제주 해녀를 뜻하는 ‘좀녀’, 또 하나는 “제주 좀 바라봐 주세요”라는 의미다. 제주에도 다양한 환경단체가 활동하지만 흩어져 움직이다 보니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지자체가 매개체가 되어 일정한 수거량과 안전 기준을 정해 주면 활동가들도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달에 3톤까지만 수거하자”는 합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제주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이 운영하는 환경 프로그램에는 아쉬움이 많다. 청소에 참여하면 선크림이나 텀블러를 나눠 주는 방식은 겉으로는 ESG 활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린워싱에 가깝다. 보여 주기식 이벤트보다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지원이다.
환경 활동은 ‘보상’이 아니라 ‘책임’이어야 한다. 우리 단체는 물 한 병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인사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해양 청소를 봉사가 아니라 ‘치료’라고 생각한다. 바다를 살리는 백신은 없고, 꾸준한 청소와 감축의 실천이 곧 치료제다.
청년 해녀를 외치지만, 버티기 힘든 해녀의 현실

30년 전만 해도 전복 한 마리에 10만 원이 넘었고, 하루에 열 마리를 잡는 것도 가능했다. “전복이 물속에서 날아다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바다는 달라졌다. 올해만 해도 성게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 수입이 크게 감소했고 미역은 수확량이 늘었지만 값이 싸고 보관이 어려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산물이 줄고 기후변화로 서식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해녀들의 생계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실제로 내가 해녀로 버는 평균 연수입은 100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겸업을 하고 있다. 해녀 공동체 안에서는 “청년 해녀를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경제적인 매력이 줄어든 바다에서 후배 유입은 쉽지 않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삶의 방식이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 제주의 바다에서는 알록달록한 열대 어종을 만날 수도 있고, 때로는 롱핀 성게에 찔려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는 경험이다.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저렇게 사는 게 즐거워 보인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해녀의 삶은 충분히 의미 있고 매력적이다.
선한 영향력,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
내 인생의 롤모델은 김만덕 선생님이다. 제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자신의 곳간을 열어 도민들을 구휼했고, 임금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소원을 말했던 용기가 존경스럽다. “금강산을 보고 싶다”, “궁궐을 보고 싶다”는 말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근거와 긍정을 향한 의지였다. 나는 그런 용기와 기개를 본받고 싶다.
내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움직이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힘을 얻는다. “이유정 해녀를 만났구나”라는 기억이 누군가에게 남고,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어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다. 내가 퍼뜨린 선한 영향력이 사람들을 이끌어 함께하게 하고, 그 에너지가 나를 더 열심히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기에 늘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내가 한 일은 크지 않지만 오늘도 바다로 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활동을 이어가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김만덕 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유별난 사람이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해녀’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더 큰 시너지를 얻었고, 그 과정에서 환경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기록하게 되었다.
해녀의 자산어보,변화하는 바다 생태를 후대에 전하고파

뉴스에 해녀 해양 사고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바다가 깨끗해야 한다. 오래도록 바다에 들어가 ‘해녀의 자산어보’를 쓰고,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바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바다를 청소할 때마다 사진을 찍고 글을 남긴다. 박카스병에 붙은 해양생물, 범섬에서 발견한 담배꽁초 더미, 바다에 쌓인 쓰레기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내가 주운 쓰레기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지금 바다가 어떤 상태인지 보여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녀들의 사진을 찍고, 그림도 그리고 있다. 제주 아쿠아리움에는 내가 그린 해녀 삼촌과 회장님의 초상이 전시돼 있다. 다들 닮았다고 말하면서도 본인은 못생기게 그렸다고 웃곤 한다. 이런 활동은 “제주의 중심은 해녀다.”로 이어진다. 해녀로서, 또 지역의 한 사람으로서 바다와 사람을 잇는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있다.
언젠가는 나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다와 해녀, 그리고 우리가 치워온 쓰레기의 기록을 남기는 책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도 쓰다 울고 웃기를 반복하고 있고, 어쩌면 10년은 걸리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출간하고 싶다. 더 나아가 ‘해녀의 자산어보’를 만들고 싶다. 바다에서 만난 해산물을 기록하고 “이 종은 몇 년도에 나타났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식으로 남기고 싶다. 단순한 채취의 기록이 아니라, 변화하는 바다 생태를 후대에 전하는 해양 문화사로 남기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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