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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 정성헌 |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 남과 북이 밥상 앞에 마주 앉기 위하여

2025-05-20 김성희 기자

정성헌 이사장이 DMZ평화생명동산 안에 심은 나무와 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planet03
정성헌 이사장이 DMZ평화생명동산 안에 심은 나무와 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planet03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춘천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해 복역한 뒤, 월간 사상계에서 민주화·통일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1970~1980년대에는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며 쌀생산비·농지임대차·농약사용 실태조사 등을 통해 농민 현실 개선에 힘썼고, 민간 최초로 쌀수매가에 생산비를 반영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장을 맡아 종자 복원과 소비 확대를 이끄는 생명·공동체 운동을 주도했다. 1996년부터 연어사랑 시민모임 대표, 남북강원도교류협력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민관협력형 남북교류모델을 만들어 냈고,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새마을운동 중앙회 회장을 역임하며 기후위기 극복 생명살림 국민운동을 추진했다. 1998년부터 국내외 각계 인사들이 참여를 조직하여 DMZ평화생명마을추진위원회를 구성, 사업 착수하여 2009년 ‘한국DMZ평화생명동산 교육마을’ 개관 이후, 이사장으로서 DMZ평화생명교육을 약 2529회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학생·교사·군인·공무원 등 8만 2천여 명이 참여했다. 남북평화회의 상임고문이며 제24회 심산상을 수상했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무너뜨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마저 붕괴시킨다


기후위기의 실체가 뭔지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위기는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작년 9월, 경기도 이천에서 일어난 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60대 A씨가 배추 10포기를 가져갔다고 생각한 이유로, 70대 B씨와 다투었다. 결국 A씨가 B씨를 밀었고, B씨는 넘어져 사망했다. 이후 그 A씨는 구속됐다. 언론은 이 사건을 과실치사로 다뤘지만, 나는 이것을 기후 문제로 본다.

그 해 여름은 폭염이 심각했다. 작황 부진으로 배춧값이 급등했고, 추석 전에는 한 포기에 2만 원 가까이 했다. 10포기면 20만 원이다. 예전 같으면 농촌에서 배추 두세 포기쯤은 나누기도 했겠지만, 요즘은 다르다. 정이 끊겼고, 생존이 팍팍해졌다. 결국 배추 10포기를 두고 벌어진 다툼은, 공동체 해체의 단면이었고, 기후가 일상을 어떻게 파괴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무너뜨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마저 붕괴시키며 결국 죽음까지 초래한다. 그러니 기후는 단지 온도나 날씨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 곧 삶의 문제다.


생명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면 기후위기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기후’, ‘평화’, ‘정의’ 같은 단어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하지만 그 말들을 제대로 말하려면, 먼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무게 있는 언어일수록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의나 기후, 평화를 말할 때 조심스럽다. 이제 말에 갇히지 말고,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말보다 삶이 더 중요하며, 실천으로 증명된 가치만이 지속될 수 있다. 나는 '기후평화'라는 말보다 ‘생명공동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쓴다. 일반적으로는 '생태공동체(ecology)'라는 말이 쓰이지만, 그것은 일본식 번역어에서 온 개념이기 때문에, 나는 '생태'보다는 '생명'이라는 말이 훨씬 뿌리 깊고 본질적이라 생각한다. 생명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구체적인 삶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생명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면 기후위기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생명은 결국 ‘밥’에서 나오며 함께 밥을 먹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남과 북이 함께 먹는 상상, 그것이 곧 공동체 회복의 시작이다.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진짜 평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아주 작고 구체적인 삶의 감각에서 시작된다.


기후와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의 평화’다. 나는 “평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내가 평화롭지 않으면, 이웃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과 청년들이 평화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큰 이슈 중 하나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늘고 있고 그 원인은 꽤나 복합적이다. 사회적 불안, 가족 갈등, 디지털 중독, 교육 스트레스, 정치적 무력감, 경제 양극화까지 모든 것이 겹쳐 있다. 그 결과, ‘나의 평화’는 무너졌다.

DMZ평화생명동산의 삼태극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성헌 이사장. 사진 planet03
DMZ평화생명동산의 삼태극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성헌 이사장. 사진 planet03

그리고 이 개인의 평화가 없는 것은 곧 ‘나와 너의 평화’도 무너뜨린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가정을 살펴보면 아이는 학원에 끌려다니고, 부모는 교육비와 생계비로 압박받는다. 엄마는 지치고,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아이도, 엄마도, 아버지도 모두 평화롭지 않은 상태이며, 이것이 바로 ‘나와 너의 평화’가 깨어진 상태다. 그리고 그 균열이 확장되면, 사회 전체의 평화도 사라진다. 우리는 자주 정치, 군사, 외교에서만 평화를 찾는다. 하지만 평화는 그보다 훨씬 가까운 곳인 가정과 학교,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일상의 평화 없이는 어떤 제도도 작동하지 않는다. 진짜 평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아주 작고 구체적인 삶의 감각에서 시작된다.


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과 환경,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유지된다는 자각이 교육의 시작이다


'동학'은 19세기 조선에서 탄생한 민중 중심의 사상이자 종교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하늘을 내 안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철학은 당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명 중심의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단순히 억압에 맞서는 저항을 넘어, 억압자와 함께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질서와 인간관계를 제안했다. 후천개벽은 세상을 뒤엎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꾸고 나아가자는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

오늘날 교육은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일로 정의해 왔다. 아이들에게 권리를 가르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게 하며, 사회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교육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따지고, 어른과 대립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정작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법,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법, 때로는 멈추고 기다리는 태도는 배우지 못한 채 성장해버렸다. 이것은 민주주의는 제도 이전에 삶의 방식이며 태도의 언어인데, 우리는 감각을 가르치지 않은 채 제도만 주입했고, 권리만 강조해 왔다.

나는 교육 현장에서 ‘천지인민(天地人民)’이라는 감각을 먼저 이야기한다. 하늘과 땅, 사람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하나이며, 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과 환경,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유지된다는 자각이야말로 교육의 시작이다. 그 안에서 비로소 겸손이 생기고, 연결의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민주시민이 되기 전에 천지인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자연과 생명,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감각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권리’는 무게를 지니고, ‘책임’은 설득력을 가지며, ‘민주’는 타인을 향한 배려와 이해로 확장될 수 있다.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철학이 아니라 밥상으로, 평화는 그렇게 전해진다


직접 재배하고 있는 채소들을 바라보는 정성헌 이사장. 사진 planet03
직접 재배하고 있는 채소들을 바라보는 정성헌 이사장. 사진 planet03

강원도 인제 한 자락에 자리한 DMZ평화생명동산은 이곳은 남북이 맞닿은 최전선이었고, 총구가 먼저였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에서 ‘평화생명’이라는 순서를 굳이 고집한다. 말의 순서 하나에도 사상의 뿌리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한 교육장이 아니며,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운동의 터전이고, 밥 한 끼조차도 철학과 삶의 태도로 빚어내는 작은 공동체다. 왜 이 깊은 산골까지 내려와 이 일을 하냐고 묻는 이들이 많지만, 내 대답은 단순하다. 여기서는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사지식일완’(萬事知食一碗)’ 세상만사의 이치가 한 그릇 밥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평화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누군가에게 어떻게 밥을 지어내느냐에서 비롯된다. 좋은 밥을 대접하는 마음, 그 안에 자연을 아끼고, 타인을 배려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실천의 씨앗이 담겨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식(食)’을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좋은 밥을 대접하라”는 것이 첫 번째 교육 방침이다. 판매가 아니라 ‘대접’이며, 마음이 담겨 있기에 우리 식당에서는 대충 밥을 해내지 않는다. 어떤 교육생이 오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그날 어떤 계절의 채소가 자라고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며 식사를 준비한다. 고기를 요구하는 이가 있으면, 먼저 설명하고, 정말 원하면 한 가지만 해준다. 아무리 손님이라도 음식 남기면 그건 안 된다고 말한다. 좋은 밥을 대접하는 것은 단순한 영양배분이 아니라 지구와 생명을 위한 실천의 선택이고, 교육은 입이 아니라 손과 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밥을 대접하는 건, “그 사람의 하루를 책임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밥 한 그릇을 먹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면, 그것이 진짜 교육이고 운동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말만 하지 않고, 직접 나무를 심고, 전기를 아끼고, 태양광 밑에서 농사를 짓는다.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철학이 아니라 밥상으로, 평화는 그렇게 전해진다.


학교와 가정에서 평화를 회복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는 결코 통합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의 실패다. 지금의 교육 체제는 무한경쟁을 동력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학교와 가정은 ‘나와 너의 평화’를 가장 심하게 깨뜨린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고, 정작 정치에 대한 당리당략에만 몰두하고 있다. 학교와 가정에서 평화를 회복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는 결코 통합될 수 없으며 평화는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서로 비교하게 만들고, 가정을 성적과 생존의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으니, 진정한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평화를 말하기에 앞서,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출발점은 복잡한 이론이나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감수성이고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평등은 모두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소중하다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은 때때로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왜 나에게는 똑같이 하지 않느냐”는 요구는, 어느새 서로를 겨누는 잣대가 되기 쉽다. 그렇기에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이 자리 잡고 비로소 ‘너도 소중하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평등보다 ‘공경’이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고 싶다. 남성이 여성을 공경하고, 여성이 남성을 공경하고자 할 때, 평등이라는 요구 없이도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공경은 타인을 나와 같은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지금의 교육 현장에도 공경이 절실하다. 학생 인권이 강조되면서 교사와 학부모, 학생 사이의 ‘상호 공경’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말하지만, 정작 관계를 지속시키는 책임과 존중의 감각은 실종되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되찾는 것, 그게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생명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나무나 풀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기 때문에 내가 숨 쉴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다른 생명을 먹고 숨 쉬며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생명이 나의 생명을 유지해 주고 있구나, 고맙다”는 감각을 일깨워 줘야 한다.

물도 마찬가지며,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지구가 평균보다 2배 이상 빠르게 뜨거워졌고, 이로 인해 바다와 생명들이 지속적으로 위협 받고 있다. 모든 생명은 공기, 물, 흙 같은 비생명에 기대어 살아간다. 이 단순한 생명의 법칙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도, 실천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걸 나는 ‘모심’과 ‘살림’이라고 부른다. 이 두 단어가 생명평화운동의 핵심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되찾는 것, 그게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생명을 해치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맞서야 하며, 단지 기후를 지키기 위한 환경운동이 아니라, 생명을 모시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고, 소비를 줄이며 스스로 삶을 다시 구성하는 것, 전기를 아껴쓰는 등 모든 것을 직접 실천하는 일이 바로 생명을 위하는 삶이다. 생명을 위하는 삶은 늘 구체적이어야 하며 절약을 실천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석탄화력발전소를 막는 것과 같은 거대한 전환의 시작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회복하고, 그 감각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명평화의 시작이며, 우리가 가야 할 가장 근본적인 길이다.


식습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구조, 문화를 바꾸는 일은 곧 사회를 바꾸는 일이 된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과학적 사실은 이제 대부분 공유되고 있다. 축산물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막대하고, 식습관 변화만으로도 탄소 부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전문가들을 통해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많은 이들이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강연을 가게 될 때면, 나는 가장 먼저 그 학교 식당을 찾는다. 학생들에게 어떤 밥이 나오는지를 보면, 그 학교의 철학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값싸고 질 낮은 식사를 당연하게 제공하는 곳은 대체로 교육의 깊이도 기대하기 어렵다. 학교가 식당을 직영이나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고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가 함께 출자해 운영한다면, 밥을 매개로 민주적 협력과 공동 책임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길러질 수 있다.

1980년, 곡물과 채소 중심의 식단이 자연스럽게 유지되던 시기에 고기는 드물게, 달걀은 귀하게 여겨졌던 그 시절의 밥상이야말로 기후 친화적이면서도 인간 중심의 밥상이었다. 그 이후 고기 소비는 10배 이상 늘었고, 우리는 대장암 세계 1위라는 통계와 함께 숨 가쁜 성장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다. 식습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구조이고, 문화를 바꾸는 일은 곧 사회를 바꾸는 일이 된다. 입맛이 바뀌면 시장이 바뀌고, 시장이 바뀌면 밥상이 달라지며, 단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와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공동체나 기후 협력이라는 말이 처음 가능해지는 건 결국 김치 한 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앞서 말한 이천의 배추 사건은 기후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였고,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식탁과 공동체의 관계가 더는 안전하지 않다는 징후였다. 고랭지 채소 하나가 무너지자 관계도 무너지고, 삶의 질서도 금이 가는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문제는 폭염이 계속된다면 이 구조는 반복될 것이라는 거다. 우리나라의 남은 고랭지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해발 1000미터 이상에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나는 자연스럽게 북쪽을 생각하게 된다. 해발 1200미터 평균 고도에 경기도보다 넓은 고원지대를 가진 개마고원은 농업이 중단된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땅이다. 거기서 무와 배추를 유기농으로 잘 지어낸다면 단지 품질 좋은 김치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이 다시 같은 밥상에 앉게 될 구체적인 이유가 만들어진다. 바다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의 우리 바다는 너무 많이 망가졌고, 동해와 서해, 남해를 다시 생명의 바다로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화를 말할 자격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하는 소리에 우리가 제대로 대응하려면, 먼저 우리가 바다를 지켜야 한다. 바다가 공유지이고, 생명의 장이며, 협력의 바탕이라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생태공동체 구상은 단지 생태적인 이유만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북이 같은 식물의 뿌리를 딛고 있다는 물리적, 생물학적 연결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다. 생명공동체나 기후 협력이라는 말은 늘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런 말이 처음 가능해지는 건 결국 김치 한 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치는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숨 쉬고, 물 마시고, 밥 먹는 기본의 문제부터 책임져야 한다


정치가 모든 것을 말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는 시대다. 양극화와 기후위기를 해결하겠다는 공약은 넘치고,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말만 반복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공정한 분담이다. 소득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이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내야 한다. 그래야 사회는 균형을 되찾고, 기후 대응도 가능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가장 적게 실천한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울대학교는 넓은 부지, 충분한 예산, 인적 자원까지 모두 갖췄지만 서울시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기관이다. 줄일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한데, 실질적인 감축 노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낙동강을 따라 살아가는 1300만 명의 사람들이 수십 년째 녹조가 낀 물을 마시고 있다. 깨끗한 물은 생존의 최소한이지만, 정치인은 아무도 이 문제를 책임 있게 말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새로운 공항과 도로, 건물을 짓는 데에는 앞장선다. 결국 태도의 문제이다. 나는 정치가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숨 쉬고, 물 마시고, 밥 먹는 기본의 문제부터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천은 복잡한 계획보다, 지금 있는 조건 안에서 시작될 수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결국 의지다. 기후위기에 책임지는 사회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생명의 질서를 배워야 시장도 움직이고, 남과 북도 다시 밥상 앞에 마주 앉을 수 있다


시장은 스스로 바뀌지 않으며, 이끌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시장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밥상과 교육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과 정치라는 축을 이용하여 광장이 변해야 한다. 이런 광장의 변화는 아이들의 식습관과 감각,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하고, 그렇게 변화한 개인들의 삶이 조금씩 사회 전체의 방향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장은 둔감하고, 사회는 양극화되고, 정치는 타협을 잃었고, 환경은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모든 흐름의 바깥에서 아직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일상의 회복, 생명을 존중하는 감각의 복원, 그리고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권리 이전에 책임을, 민주 이전에 생명의 질서를 배워야 한다. 그렇게 생명을 느끼고 연결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질 때, 시장도 움직이고, 남과 북도 다시 밥상 앞에 마주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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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3일 전

기후문제도 결국 밥상으로 귀결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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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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